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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05화 (505/530)

505화. 흐르는 강물처럼

황궁, 창룡전.

창룡전의 유일한 학사인 사일천은 오늘도 언제나처럼 책을 읽고 있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사일천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마치 대쪽 같은 선비처럼 사일천은 묵묵히 책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일천의 모습에 변화가 생겼다.

슥.

사일천은 눈을 들었다.

그러고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노려보았을까?

사일천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었다.

“……드디어.”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사락.

눈을 뜬 사일천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자락을 펄럭이며 창룡전을 나섰다.

저벅, 저벅.

사일천은 돌아보지 않았다.

창룡전에 다시 적막이 내려앉고, 아무도 없는 서탁에는 펼쳐진 책만이 조용히 놓여 있을 뿐이었다.

***

운현 일행은 관의 쾌속선을 타고 장강을 따라 내려갔다.

이제는 장로와 가주, 절정고수 들도 서로 익숙해진 듯 다들 여유롭게 장강의 풍경을 즐겼다.

그 모습을 보며 영호준은 혀를 내둘렀다.

“알고는 있었지만 놀랍군요. 저분들이 모여 있는데 저런 분위기라니…….”

예전 무림맹 때의 기억이 생생한 영호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과거에는 대표자들의 회합만으로도 살벌하기 그지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장로와 가주 들은 서로 농담마저 건넬 정도였다.

물론 그 농담에도 가끔씩 뼈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예전에는 만날 기회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운현이 웃으며 말했다.

가주와 절정고수는 문파의 최후 보루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지금처럼 같은 목적을 위해 힘을 합치는 건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정사대전을 겪으며 서로의 입장과 은원이 복잡하게 얽혀 있던 상황에선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 영호준이 감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슥.

운현은 뱃전에서 한가로이 대화를 나누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수 신니가 피식 웃으며 일행에게 말했다.

“누구를 데려오건 우리 미아에겐 안 될 것일세. 헛고생 마시게나.”

“모용 소저를 이길 생각은 없소이다. 어차피 정실부인이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소?”

군자검 제갈명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걸 결정하는 분은 신니가 아니라 우리 맹주님이시고.”

천수 신니의 눈살이 꿈틀했다.

그녀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제갈명을 바라보았다.

“설마 제갈가의 손녀를 맹주님의 측실로 들이겠다고 하시는 것이오?”

“측실이 아니라 정실부인이오.”

옆에 앉아 있던 철검 남궁벽이 담담히 말했다.

“가문과 가문의 제대로 된 결합이라면 몇 번째가 되건 딱히 꺼릴 것은 없다고 보오만.”

천수 신니는 입을 딱 벌렸다.

제갈명이나 남궁벽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사실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자존심 강한 제갈가와 남궁가가, 아무리 정실이라 해도 자신들의 손녀를 둘째나 셋째 부인으로 들일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허어.”

천수 신니는 탄식을 흘리며 불호를 외웠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한마디 해 주기를 원하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운현은 얼른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천수 신니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촤아아.

운현은 아무것도 못 본 척 부서지는 물결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뒤통수가 따끔따끔한데, 옆에 있던 객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놈들이 귀찮게 할 거라고 내가 말했지?”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객옹이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운현은 최선을 다해 일행의 시선을 외면했다.

여기서 자신이 한마디 하는 건 되레 일을 더 키울 위험이 있는 데다가, 나이 많은 어르신들에게 말로 이길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지. 오히려…….’

어설프게 말을 꺼냈다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익장들에게 말려들어서 자칫 ‘일단 만나는 보겠다’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그간 가까워진 것은 장로와 가주 들만이 아니어서, 운현이 그들을 향해 느끼는 정(情)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사이, 장로와 가주 들은 시선을 돌리곤 다른 화제로 대화를 이어 갔다.

운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득 객옹이 물었다.

“북해일문에 일대상인에 대한 조사를 맡겼더냐?”

운현은 고개를 돌려 객옹을 바라보았다.

“네. 그렇습니다.”

“어째서냐? 그런 일이라면 남궁세가도 뛰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만.”

“외부인의 시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운현은 답했다.

“이곳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의문을 가지고 볼 사람들 말입니다.”

객옹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운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뻔히 보이는 곳에 일대상인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냐?”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왕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일대상인은 뛰어난 수하와 조직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심산유곡에 숨어서 할 수는 없지요. 자금성만 해도 보이는 것과 달리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드나들어야 천하를 운영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말하던 운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일대상인이 세상을 떠나 산속에 숨어 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요. 오히려 대도시나 그 인근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대상인은 결코 세속을 떠나 은거하는 도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천하를 발아래 두고 오만한 시선으로 굽어보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마치 자금성의 황제처럼 말이다.

“흐음.”

객옹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거나 가능한 빨리 찾는 것이 좋다. 그가 또다시 세상을 어지럽히기 전에 말이다.”

혈교와 마교가 토벌되었지만 일대상인이 또 어떤 음모를 꾸밀지는 알 수 없다.

객옹이야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것에 별 상관 않지만 운현은 가만있지 않을테니까.

“아마 곧 찾게 될 것입니다.”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일은께서 머지않았다 하셨으니까요.”

그것은 일은이 운현에게 한 말이었다.

운현이 일대상인과 결착을 지을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이다.

조용히 고개를 돌린 운현은 뱃전에 부서지는 물살을 바라보았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은 일행을 싣고 정해진 순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

운현 일행이 탄 배는 장강의 물결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다.

관군이 마교의 군세를 토벌했다는 소식은 이미 장강 유역에 가득했지만 민심은 여전히 뒤숭숭했다.

‘마교’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들에게 큰 불안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마교에 대해 걱정했고, 이러다 세상이 어찌 될지 모른다며 수군거렸다.

난주뿐만 아니라 감숙성 전체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져 가고 있었다.

“이거 참, 환마의 머리라도 챙겨 놓을 걸 그랬군요.”

영호준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있자면 과거 민란의 주동자를 왜 효수했는지 납득이 갈 정도였다.

마교의 군세를 토벌했음에도 여전히 민심이 좋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환마나 마병은 효수할 수 없다.

시신조차 남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창룡맹 개파대전에 대한 소문을 더 크게 퍼트려야겠습니다. 맹주님과 다른 어르신들께서 마교의 수뇌를 토벌했다는 소식도 알리고요.”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개파대전을 서두르는 게 아니라, 소문을 낸다고요?”

“소문에 사실로 맞서면 늦습니다.”

영호준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소문은 소문으로 맞서야지요. 환마가 맹주님의 검 앞에서 벌벌 떨었다더라는 이야기를 퍼트려야겠군요.”

“떨진 않던데요.”

운현이 말했지만 영호준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 어차피 다 ‘카더라’ 아닙니까? 아, 혹시 환마가 한 말 같은 것 없습니까? 예를 들어 ‘창룡검주의 검은 하늘을 꿰뚫는구나’ 같은 감탄사 말입니다.”

영호준의 말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魔)의 말에 귀 기울이면 안 되네.”

천수 신니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불호를 외고는 영호준을 바라보았다.

“설령 일말의 사실이 담겨 있다 해도 결국은 마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는 궤계인 것이니, 환마와 논쟁치 않으신 맹주님의 처사야말로 옳은 것이라네.”

마치 설법이라도 하듯 엄한 목소리로 천수 신니가 말했다.

그러나 영호준은 오히려 눈을 크게 떴다.

“오, 그거 좋군요. 맹주님께서 환마에게 ‘너는 나와 논쟁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걸로 하지요. 용과 마귀라, 대비가 아주 괜찮은데요?”

영호준은 빙긋 웃기까지 했다.

천수 신니는 어이가 없는 듯 눈을 크게 떴으나 곧 헛웃음을 흘렸다.

비록 과장되긴 했어도 그런 상황이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촤아아.

부서지는 물소리와 함께 수군의 무관 한 명이 운현에게 다가왔다.

그는 운현에게 예를 표하고 말했다.

“곧 남경에 도착합니다.”

“감사합니다.”

운현이 답하자 수군은 다시 예를 표하고 물러갔다.

남경에서 배를 내리면 항주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바로 총단으로 가시겠습니까?”

영호준이 운현에게 물었다.

그 눈빛에 담겨 있는 속내를 운현은 모르지 않았다.

“긴 여정에 어르신들께서도 지치셨으니, 남경에서 잠시 머물다가 가지요.”

운현의 말에 영호준의 표정이 환해졌다.

본래 풍류를 즐기는 영호준이니 남경에서 머물다 가자는 말을 싫어할 리가 없었다.

싱글벙글하는 영호준의 모습을 보던 운현은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운현은 조용히 영호준에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당 소저께서 그, 무언가 약을 쓴 것 같던데…….”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이미 다 해독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연 매의 애정 표현이 조금 살벌하긴 하지만 그게 또 연 매의 매력이니까요. 뭐, 나중에 눈물 좀 흘려 주며 반가워 해 주면 됩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연인에게 서슴없이 독을 쓴 당설련이나, 그걸 애정 표현이라며 좋아하는 영호준이나 운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두 사람이 서로 목숨을 걸 정도로 연모하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쏴아아.

그사이, 배는 천천히 남경의 부두로 다가가고 있었다.

“음?”

문득 객옹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운현 역시 객옹이 본 것을 알아차렸다.

“학사님!”

운현은 밝은 얼굴로 말했다.

강바람에 옷자락을 휘날리며 부두에 서 있는 중년의 학사.

그는 바로 사일천이었다.

객옹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사일천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일행은 의아한 듯 운현과 사일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응? 저 사람은…….”

하지만 노부인 능세영이 중얼거린 순간, 일행은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은 아닌가?”

모두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한때 천하를 울리던 환우오천존, 그중에서도 가장 신비하다는 인물인 일은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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