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환마
자박.
운현이 가볍게 땅을 디뎠다.
그 자그마한 소리가 마치 신호라도 되는 듯 빙설과 천수 신니 그리고 철검 남궁벽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타닥.
세 사람은 운현과 객옹 좌우로 내려섰다.
주위를 둘러싼 마병들의 움직임을 경계하며 세 사람은 흘깃 운현을 바라보았다.
슥.
환마가 고개를 들고 운현을 내려다보았다.
“……제법이구나.”
세차게 떨리던 환마의 눈빛은 어느새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운현에게 못 박힌 채였다.
“그 정도의 경지라면 마병은 상대도 되지 못하겠군. 어쩌면 마군에 필적할 수도 있겠고…….”
마치 품평이라도 하듯 환마는 운현을 살펴보았다.
그의 입가엔 어느새 진득한 웃음이 걸리고 있었다.
“아니, 아예 나를 넘어설 수도 있었겠구나. 한 움큼의 마기에 기대어 연명하던 예전의 나라면 말이다.”
환마의 표정과 목소리는 운현을 조롱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번들거리는 그의 눈동자는 운현을 향한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스륵.
뒷짐을 지고 있던 환마가 한 손을 내밀었다.
“어떠냐?”
그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천마신교에 귀의한다면 마군의 위(位)를 내리겠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누리며 네 모든 욕망을 마음껏 채워 보지 않겠느냐?”
환마의 눈동자가 유독 강렬하게 빛났다.
그 눈빛에 마기가 어려 있음을 천수 신니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천수 신니가 막 일갈을 터트리려 할 때였다.
“거절합니다.”
운현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항마와 파사의 기운을 담지도 않았고 내력이 실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운현의 목소리는 마치 깊은 산사의 풍경 소리처럼 청량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저는 그런 것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니까요.”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천수 신니는 자신도 모르게 운현을 돌아보았다.
운현의 눈빛에 흔들림은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환마를 눈앞에 두고서도 말이다.
“후후.”
환마가 웃음을 흘렸다.
“그런 것을 위해 오지 않았다라……. 참으로 오만하구나. 네 길[道]을 너 스스로 정한다는 말이더냐?”
조소를 머금은 채 환마는 말을 이었다.
“그래. 너라면 자격이 있지. 보이는 것을 넘어 공허에 다다른 자라면 말이다.”
환마는 눈을 빛냈다.
“하지만 네가 여전히 욕계에 머물러 있는 이상 내 힘을 피할 수는 없다.”
휘릭.
환마는 내밀었던 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보이지 않는 음험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환마는 광소를 터트렸다.
“그러니 얌전히 내 힘이 되려무나. 으하하하하!”
콰과곽.
“위험……!”
다급하게 천수 신니가 소리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락.
운현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와 함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후우웅.
운현을 향해 짓쳐 들던 음험한 기운이 순간 그 기세를 잃었다.
맹수처럼 덤벼들던 기운이 마치 산들바람처럼 허공중에 흩어져 버린 것이다.
소리를 치려던 천수 신니는 말을 잇지 못했고, 막 몸을 날리려던 철검 남궁벽과 빙설도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지만 제일 놀란 사람은 바로 환마였다.
슥.
운현이 손을 내렸다.
그때까지도 환마는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탐욕의 눈빛도, 오만한 미소도 사라진 채 그저 경악한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쿵, 쿵.
멀리서 화포 소리가 들려왔다.
예정에 없던 화포 소리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다. 너는, 너는…….”
환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당신과 무엇을 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의 말을 끊으며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다만 이곳에서 당신의 악행을 끝낼 뿐입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굳은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던 환마는 문득 조소를 흘렸다.
“흐흐. 내 악행을 끝낸다고?”
환마는 빙긋 웃었다.
그 모습은 기이하고 섬뜩해서 마치 악몽이라도 보는 듯했다.
“네가 나를 어찌한다 해도 악을 끊을 수는 없다. 아니, 설령 지고의 좌에 올랐다 한들 불가능한 일이지.”
운현을 똑바로 노려보며 환마는 말했다.
우웅.
“우리는 무수하니라.”
그 목소리는 마치 바닥 없는 구멍에서 울려 오는 듯 웅웅거렸다.
천수 신니조차 혐오감이 아닌 공포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릉.
청명한 한 줄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운현의 검, 미명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소리였다.
“상관없습니다.”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말했지 않습니까? 당신과 무엇을 논할 생각은 없다고요.”
슥.
미명이 환마를 향했다.
그저 그것뿐이었지만, 천수 신니는 자신을 누르던 공포가 사라졌음을 느꼈다.
철검 남궁벽도, 빙설도 마찬가지였다.
쿵, 쿵.
멀리서 화포 소리가 들려왔다.
천수 신니는 문득 환마가 했던 말에 생각이 미쳤다.
‘마군!’
환마는 마군이 깨어났다고 했다.
지금 들리는 화포 소리는 관군이 곤란을 겪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한 줄기 불안이 천수 신니의 마음에 스며든 순간이었다.
파밧.
아무런 신호도 없이 마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십여의 마병들은 일제히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천수 신니는 즉시 반응했다.
“어딜!”
파라락.
그녀의 옷자락이 펄럭이며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철검 남궁벽과 빙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콰앙.
천수 신니의 권격이 십여명의 마병을 날려 버렸다.
남궁벽과 빙설의 검기 역시 짓쳐 드는 마병들을 베어 갔다.
객옹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후우욱.
어느새 내민 그의 손바닥 위로 작은 나비가 떠올랐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는 권격을 쏘아 내던 천수 신니마저 움찔하게 만들 정도였다.
“미친!”
천수 신니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하지만 작은 나비는 이미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몸을 돌려 도망하려던 환마에게로 말이다.
“큭.”
환마는 이를 악물었다.
객옹의 천향접이 지닌 기세는 그로서도 경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그는 외칠 수밖에 없었다.
“막아라!”
그 명에 마병들이 즉시 반응했다.
남아 있던 수십 명의 마병들은 일제히 몸을 돌려 천향접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천향접은 이미 거대한 죽음의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콰아앙.
폭음이 터지고 돌풍이 일었다.
환마가 서 있던 대청마루가 산산이 부서져 파편이 휘날렸다.
천수 신니는 물론 남궁벽과 빙설 역시 몸을 낮춰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운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저벅.
운현은 그 엄청난 혼란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맹주! 위험…….”
천수 신니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슥.
천향접이 만들어 낸 폭풍과 흙먼지가 운현을 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 돌풍이 잦아들었다.
‘아!’
천수 신니는 눈을 크게 떴다.
천향접의 엄청난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환마는 건재했다.
비록 옷자락은 찢기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졌으나 크게 다친 곳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에는 운현의 검, 미명의 끝이 정확히 닿아 있었다.
천향접을 버텨 낸 환마가 운현의 검은 피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운현의 검 때문에 환마는 천향접을 버텨 내야만 했다.
“흐, 흐흐.”
환마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베지 않느냐?”
운현은 담담한 시선으로 환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일대상인은 어디 있습니까?”
환마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조소를 머금었다.
“과연 그렇구나. 좌(座)의 주인이 둘일 수는 없으니. 너는 아직 위(位)에 오르지 못하였구나. 크크크.”
환마는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말해 줄 것 같으냐?”
“안다면 말하겠지요.”
운현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의 말로 인해 나와 일대상인이 싸우게 될 테니 어찌 말하지 않겠습니까?”
환마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래. 분열과 다툼이야말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지. 너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아는구나.”
환마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운현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좌에 집착하느니 차라리 이 욕계의 왕이 되는 것은 어떠하냐? 네가 고개만 끄덕인다면 만마가 네게 앙복할 것이다. 심지어 나조차도 말이다.”
그의 목소리는 사뭇 은근했다.
그러나 운현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당신은 모르는군요.”
운현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대상인이 어디 있는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악.
섬뜩한 마기가 환마로부터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운현은 즉시 검을 그었다.
서걱.
“큭큭큭.”
환마는 웃었다.
떨어져 내리는 머리가 웃는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후회 역시, 우리가 지독히도 사랑하는 것이지.
그가 쏟아 낸 마기는 운현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콰과곽.
보이지 않는 마기는 거센 파도처럼 객옹을 향해 덮쳐들었다.
운현은 즉시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미명을 그어 올렸다.
서걱.
미명의 궤적을 따라 마기가 갈라졌다.
아니, 갈라진 것은 마기만이 아니었다.
미명의 칼날이 지나간 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처럼 텅 비어 버렸다.
그 광경 앞에서도 객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카앙.
독기공이 서린 객옹의 손짓에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튕겨 나갔다.
정확히는 운현이 베어 버린 마기의 여파였지만,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기운이 객옹의 손짓 한 번에 막혀 버린 것이다.
천수 신니와 남궁벽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데 객옹은 무심히 손을 내리며 말했다.
“처음이라면 모르거니와, 알면서도 당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보이지 않는 기운이라 해도 그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객옹에겐 위협이 되지 못했다.
운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스릉.
그의 검 미명이 칼집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행입니다. 어르신.”
운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객옹은 대답없이 무덤덤한 시선으로 환마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새카맣게 변해 버린 환마의 잔해는 형태조차 남기지 못한 채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객옹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파라락.
바람 소리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갔던 장로와 가주, 절정고수 들이 날아왔다.
그들은 운현과 객옹을 중심으로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운 공자, 괜찮나?”
금화영이 다급한 표정으로 운현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운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금화영은 운현을 위아래로 살펴보며 혹시 다친 곳이 없나 확인했다.
그사이, 군자검 제갈명은 슬쩍 주위를 돌아보고는 혀를 찼다.
“쯧, 이미 끝났군.”
운현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부서지는 새카만 잔해들은 모든 일이 끝났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태을 진인과 청송 진인은 도호를 외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쿵, 쿵.
멀리서 화포 소리가 들렸다.
제갈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리는 남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관군이 고전하는 듯하군.”
“마군(魔君)이 깨어났다고 하오.”
천수 신니가 나지막이 불호를 외우며 답했다.
“마군? 마군이라면…….”
제갈명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천수 신니가 운현을 돌아보았다.
“맹주. 우리도 도우러 감이 좋지 않겠소?”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혹시 모르니 가 보기로 하지요.”
환마가 쓰러졌으니 모든 마병은 극심한 혼란에 빠질 터였다.
마군조차 예외는 아니어서, 성 밖에서 전투를 벌이던 마병들은 이미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어서 갑시다.”
천수 신니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땅을 박찼다.
장로들과 절정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군자검 제갈명은 부서진 잔해를 바라보다가 문득 철검 남궁벽에게 말했다.
“운이 좋으셨소이다. 환마를 상대하다니.”
남궁벽은 쓴웃음을 지었다.
운현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자신과 빙설, 천수 신니는 환마의 손에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객옹의 대처를 생각해 보면 환마를 전혀 당해 낼 수 없는 것 또한 아니었다.
슥.
철검 남궁벽은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남궁벽의 예에 답했다.
탁.
남궁벽은 남쪽 성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여러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지만 보다 높은 경지를 향한 갈망만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객옹이 보여 준 천향접과 그에 개의치 않고 걸어 들어갔던 운현의 뒷모습, 그 놀라운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