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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01화 (501/530)
  • 501화. 개전(開戰)

    운현은 박 공공과 이야기를 마친 후 군막을 나왔다.

    군막 바깥까지 배웅을 나온 박 공공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인 후, 운현은 마차에 올라탔다.

    따각, 따각.

    마차 밖으로 난주대진의 모습이 스쳐 갔다.

    십만의 군사들이 있는 난주대진은 말 그대로 소도시나 마찬가지였다.

    물자를 싣고 분주히 오가는 마차와 사람의 모습은 마치 번잡한 거리나 시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만 모두 군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실제로 난주대진의 뒤쪽, 서안 방면에는 상인들이 모여들어 제법 큰 장터를 형성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검문은 엄격했다.

    운현이 탄 마차도 예외는 없어서 몇 번이나 멈춰서 검문을 받아야 했다.

    군사들과 함께 공동파의 도사들까지 배치된 모습은 마병에 대한 대비가 철저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운현이 탄 마차는 난주대진을 벗어나 인근의 조그만 소도시로 향했다.

    바로 그곳에 다른 일행들이, 문파의 장로와 세가의 가주 그리고 절정고수 들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결국 당문의 새로운 문주께서는 이곳에 오지 않으신다는 뜻인가?”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은 찻잔을 들며 말했다.

    짐짓 담담해 보였지만 그의 어조는 불편한 속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당설련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불타 버린 가문을 수복하는데 신임 문주께서 자리를 비울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런가? 나라면 제갈세가가 불탔다 해도 이곳에 왔을 것 같네만…….”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당설련은 말없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보기에 군자검 제갈명의 의도는 뻔했기 때문이다.

    ‘신임 문주의 기를 눌러 놓으려는 심산이겠지.’

    당혁이 검기발현의 고수이자 당문의 문주라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과는 감히 견주지 못한다.

    당장 군자검 제갈명은 물론이고 비검 공손월이나 철검 남궁벽만 해도 정사대전을 지나온 백전노장들이 아닌가?

    그나마 그들보다 연륜이 부족하다는 철검 남궁벽과 관일검 모용단천조차 당혁에겐 어려운 상대였다.

    “허어, 참으로 아쉽구려.”

    아미파의 천수 신니가 두 손으로 찻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당문의 신임 문주께서 성도의 영웅이자 당문의 희망이라는 소문이 하도 자자하여 이번 기회에 그 무위를 견식하고 싶었거늘…….”

    “흠. 그러게 말이오. 혹 비무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비검 공손월까지 말을 보탰다.

    당설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당문이 창룡맹의 일원이 되었으니 앞으로 기회가 있지 않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설련은 천수 신니나 비검 공손월과 당혁을 맞붙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과거 천수 신니와 북해일문의 빙설이 벌인 비무는 당설련의 기억에 지금도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 천수 신니와 겨루다니, 당혁이 적어도 청홍쌍노의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세가의 가주나 문파의 절정고수 들이 비무를 한다고? 이건 정말이지 미친 짓이야.’

    당설련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떠돌이 무인도 아니고 절대 권력자이자 문파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가주와 절정고수 들이다.

    그들이 거리낌 없이 비무를 하고 서로의 무공에 대해 평을 하다니,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로 믿지 않을 이야기였다.

    과거 무림맹 시절처럼 서로 경계하고 의심하며 몰래 밀약을 맺는 것에 익숙한 당설련으로서는 너무나 생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창룡맹의 맹주가 만든 새로운 질서인 거네.’

    총명한 당설련은 이 광경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들에게 있는 건 무도(武道)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은 아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장로와 가주, 그리고 절정고수들은 암묵적인 협약에 동의한 것이다.

    그 협약이 가져올 결과는 보지 않아도 명백했다.

    ‘결국 강호 무림은 이들의 뜻대로 움직이겠지. 아니, 정확히는 맹주의 뜻대로.’

    당설련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운현은 단순한 맹이 아니라 강호 무림을 움직이는 비밀스러운 집단을 만들어 낸 것이다.

    “헌데 신임 문주께서 너무 젊으신 것 아닌가?”

    문득 들린 비검 공손월의 목소리가 당설련을 상념에서 일깨웠다.

    당설련은 반사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옳은 말씀이세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엔 최적이지요. 희망이란 공허한 듯하면서도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거든요. 실제로도 훌륭하게 당문을 이끌고 계시고요.”

    “하긴 그도 그렇군.”

    공손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조만간 가주의 직위를 내려놓을 생각이었으니까.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변해야지.”

    당설련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 시국에 공손세가의 가주가 바뀐다니, 이건 그야말로 엄청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차피 가주 자리야 다들 이미 내려놓기로 한 것 아니었소?”

    군자검 제갈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는 차를 음미하며 말을 이었다.

    “창룡맹 개파대전이 열릴 때 즈음엔 다들 세대교체가 되겠군. 젊은 사람들끼리 마음이 잘 맞을지도 모르겠어.”

    제갈명의 말에 당설련은 충격에 빠졌다.

    제갈세가와 공손세가의 가주가 바뀐다는 것보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다들 무덤덤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네.’

    당설련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이들이 강호 무림을 움직일 것이라는 자신의 추측이 증명된 셈이었지만 기쁘지 않았다.

    당문이 뒤처진 것 같은 느낌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아.’

    당문에는 객옹이 있다.

    그가 있는 한 강호 무림의 주요 결정에 당문이 배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늦었다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어서, 당설련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아, 저기…….”

    누군가 젊은 여인이 당설련에게 말을 걸었다.

    당설련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금가장의 금화영.’

    자신과 비슷한 연배지만 금화영은 절정고수다.

    그녀의 스승인 능세영의 무위는 객옹이 인정할 정도이고 말이다.

    “아, 금 여협이시군요.”

    당설련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문의 당설련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금화영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당설련에게 답례했다.

    “반갑네. 금화영일세. 저기, 실은 내 자네에게 부탁이 있는데…….”

    젊은 여인의 말투가 왠지 노인 같았지만 당설련은 상관하지 않았다.

    “부탁이시라니, 무엇인가요?”

    “신임 문주님이 비무를 하게 되면 나도 좀 부탁하네. 어르신들이 자꾸 나를 따돌리려 하거든.”

    당설련은 잠시 멍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깜박이는데 천수 신니가 웃으며 말했다.

    “허허. 금 여협께서는 아직 젊지 않으신가? 연애도 하고 천하를 두루 다니며 견문도 넓혀 보시게. 본래 인생을 깨달아야 무공에도 깊이가 더해지는 법이라네.”

    “그래. 그건 나도 동감이다.”

    온화한 인상의 노부인 능세영이 말했다.

    하지만 금화영은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허나 빙설 여협에겐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하지 않는가?”

    그 말에 천수 신니와 능세영이 빙설을 돌아보았다.

    빙설은 한쪽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금화영이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면 존재조차 깨닫지 못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설련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언뜻 시녀처럼 보이는 저 빙설이 북해십이비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저쪽은 사정이 좀 달라서…….”

    능세영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빙설은 누가 봐도 세속과 인연을 끊은 사람이다.

    게다가 북해십이비의 한 사람이니 금화영과 사정이 같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금화영과 빙설을 보며 당설련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과연…….’

    당설련은 굳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이래서 준 랑이 내게 반드시 와야 한다고 했구나.’

    당문의 재건으로 한창 바쁜 당설련이 이곳에 와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준 랑, 곧 총군사 영호준이 강력히 권했기 때문이다.

    당문을 다시 짓는 것보다도 이 일이 훨씬 중요하다면서 말이다.

    이 광경을 보지 못했다면 아마도 당설련은 창룡맹 내의 권력관계에 대해 치명적인 오해를 했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운 공자!”

    금화영이 반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당설련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저벅, 저벅.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운현이 걸어왔다.

    잘생긴 총군사 영호준도 함께였다.

    “다녀왔습니다.”

    운현이 객옹과 어르신들을 향해 예를 표하며 말했다.

    장로와 가주, 절정고수 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운현에게 답했다.

    문득 철검 남궁벽이 운현에게 물었다.

    “맹주. 환마와는 언제 싸울 수 있소이까?”

    사람들의 눈이 빛났다.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환마와 싸우기 위해서였다.

    공동파의 기록에 따르면 환마는 마교의 호법이자 기이한 능력을 지닌 전설적인 존재다.

    혈마인을 상대할 기회를 놓친 가주나 절정고수 들은 환마를 상대할 것이라는 운현의 말에 서슴없이 동참을 결정한 것이다.

    물론 맹주인 운현의 요청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환마와는 곧 싸우게 될 것입니다.”

    운현은 총군사 영호준을 돌아보았다.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인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후 관군이 난주를 향해 대규모 공세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넷으로 나뉘어 난주 시내로 잠입합니다.”

    “넷으로 나눈 이유가 있나?”

    철검 남궁벽이 물었다.

    “환마가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장소가 세 곳이기 때문입니다. 맹주님과 객옹께서는 환마의 위치가 확인되는 곳으로 합류하실 것입니다.”

    “그럼 서둘러야겠군.”

    군자검 제갈명이 말했다.

    “맹주께서 오시기 전에 끝을 내려면 말일세.”

    그의 눈빛은 자신감으로 넘치고 있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잔잔한 웃음이 번져 가는데 문득 운현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의 무리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로와 가주, 절정고수들을 바라보며 운현이 말했다.

    “어려움의 때에 여러분이 곁에 계셨음을 저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운현은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정중히 예를 표했다.

    덜컹.

    철검 남궁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운현을 향해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맹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영광이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오.”

    다른 장로와 가주, 절정고수 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각자 한마디씩 하며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당설련은 착잡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이전 무림맹에서도, 그리고 태평맹에서도 절대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

    두두두두.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난주대진에서 출정한 기마대는 난주를 향해 포위하듯 좌우로 달려 나갔다.

    기마대가 난주대진에서 충분히 멀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관군의 화포가 불을 뿜었다.

    쿵.

    그것이 시작이었다.

    난주대진에 설치된 수백 대의 화포는 일시에 포문을 열었다.

    쿵, 쿠웅, 콰앙.

    말 그대로 빗발치듯 포성이 터져 나왔다.

    쉴 새 없이 울리는 폭음은 귀가 멀 듯했고 땅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난주의 성벽에서도 몇 번 화포가 발사되었지만 그 영향은 미미했다.

    콰르르릉.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포격에 결국 난주의 성벽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성벽이 무너지는 모습은 차라리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제독 총병관 박 공공은 나지막이 명했다.

    “출정하세요.”

    옆에 서 있던 무관은 즉시 신호를 올렸다.

    펄럭.

    깃발이 오르는 것과 동시에 지축을 울리던 화포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대군이 난주대진에서 쏟아져 나왔다.

    두두두두두.

    전투의 함성 같은 건 없었다.

    일만의 기마대가 선봉으로서 달려 나가고, 수만 명의 군사가 질서 정연하게 그 뒤를 따랐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마교의 군세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화포가 멈추자 성벽이 무너진 곳과 성문을 통해 무수한 마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난주의 운명을 건 전투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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