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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00화 (500/530)
  • 500화. 재건(再建)

    난주가 함락되었다는 소문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사천은 몰려드는 피난민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지만 그건 잠시였다.

    포정사 왕안민이 대도시 성도의 문을 열어 피난민들을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을 수용하는 한편, 이번 난리로 크게 줄어든 성도의 인구를 확충하여 재건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도였다.

    걱정했던 물자 역시 간단히 해결되었다.

    인접한 운남, 귀주, 호남, 호북성에서 갑자기 엄청난 물자가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난주의 대패로 예부 상서 장위의 계파가 축출되고 다시 실권을 회복한 박 공공이 즉시 지원을 결정한 까닭이었다.

    박 공공은 그야말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황제는 박 공공을 우군도독부의 임시 도독으로 임명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독 총병관으로서 전권을 하사했다.

    비록 임시라고는 하지만 군의 최고위직에 올랐다는 것은 박 공공이 환관 조직과 관료 조직의 정점을 차지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예전의 실권을 회복한 것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새로운 제독 총병관이 된 박 공공은 즉시 난주로 향했다.

    편제된 군사만 십만 명, 휘하 장수가 열둘에 수많은 화포와 물자까지 동원된 엄청난 군세였다.

    그 규모는 이번 난리를 진압하겠다는 황실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

    사천의 민심은 좋지 못했다.

    대도시 성도가, 비록 며칠간이라 해도 마병에 의해 점거당했고 난주의 피난민들이 몰려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불에 탔던 성도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재건을 위한 수많은 물자들이 날마다 밀려 들어왔고, 피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덕분에 인력도 충분했다.

    덕분에 성도는 난리의 아픔을 딛고 내일을 위한 희망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불에 탔던 당문 역시 재건을 위한 공사가 날마다 이어졌다.

    성도 외곽.

    다행히 마병의 피해가 비켜 간 한 장원에 운현 일행이 머무르고 있었다.

    사천의 포정사 왕안민이 얼마든지 쓰라며 내어 준 장원이었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저택이 제법 커서 일행 전부가 머무르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는 일행의 비무로 인해 저택의 후원은 날마다 황폐해 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음. 그래서 박 공공이 난주로 온다는 뜻이냐?”

    객옹이 찻잔을 쥔 채 물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박 공공이 오면 난주를 차지하고 있는 마교의 횡포도 끝이 날 것입니다.”

    지금 객옹은 운현과 함께 조그만 뜰에서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흙먼지가 흩날리는 후원에서는 도무지 차를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대상인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인데, 직접 개입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혈교가 무너질 때도 일대상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교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일대상인에 대해서는 어찌하려느냐?”

    “그가 어디에 있는지 찾고 있습니다.”

    운현은 진중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우선은…….”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객옹 역시 찻잔을 들어 올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맹주님!”

    총군사 영호준이 밝은 얼굴로 걸어왔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사박, 사박.

    당설련이 영호준과 함께 조용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동생이자 한창 성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당혁의 모습도 보였다.

    저벅.

    세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운현과 객옹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맹주님께 예를 표합니다.”

    덜컹.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밝은 얼굴로 세 사람의 예에 답했다.

    “어서 오십시오, 당설련 소저. 그리고 오래간만입니다, 당혁 대협.”

    고개를 든 당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대협이라니요, 제게는 과분한 호칭입니다.”

    그는 눈을 빛내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맹주님이야말로 진정한 대협이시지요. 성도와 당문을 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혁은 손을 모으고 다시 감사의 예를 표했다.

    한때는 창룡검주 운현에게 질투를 품었었지만 태평맹에 맞서 아미를 구해 내는 운현의 모습은 당혁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 길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폐관수련에 들었던 당혁이, 마병이 성도를 불태우자 앞장서서 사람들을 구해 낸 것이다.

    검기발현의 무공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훤칠한 외모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당혁을 성도의 젊은 영웅이자 당문의 희망으로 부를 정도로 말이다.

    “할아버지.”

    당설련은 객옹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객옹은 고개를 돌린 채 묵묵히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사락.

    당설련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당문을 구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당혁 역시 가문의 어른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객옹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이제 당문이 할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릴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그러니, 마음이 내키시면 언제든 돌아오세요.”

    객옹을 바라보는 당설련의 눈동자는 진심을 담고 있었다.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객옹이다. 당문을 구한 것 또한 내가 아니라 현이의 뜻이었다.”

    슥.

    눈을 돌려 당설련을 바라보며 객옹은 말했다.

    “허나 네가 드디어 자신의 길을 정한 듯하니 그것은 잘되었구나.”

    “……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당설련은 말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객옹은 무심히 고개를 돌려 차를 음미했다.

    사락.

    당설련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약속을 지킬 차례네요.”

    “네?”

    운현의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데 문득 당혁이 무릎을 꿇었다.

    쿵.

    당혁은 무릎을 꿇고 운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두 주먹이 땅에 닿았다.

    “당혁이 당문의 죄를 대인께 사죄드립니다.”

    운현은 깜짝 놀랐다.

    “아니, 대협이 그럴 필요는…….”

    “당혁은.”

    당설련이 운현의 말을 끊었다.

    “오늘부터 당문의 문주로 추대되었어요. 이는 당문의 구성원 전체의 뜻이며 이미 장로회의에서도 승인된 사항이에요.”

    장로회의의 승낙을 받아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문을 버리고 피난한 장로회의의 추태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약속만으로도 당설련은 그들의 승인을 받아 낼 수 있었다.

    비록 피난을 권유한 사람은 총괄군사 당설련이었지만, 어려움의 때에 장로들이 당문을 버리고 피한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저 또한.”

    당설련은 운현을 향해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사락.

    “창룡검주님께 스스로의 죄를 사죄드려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이전 같은 당당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두 분의 사죄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맹주의 권한으로 오늘부터 당문을 창룡맹의 일원으로 인정하지요.”

    당설련과 당혁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총군사 영호준은 싱글벙글했지만 객옹은 그저 묵묵히 차를 음미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객옹의 표정에 희미한 미소가 스치는 것을,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운현의 입가에도 어느새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마교의 군세는 감숙의 요충지인 난주를 차지했다.

    이로서 감숙의 대부분은 마교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한편 난주를 빼앗긴 관군은 서안 방면, 난주 서남쪽에 진을 치고 이를 ‘난주대진’이라 칭했다.

    이 난주대진을 이끄는 제독 총병관이자 우군도독부의 임시 도독인 박 공공은, 지금 자신의 군막에서 운현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간 참으로 고생 많았네. 박 공공.”

    운현이 찻잔을 쥐고 말했다.

    박 공공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만에요. 고생은 오히려 운 학사님이 하셨지요. 저야 가만히 있었을 뿐인걸요.”

    박 공공의 복권은 두 사람 모두 예측한 바였다.

    소위 새로운 실세라는 자들이 마교의 군세를 ‘민란’이라 우길 때부터 이미 예상한 일인 것이다.

    ‘민란’이 아니라 ‘마교의 군세’임을 박 공공이 여러 번 간언하였고, 심지어 운현이 직접 병부 좌시랑을 찾아가 그를 벌하고 경고를 하였음에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아닐세. 자네가 정말 고생이 많았네.”

    운현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실 박 공공은 그간 반쯤 유배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권력의 복마전인 황실에서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운현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헌데 이곳이 자네의 군막인가?”

    차를 음미한 운현이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박 공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쓸데없이 크기만 한 곳이지요.”

    본래 제독 총병관의 군막은 저택 부럽지 않을 정도로 크고 화려하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너무나 검소해서 오히려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난주를 탈환할 계획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지금 휘하 장수들과 군략을 세우고 있는 중입니다.”

    달칵.

    찻잔을 놓으며 박 공공이 말을 이었다.

    “적이 비록 마교의 군세라지만 몇 가지만 주의하면 일반적인 전투와 다를 바 없더군요. 어차피 집단과 집단의 충돌에서 개인의 역량이란 지극히 제한적인 영향밖에 미치지 못하니까요.”

    집단의 사기나 훈련의 정도 같은 건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수만 단위의 집단이 충돌하는 전투에서 개인의 역량은 사실상 그 의미가 퇴색한다.

    게다가 서로가 상대의 약점과 강점을 파악하고 있다면 더더욱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창룡맹 총군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휘하 부대에 도인이나 승려를 지휘관의 자문역으로 한 명씩 배치하는 것 말입니다. 물론 정식 편제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임시 종군 형식으로요.”

    총군사 영호준은 이미 박 공공에게 그간 파악한 마교의 자료를 넘겨주었다.

    방금 한 말 역시 영호준이 박 공공과 운현에게 했던 제안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사천 포정사에게 관청이 지불을 책임지는 보증서의 발행을 제안하셨다면서요?”

    박 공공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네. 당시에는 중앙 조정의 지원을 얻을 확신이 없어서…….”

    “운 학사님. 그렇게 좋은 일은 제게 먼저 알려 주셨어야죠.”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박 공공이 말했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좋은 일이라니, 무엇이 말인가?”

    중앙 조정의 지원이 필요한 게 좋은 일이라니?

    게다가 그때는 아직 박 공공이 실권을 회복하기도 전 아닌가?

    “은전이나 다를 바 없는 보증서라니, 이것이 좋은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종이에 직인만 찍으면 돈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아,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라고 운현은 말하려 했다.

    하지만 박 공공은 빙긋 웃었다.

    “이런 중대한 일을 사천의 지방 관청에 맡겨 둘 수는 없지요. 보증서의 발행은 제가 금지시켰습니다. 이런 일은 황실이 주도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황실이?”

    운현은 여전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박 공공은 싱글벙글했다.

    “네. 황태자께서 들으시고 무릎을 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황실과 조정의 재정 문제를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엄청난 계책이라고 말입니다. 당장은 재정이 탄탄하니 필요 없지만, 만약의 경우에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허나 종이에 직인만 찍으면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위험한 발상일세.”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상단이 갑자기 몰려든 보증서의 지급 때문에 무너진 경우가 무척이나 많거든. 결코 안이한 생각으로 발행해서는 안 되네.”

    “옳습니다.”

    박 공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래서 제가 사천의 보증서 발행을 금지한 것이기도 하고요. 아, 그러고 보니 일충현 교두님의 딸이 호암상단의 총감찰이라고요?”

    “그렇네.”

    박 공공은 빙긋 웃었다.

    “이번 난리가 끝나면 그분을 잠시 황실로 보내 주시겠습니까? 황태자께서 이 일에 관심이 많으시니 아마 기꺼이 만나려 하실 것입니다.”

    황태자가 상단의 활동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다.

    상업을 중시하여 국가를 풍요롭게 해야 한다는 이론도 사실은 예로부터 있었던 학설이니 말이다.

    “알았네. 아영 누이에게 말해 보겠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후후후.”

    박 공공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운현은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을씨년스럽던 군막이 어느새 부드러운 차향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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