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함락
군사 행동을 시작한 관군은 파죽지세로 성도를 탈환했다.
뿐만 아니라 성도에 산개되어 있던 삼천여 마병들마저 모두 토벌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미 운현의 충고로 마병에 대한 대비가 철저했던 데다가 당문과 아미파, 공동파 제자들의 협조를 기꺼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화포를 앞세운 관군들과 검기를 휘두르는 절정고수들 그리고 파사와 항마의 기운을 지닌 도인과 승려 들의 활약으로 성도의 마병들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토벌되어 갔다.
그리하여 군사 행동이 시작된 지 사흘 만에 성도에 더 이상 마병은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많은 사람이 죽고 거리는 불탔지만 마교의 군세를 성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천, 성도의 대저택.
임시 도지휘사사로 사용되는 저택에서는 사천의 지방 대관들이 모여 있었다.
도지휘사 등초범은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감사하오, 어사 대인. 어사 대인께서 계시지 아니하셨다면 이 등초범이 어찌 이렇듯 쉽게 성도를 회복할 수 있었겠소? 참으로 감사드리오.”
“아닙니다. 제가 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모두 여러분께서 충절을 보이신 덕분이지요.”
그 말에 포정사 왕안민과 안찰사 이윤걸은 헛기침을 했다.
운현이 그들에게도 공적을 돌릴 뜻을 분명히 한 셈이기 때문이다.
“크흠, 이번 성도 수복에 공을 세운 무림인들이 적지 않으니 그들에게도 포상을 함이 옳지 않겠소이까?”
안찰사 이윤걸이 도지휘사 등초범에게 은근히 말했다.
등초범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렇지 않아도 조정에 포상을 상신할 예정이외다. 하하하.”
성도 수복에 나선 절정고수들의 활약은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검기와 도기를 휘두르며 마인들을 베어 나가는 절정고수들의 무공은 이야기속의 전설적인 장군들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게다가 파사와 항마의 기운을 지닌 승려와 도인 들이 마병을 처치하는 모습은 관군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목을 베어도 죽지 않던 마병들이 승려와 도인 들의 일격에 무력화되어 버리니 말이다.
“물론 어사 대인의 공적을 아뢰는 것도 잊지 않겠소.”
도지휘사 등초범은 눈을 빛냈다.
그건 현 조정의 실세를 자처하는 자들과 척을 진다는 의미에 다름없었다.
포정사 왕안민과 안찰사 이윤걸의 표정이 굳는데 운현이 조용히 말했다.
“제 이야기는 하실 필요 없습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상을 받으려 한 일도 아니며,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허어.”
도지휘사 등초범은 감탄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참으로 의인이시오. 많은 이들이 왜 어사 대인을 크게 신뢰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소이다.”
본래 관인은 무림인을 믿지 않는다.
허나 상대인 운현은 황제로부터 관직을 수여받은 데다가 성도 수복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다.
등초범의 찬사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때, 포정사 왕안민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성도의 수복은 참으로 기쁜 일이오. 허나 다시 이곳을 재건하려니 앞날이 캄캄하오.”
도지휘사 등초범이야 큰 공을 세웠다지만 성도를 재건하는 건 행정을 주관하는 포정사의 몫이다.
마병들이 불을 지른 데다가 관군이 화포를 쏴 댔으니 거리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당장 지방 대관들의 관아도 불타 무너졌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포정사 왕안민의 안색이 어두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천의 세수는 풍족하지 못하오. 게다가 이번 일로 성도에 쌓아 두었던 물자가 모두 불타고 말았으니 성도를 재건하는 큰일을 감당할 여력이 없소이다. 혹시 어사 대인께 좋은 방책이 없겠소?”
운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중앙 조정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박 공공이 힘을 잃은 지금 그 요청이 과연 수락될 수 있을까?
오히려 ‘민란’을 막지 못했다며 문책을 받을지도 모른다.
포정사 왕안민의 걱정도 바로 그 점이었다.
“……실은 제가 상단 쪽에 조금 인연이 있었습니다.”
찻잔을 매만지던 운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매사에 돈 거래가 빠질 수 없는 상단이다 보니 흥미로운 관행을 가지고 있더군요. 예를 들어 현재 돈이 없더라도 지급을 보증받고 물건을 넘겨준다던가, 신용이 있는 상단의 보증서는 아예 은자처럼 거래한다던가 말입니다.”
왕안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상단의 그런 관행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아닌가?
“그게 이것과 무슨 상관이…….”
“관아만큼 큰 신용이 있는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지급을 보증하신다면 상단들은 기꺼이 성도로 물자를 실어 올 것입니다.”
포정사와 안찰사, 도지휘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관인들에게 상인이란 돈을 좋아하고 이익을 탐하는 자들이었으며, 거리를 두고 엄히 대하거나 혹은 결탁하여 재물을 쌓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방 대관이 지급을 보증해야 한다니, 그들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음, 허나 보증은…….”
안찰사 이윤걸이 주저하며 무언가 말하려 할 때였다.
“여러분 개인이 보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사천의 포정사사와 안찰사사, 도지휘사사의 직인이 찍힌 보증서입니다. 여러분 개인이 아니라 사천의 지방 관청이 하는 보증이지요.”
“허나 결국은 기한 내에 갚아야 하는 것 아니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운현은 안찰사의 물음에 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요청하면 언제든 대금을 지급하겠다는 조건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상단들은 이 보증서를 가능한 오래 쥐고 있으려 할 것입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좋아할지도 모르지요.”
사천 전체를 관할하는 지방 관청의 직인이 찍힌 보증서를 상단들이 마다할 리가 없었다.
특히 사천과 연관이 있는 상단들이라면 오히려 돈보다 이 보증서로 거래하는 것을 더 선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정사 왕안민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어사 대인의 말씀은 알겠소만 상단을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오. 그들은 무척이나 교활한 데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으니…….”
“그러시다면 적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현재 호암상단에 있는 일아영 총감찰입니다. 상단의 일을 감시하고 부정을 적발하는 직책이라 누구보다 상단의 일에 환하지요. 제가 존경하는 의형의 딸이기도 하니 믿고 맡길 만합니다.”
포정사와 안찰사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호암상단이라면 천하에서 손꼽히는 거대 상단이다.
그런 상단의 총감찰이라면 확실히 적임자가 아닐 수 없었다.
운현은 찻잔을 들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비록 의형께서는 이미 작고하셨지만, 박 공공께서도 익히 잘 알고 계시고요.”
“오오.”
포정사 왕안민의 얼굴이 환해졌다.
특별 감찰어사인 운현의 의형인 데다가 박 공공까지 알고 있는 사람의 딸이라면 더 이상 의심하는 게 오히려 무례할 정도였다.
“고맙소. 이 왕안민이 꼭 좀 부탁드리겠소, 어사 대인.”
왕안민은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하기까지 했다.
“알겠습니다. 사천의 백성을 위한 일이니 기꺼이 그리하지요.”
운현 역시 손을 모아 그에게 답례했다.
포정사 왕안민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어사 대인께서는 참으로 사천의 홍복이시오. 대인이 아니 계셨더라면 이 사천이 어찌 되었겠소? 감사하오, 참으로 감사하오.”
짐짓 과장스러운 찬사였지만 반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운현은 미소를 머금으며 찻잔을 쥐었다.
지방 대관들은 기뻐하고 있었지만 이번 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피어오르는 부드러운 차향에도 불구하고 운현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바로 그때였다.
덜컹.
문이 열리며 관리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는 포정사를 보좌하는 상급 관리 중 한 사람이었다.
포정사 왕안민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내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단단히…….”
“크, 큰일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관리가 말했다.
그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난주가……. 난주가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쿵.
충격이 운현과 지방 대관들을 휩쓸었다.
“뭐라고?”
“무슨 소리냐! 뭔가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니냐?”
안찰사 이윤걸과 도지휘사 등초범이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상급 관리는 부들부들 떨며 답했다.
“아닙니다. 사흘 전 난주가 함락되었고 제독 총병관은 난주를 탈출하여 서안 방면에 진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사천으로 향하는 피난민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안 방면을 관군이 막았다면 피난민들은 남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신경이 곤두서 있는 관군이 피난민을 통과시켜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민란 추종자로 의심을 받아 해를 입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당장 대책을 세워야겠소.”
포정사 왕안민이 말했다.
안찰사 이윤걸과 도지휘사 등초범의 표정도 굳었다.
성도가 불탄 와중에 피난민까지 몰려오다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 아닐 수 없었다.
***
북경, 황궁.
노년의 황제는 높다란 용상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과 가느다란 손은 그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천하의 온갖 좋은 영약으로도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 없었던 탓이다.
그의 앞에 도열한 신하들은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도 이미 난주가 함락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황제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제독 총병관 유붕걸을 파직하고 당장 북경으로 압송하여 문초하라.”
“폐하!”
예부 상서 장위가 말했다.
“난주의 함락은 통탄할 일이오나 이는 제독 총병관의 잘못이 아닙니다. 공동파라 하는 간악한 도사들이 민란의 추종자들과 내통하여 성문을 연 까닭이니, 마땅히 저들을 처벌하셔야 하옵니다.”
제독 총병관 유붕걸은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공동파의 도인들이 난주의 민심을 어지럽히고 유지들과 결탁하여 사사건건 유붕걸을 방해하였으며, 결국에는 민란 추종자들에게 난주의 성문을 열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예로부터 전쟁 중에 장수를 바꾸는 것은 병가의 금기이니, 오히려 제독 총병관에게 더욱 큰 권한과 지원을 내려 난주를 탈환케 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예부 상서 장위의 목소리는 사뭇 절절했다.
그야말로 충의로 가득한 신하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슥.
황제가 눈을 떴다.
늙고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통이라 하였더냐?”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황제가 말했다.
예조 상서 장위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도가의 이름을 뒤집어쓴 그 간악한 무리들은…….”
“허면 그 공동파의 도인들이 어째서 성도를 수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단 말이냐?”
장위의 말을 끊으며 황제가 말했다.
사천의 도지휘사 등초범이 올린 장계 역시 이미 중앙 조정에 도착해 있었다.
예조 상서 장위는 움찔했다.
허나 곧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본디 승려나 도인은 간교한 자들이라 능히 사람을 속이옵니다. 사천의 도지휘사에게 도움을 주었다 하나 반드시 내막이 있을 것이니…….”
“이것은.”
스륵.
황제는 가는 손으로 두루마리 하나를 들었다.
“난주 함락에 관한 우군도독부 양천만 장군의 장계다. 여기에 무어라 적혀 있는지 아는가?”
양천만 장군은 난주로 출정한 토벌군의 한 사람이었다.
장위는 급히 입을 열었다.
“폐하! 양천만은 본래 감숙의 이민족으로서 그 출신이 천하고……!”
“제독 총병관 유붕걸은 초전에 대패한 이후 연일 연회를 벌여 술과 여자를 탐하고 유지들의 재산을 약탈하였으며 심지어 사천으로 향하는 적의 군세를 그대로 방치하였다.”
예부 상서 장위를 노려보며 황제는 말했다.
“지금 이런 자를 예부 상서가 두둔하고 있는 것인가? 무지한 농민이라 치부하던 적들에게 감숙의 요충지인 난주를 빼앗긴 무능한 자를?”
황제의 눈동자는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폐, 폐하. 그런 것이 아니옵고…….”
파라락.
두루마리가 허공을 날았다.
황제가 장위의 앞으로 양천만 장군의 장계를 던진 것이다.
“눈이 있으면 보라. 소위 말하는 ‘민란’의 추종자들에게 죽어 간 관군의 숫자를 말이다. 만일 이 숫자가 거짓임을 내게 보인다면, 내 기꺼이 예부 상서의 말대로 행하겠다.”
장위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말은 곧 죽은 관군을 살려 내라는 말과 같았다.
황제의 분노를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이제 없는 것이다.
슥.
노년의 황제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박 공공을 들라 하라.”
대신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조정의 일을 대신들 대신 환관과 논의하겠다는 건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무어라 말하려 고개를 들던 대신들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시선과 맞닥뜨렸다.
그것은 지극히 차갑고 무자비한, 천하를 손에 쥔 절대자의 눈빛이었다.
탁탁탁.
황제를 모시는 내관이 지엄한 뜻을 전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그러나 입을 여는 대신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