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매화검
갑자기 나타난 영호준의 모습에 상급 마병의 표정이 굳었다.
조금 전 마병들을 쓰러뜨린 수법은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다.
항마와 파사의 기운이 없다면 마병들이 이토록 간단히 무력화될 리가 없었다.
벌써 새카맣게 굳어 가는 마병들의 잔해를 슬쩍 살피며 상급 마병이 물었다.
“너는…….”
“내가 왜 당신의 여자죠?”
당설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마병의 말을 끊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당설련은 말했다.
“할아버지는 어디 계셔요?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내가 온 것이 그리도 못마땅하다면 이대로 떠나 드릴 수도 있소만.”
영호준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설련의 눈썹이 와락 일그러졌다.
“마음대로 하세요.”
스릉.
검을 뽑으며 당설련은 말했다.
“나 또한 용봉으로 꼽혔던 후기지수예요. 이따위 괴물한테 쉽게 당해 줄 생각은 없어요.”
그녀의 눈빛은 단호했다.
상급 마병의 표정이 굳는데 영호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내가 말로 연 매를 이길 리가 없지.”
중얼거리던 영호준은 당설련에게 말했다.
“떠나겠다는 말은 철회하겠소. 그러니 부디 내게 연 매를 도울 기회를 허락해 주겠소?”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엔 자신도 모르게 발끈했지만 지금은 이런 실랑이를 할 때가 아니다.
“……부탁해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영호준은 똑똑히 들었다.
영호준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 얼굴 가득 웃음이 피어났다.
“하하하. 여기 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소. 연 매의 그런 표정을 볼 수 있다니 말이오.”
환하게 웃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하지만 당설련의 찌푸린 눈살은 펴지지 않았다.
“연 매라고 부르지 말랬잖아요. 난 당신을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사뭇 날카로운 어조였지만 영호준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 그럼 평생 날 생각해 주는 거요?”
당설련이 움찔했다.
영호준은 멋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감동이군. 연 매가 평생 날 잊지 않겠다니 이 어찌…….”
“크흐흐.”
음침한 웃음소리가 영호준의 말을 끊었다.
상급 마병은 분노로 눈을 이글거리며 말했다.
“지금 너희가 감히 내 앞에서 애정 놀음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뭐라고?”
“그건 아니지.”
당설련과 영호준의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영호준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놀음이라니? 떠나간 연인을 돌아서게 하고자 목숨을 걸고 꼬시는 게 안 보이나?”
그의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엄숙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급 마병의 조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큭큭큭. 연인이라? 좋다. 내 특별히 너희의 피를 함께 마셔 주마. 죽어서도 같이하도록 말이다.”
후우우욱.
시커먼 기운이 상급 마병을 감싸고 피어올랐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광경이었지만 당설련과 영호준의 반응은 남달랐다.
“같이할 생각 없어.”
“죽다니,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 그러면 안 되지.”
휘릭.
영호준은 허공에 검을 휘두르며 자세를 취했다.
그것은 바로 화산의 절기인 매화검법의 기수식이었다.
“죽음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은 바로 너다. 마병(魔兵).”
영호준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풍류라도 즐기러 나온 듯 여유로웠다.
상급 마병은 이를 갈며 자신의 창을 움켜쥐었다.
뭉클.
그의 전신을 뒤덮은 새카만 기운이 창대를 따라 번져 가더니 창날 끝에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영호준의 검 역시 은은한 검명을 흘렸다.
우우웅.
순간 때아닌 매화의 향기가 퍼져 나갔다.
본래 사천이 매화의 본고장이라지만 이 향은 평범한 꽃향기가 아니었다.
매화검법의 경지가 극성에 이르러야 가능하다는 현상이 지금 영호준의 검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놈. 역시 화산의 찌꺼기였구나.”
상급 마병은 영호준의 무공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마를 꿰뚫린 마병들이 무력화된 건 바로 도가 심법 특유의 기운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파사의 기운을 두른 영호준의 검 앞에서도 상급 마병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휘릭.
상급 마병은 창끝으로 영호준을 겨누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슥.
상급 마병의 창끝이 살짝 아래로 향했다 싶은 순간.
후욱.
상급 마병은 엄청난 기세로 영호준을 향해 짓쳐 들었다.
당설련마저 깜짝 놀랄 정도의 빠르기였다.
새카만 창끝은 어느새 무시무시한 기운을 담고 영호준의 목을 향해 솟구치고 있었다.
하지만 영호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파라락.
영호준이 검을 떨쳤다.
그러자 무수한 검영(劍影)이 마치 매화꽃처럼 허공에 피어올랐다.
바로 화산의 자랑인 매화검법이었다.
카가가강.
날카로운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상급 마병의 섬뜩한 창날은 쉴 새 없이 영호준을 향해 짓쳐 들었지만 영호준의 검은 현란한 궤적을 그리며 모든 공세를 막아 내고 있었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실수가 목숨을 앗아 갈 수도 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묘기이자 생명을 담보로 한 예술이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 광경에 당설련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콰앙.
폭음이 터져 나오고 두 사람이 뒤로 물러났다.
타닥.
영호준과 상급 마병은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거리를 벌린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했다.
“크흐흐흐.”
상급 마병이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놀랍구나. 이 시대에 아직도 너 같은 무인이 있다니.”
창으로 영호준을 겨눈 상급 마병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쉬릭.
영호준은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한 손을 허리 뒤로 돌렸다.
“고맙지만 별로 즐겁지는 않군. 남자에게 그런 말을 들어 봤자……. 아, 너는 사람도 아니던가?”
사뭇 여유로운 표정으로 영호준은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 취향은 날카로운 가시를 지닌 매력적인 아가씨라서.”
“흐흐흐.”
상급 마병은 웃음을 흘렸다.
“좋군. 하지만 허세도 여기까지다.”
우우우웅.
상급 마병의 창끝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영호준의 눈빛이 변하고 당설련의 표정도 굳었다.
그것은 마치 검기와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상급 마병의 창끝에 어린 기운은 바로 마기(魔氣)였다.
무수한 생명을 죽이며 축적한 마기가 마치 검기처럼 창끝에 응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약속한 대로.”
상급 마병은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너희 둘의 피를 함께 마셔 주마.”
후욱.
새카만 마기가 일렁이는 창끝이 영호준을 향해 짓쳐 들었다.
영호준은 즉시 검을 떨쳐 냈다.
‘아!’
당설련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상급 마병의 마기가 무인의 검기와 비슷하다면 영호준의 검으로는 당해 낼 수가 없다.
쉬리릭.
영호준의 검 끝은 뱀처럼 유연하게 마병의 창날을 휘감고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창대를 향해 짓쳐 들었다.
처음부터 창날이 아닌 창대를 노린 것이다.
카앙.
쇳소리와 함께 창의 궤적이 튀었다.
영호준의 검은 창대를 자르지 못했다.
마기는 창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충격의 순간 전해진 엄청난 반탄력은 영호준의 자세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윽!”
영호준은 휘청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상급 마병의 창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손을 뻗기만 하면 새카만 창날이 영호준의 목숨을 거둘 참이었다.
“죽어라!”
상급 마병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바로 그때였다.
“안 돼!”
쉬익.
날카로운 칼날이 상급 마병의 뒤쪽에서 날아들었다.
비록 검기는 아니었지만 내력이 담긴 그 검격을 상급 마병은 무시할 수 없었다.
“흥!”
부웅.
상급 마병은 크게 창을 휘둘렀다.
그 모습을 당설련은 똑똑히 보았다.
‘아.’
마기가 응축된 창날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당설련이 검을 뻗었지만 상급 마병의 새카만 창날은 내력이 담긴 그녀의 검을 간단히 박살 내 버렸다.
콰작.
부서진 검의 잔해가 허공에 비산하고 마병의 무자비한 창날이 당설련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리고 당설련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영호준의 검이 푸른빛을 일렁이며 상급 마병의 가슴을 베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검기였다.
서걱.
퍼억.
두 가지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상급 마병이 둘로 갈라지는 소리와 마기를 잃은 창이 당설련의 허리를 치는 소리였다.
털썩.
당설련이 땅에 떨어졌다.
영호준은 무너지는 상급 마병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즉시 당설련에게로 날아왔다.
“연 매!”
그는 쓰러진 당설련을 안아 들었다.
다행히 당설련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창이 그녀를 치기 전에 마기가 사라진 데다가, 안에 가벼운 갑옷을 받쳐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영호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당설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연 매, 괜찮소?”
당설련은 얼굴을 찌푸렸다.
“소리치지 마요. 귀가 울리니까.”
영호준은 헛웃음을 흘렸다.
특유의 차가운 말투가 여전한 것을 보니 심각한 부상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내력을 담은 검이 부서진 건 결코 작은 충격이 아니다.
당설련은 고통으로 인상을 쓰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 검기…….”
“아.”
영호준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건…….”
“신승이 가르쳐 줬나요?”
움찔하고 영호준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었소?”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영호준은 신승의 안배 중 한 사람이었다.
운현이 소림의 와불 선사에게 겪었던 일을 이미 한참 전에 경험한, 말하자면 운현의 선배였던 것이다.
“그럼 연 매가 날 떠난 건…….”
“그래요.”
당설련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가문을 등질 각오를 하고 당신을 택했는데, 당신은 나를 버리고 신승을 선택했으니까.”
그날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듯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영호준은 슬픈 표정으로 당설련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았소. 연 매. 다만 대의를 위해 잠시…….”
“마찬가지예요.”
“다르오. 아니, 마찬가지라 해도 이제는 아무 상관도 없지 않소?”
그의 말대로였다.
이제는 신승도, 무림맹도, 당설련을 옭아매던 예전의 당문도 없다.
영호준은 조용히 말했다.
“나는 여전히 연 매를 사랑하오. 당신이 나를 평생 용서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오.”
“하!”
당설련은 조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 조소는 어딘지 허탈했다.
“날 사랑한다고요?”
영호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설련이 물었다.
“왜요? 나는 당신을 아프게 할 뿐인데.”
“이미 말했지 않소?”
당설련을 바라보며 영호준이 말했다.
“당신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매혹적이오. 단숨에 내 영혼을 사로잡아 버릴 만큼. 당신이 아무리 나를 아프게 한다 해도 나는 언제나 당신의 영호준이오.”
영호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당설련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사람은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기 마련이니까.”
사락.
하얀 당설련의 손이 영호준의 얼굴을 매만졌다.
“……하지만, 어차피 상관없어요. 당신 말처럼요.”
슥.
당설련은 영호준을 잡아당기며 눈을 감았다.
영호준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두 사람의 입술은 조용히 맞닿았다.
“하아.”
당설련이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눈을 뜬 그녀는 영호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늙고 추해지기 전에 죽어 버릴 거예요. 당신에게는 영원히 아름다운 여인으로 남고 싶으니까요.”
“부디 그러지 마시오.”
영호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당신은 언제나 아름답소. 나이 든 당신이 얼마나 우아하고 매력적일지, 생각만 해도 벌써 가슴이 뛰고 있다오.”
“거짓말.”
하지만 당설련은 웃고 있었다.
그녀는 두 팔로 영호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영호준도 당설련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타닥, 타닥.
어느새 마병들이 지른 불은 당문 이곳저곳을 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쿠웅, 쿵.
멀리서 화포 소리가 들려왔다.
관군이 성도를 탈환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당문을 태우는 불길과 은은히 울려 퍼지는 폭음 속에서, 두 연인은 오랫동안 잊었던 입술의 온기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
파라락.
옷깃을 펄럭이며 객옹이 지붕에서 날아내렸다.
운현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르신! 그쪽은…….”
“저쪽은 이제 괜찮다.”
객옹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호준이 깜짝 놀랄 만한 경공을 펼치며 홀로 앞서갔을 때는 얼마나 걱정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위험한 일은 없는 듯했다.
화륵.
건물 사이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마병들이 당문에 불을 놓은 것이다.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불에 타고 있었지만 싸움의 와중이라 불을 끌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안타깝군요. 당문이…….”
“상관없다.”
객옹은 조용히 말했다.
“사람만 있다면 이런 것들 따위는 얼마든지 다시 세울 수 있다.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바로 당문이니까.”
그의 대답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운현은 살짝 놀랐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사람이 당문이니까요.”
타닥, 타닥.
고풍스러운 전각이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그러나 객옹의 표정에는 오히려 희미한 미소마저 어리고 있었다.
쿵, 쿠웅.
성문 쪽에서 관군의 화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성도의 탈환은 시간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