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화. 불타는 성도
운현 일행의 마차는 성도를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노련한 마부들은 험한 길에서도 능숙하게 마차를 몰았고, 말이 지치지 않도록 자주 말을 교체했다.
따각, 따각.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영호준이 운현에게 말했다.
“도지휘사의 대처가 비범하군요.”
설영대의 서찰을 살피며 영호준은 말을 이었다.
“북문이 뚫린 사실을 알자 즉시 성도의 방위를 포기하고 모든 관군을 남쪽 소도시로 집결시켰습니다. 성도처럼 큰 도시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은데, 실전 경험이 제법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객옹은 달랐다.
“성도를 포기한 것이 옳다는 뜻이냐?”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영호준은 조용히 답했다.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예기치 못한 습격을 받았을 때는 즉시 이탈하여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성도는 다시 탈환할 수 있지만 지휘체계가 무너지면 군 전체가 괴멸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객옹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유능한 자라면 애초에 성문이 뚫리지 않게 해야 하지 않느냐?”
“옳은 말씀입니다.”
영호준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허나 조직에서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많지요. 이 서찰에 따르면 성 밖으로 출진했던 관병을 지휘한 사람은 도지휘사가 아니라 포정사사에 속한 상급 무관인 듯합니다. 적을 평범한 농민들이라 여기고 어리석게도 공을 탐했겠지요.”
그의 추론은 정확했다.
편법으로 조직된 오천 명의 관병을 이끈 사람은 포정사사의 상급 무관이었다.
도지휘사가 직접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포정사사의 상급 무관은 이것을 평생에 다시없을 기회라 여겼다.
결국 도지휘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전투에 나섰다가 대패하였고, 심지어 무질서한 패주로 마교의 군세가 성도에 들어오게 하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른 것이다.
“허면 성도는 이미 마교의 손에 떨어진 것이냐?”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영호준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성도는 매우 큰 도시입니다. 마교의 군세가 삼천에 이른다지만 성도를 장악하기엔 역부족이지요. 저들도 성도를 차지할 생각은 없을 것이고, 아마도 파괴 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을 것이라 봅니다.”
객옹의 표정이 굳었다.
삼천의 군세로 관군에 맞서 대도시 성도를 차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저들은 성도를 불태우고 사천 전역에 혼란을 일으키려 할 것이다.
객옹에게는 더욱 좋지 않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따가닥, 따가닥.
마차는 위험할 정도로 거칠게 관도를 내달렸다.
그러나 운현과 객옹, 영호준이 탄 마차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
사천의 대도시 성도는 단 며칠 만에 처참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북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마교의 군세는 곧바로 지방 대관들의 관아로 향했다.
포정사사와 안찰사사, 도지휘사사가 그들의 목표였다.
사천의 지방 행정과 사법, 군정을 관할하는 관아는 불에 탔고 수많은 문서들이 사라졌다.
목숨을 잃은 관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도지휘사 등초범의 발 빠른 지휘로 인명 피해는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그는 과감히 성도를 포기하고 남쪽 소도시에 재집결을 명한 것이다.
관인과 관군, 관병 들은 즉시 성도를 탈출했다.
포정사와 안찰사도 무사히 성도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백성들의 피해는 그때부터였다.
흩어진 마교의 군세가 번화한 거리와 상단들을 습격하여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성도는 단번에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비록 삼천에 불과한 마병들이지만 그들을 막을 관군은 이미 없었다.
마병들은 거리낌 없이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다.
백성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당해야 했고, 심지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뒤늦게 사람들이 피난을 시작했지만 마병들은 무자비했다.
대도시 성도가 완전히 폐허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만일 당문과 아미파, 그리고 공동파의 제자들이 없었다면 말이다.
콰르릉.
불타오르던 삼층 전각이 힘없이 무너졌다.
성도의 번화가를 화려하게 빛내던 전각이었지만 이제는 그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꺄악!”
피난하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마병들은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베어 갔다.
쉬익.
“컥!”
허둥지둥 도망가던 남자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선혈이 흥건히 땅에 흐르고, 그를 벤 마병은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새카맣게 물든 눈이 불빛에 번득였다.
마병은 완전히 이지를 상실한 채 파괴적인 본능에 휩싸여 있었다.
언어는 물론이고 제대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부수고자 하는 충동만이 맹렬하게 그를 집어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크아아아아아!”
마병은 희열에 가득 차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바로 그때였다.
쉬익.
날카로운 청강검이 마병을 향해 짓쳐 들었다.
마병은 즉시 도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청강검은 멈추지 않았다.
서걱.
청강검은 마병의 도와 목을 단번에 가르고 지나갔다.
그 검에 서린 희미한 기운은 분명 검기였다.
“주의하시오. 공자!”
뒤에서 한 도사가 외쳤다.
목이 잘린 마병이 두 팔을 뻗으며 덮쳐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강검의 주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하아!”
낭랑한 기합 소리와 함께 청강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목 없는 마병의 몸통이 비스듬히 둘로 나뉘었다.
털썩.
갈라진 마병의 몸은 땅에 나뒹굴었다.
그 사체는 곧 새카맣게 변해 부서져 내릴 것이다.
이제껏 그러했듯이 말이다.
“당 공자, 괜찮소?”
서너 명의 도사와 여관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들은 바로 공동파의 도인들이었다.
방금 마병을 베어 버린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른 분들은…….”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서너 명의 진을 이룬 도사들과 당문, 아미파의 제자들은 이곳저곳에서 마병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공자님의 무위는 언제 봐도 대단하군요. 혼자서 마병을 베어 버리시다니요.”
여관 하나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공동파의 송문고검이 빛나고 있었다.
“그저 부족할 뿐입니다.”
공자님이라 불린 청년이 겸손하게 말했다.
그는 당설련의 남동생이자 문주 당천벽의 아들인 당혁이었다.
과거 태평맹 무림용봉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그는, 당시 전권 대리인으로 참관 중이던 운현에게 비무를 신청했다가 은젓가락 하나에 굴욕을 맛보았다.
이후 당설련의 명에 따라 태평맹의 아미파 공략에 나섰고, 홀로 태평맹을 막아선 운현의 무위에 충격을 받아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그 당혁이 지금 검기를 사용하여 마병을 베어 버린 것이다.
“자, 어서 다른 백성들을 돕지요.”
당혁이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당문의 신진 고수답게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공동파 도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검을 쥐고 마병을 향해 함께 덤벼들었다.
한때 화려하게 흥청이던 성도의 번화가가 지금은 불길과 싸움의 소리로 가득했다.
***
사천성 성도, 당문.
당문은 한밤에도 대낮처럼 환했다.
총괄 군사인 당설련은 대청마루에 임시 집무실을 설치하고 당문과 아미, 공동파의 제자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총괄군사님. 당 공자님께서 마병들을 물리치셨다고 합니다.”
수하가 예를 표하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사뭇 상기되어 있었다.
당설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즉시 물러나라고 해.”
수하는 다시 예를 표하고 물러갔다.
당설련은 서탁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좋아. 그러면 이곳은 됐어.”
그녀 앞에는 성도 전역을 자세히 표시한 지도가 놓여 있었다.
관에서도 갖기 힘든 세밀한 지도였지만 이곳저곳에 새카맣게 먹칠이 되어 있었다.
마교의 군세에 완전히 넘어간 지역이었다.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도를 노려보았다.
‘……이대로는 오래 버티기 힘들겠네.’
관군은 이미 성도를 버리고 떠났지만 당문은, 아니 당설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도 절대 당문이 불타게 둘 수는 없어.’
헛된 명예나 의협심 따위는 상관없었다.
무고한 백성을 구하고 피난민을 돕는 것도 부차적인 일에 불과했다.
당문은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된다.
절대적인 두려움과 공포의 대명사가 되는 것.
오직 그것만이 강호 무림에서 당문이 생존해 온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득.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사중간이니, 독문이니 하며 당문을 비웃는 자들이다.
고작 마교의 군세에서 떨어져 나온 무리에 의해 당문이 불탄다면 그들이 어찌 나올지는 뻔했다.
슥.
당설련은 성도를 표시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당문의 위치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유독 표기가 많았다.
지난 닷새간 당문과 아미, 공동의 제자들이 지켜 낸 지역이었다.
공동파 도인들의 조언에 따라 서너 명이 진을 이루어 마병을 상대했고, 아미와 공동의 검법에 항마와 파사의 기운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마병과 싸울 때는 절대 무리하지 않았으며 마교에 장악된 지역을 되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성도에 들이닥친 마병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산발적으로 파괴 행위를 이어 갔다.
덕분에 당문과 아미, 공동파의 사백오십여 제자들은 지금까지 이 지역을 지켜 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끊이지 않는 피난 행렬을 도우며 말이다.
‘문제는 시간인데…….’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였다.
무엇보다 제자들의 피로가 위험할 정도로 쌓여 가고 있었다.
게다가 마교의 군세가 조직적으로 당문을 노린다면 현재의 전력으로는 중과부적이다.
‘대체 관군은 언제 오는 거야?’
지방 대관들이 대도시 성도를 포기할 리는 없다.
당설련은 관군이 곧 성도를 다시 탈환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후우.”
당설련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는 아차 싶었다.
혹 사기에 영향을 줄까 염려하여 한마디 말조차도 삼가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때였다.
‘응?’
당설련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정문이 있는 남쪽 방향에서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설마!’
당설련이 불안한 마음에 눈을 찌푸렸을 때였다.
“총괄군사님!”
수하가 급히 달려오며 말했다.
“적입니다! 마병들이 지금 정문으로……. 커억!”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섬뜩한 창날이 가슴을 꿰뚫고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크흐흐흐.”
비릿한 웃음소리와 함께 마병 하나가 모습을 나타냈다.
온몸을 감싸는 검은 기운은 그가 평범한 마병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었다.
털썩.
쓰러진 수하의 몸에서 창날을 뽑으며 상급 마병이 말했다.
“내 수하들을 죽이던 것들의 수뇌가 바로 너냐?”
쇠를 긁는 것 같은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설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릉.
그녀의 좌우에 있던 호위들이 검을 뽑았다.
“타하!”
쉬익.
기합 소리와 함께 다섯 자루의 칼이 상급 마병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러나 상급 마병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웅.
그의 새카만 창이 가볍게 원을 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흑색의 창은 엄청난 기세와 함께 호위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카앙, 캉.
“커억.”
“크윽.”
호위들은 채 몇 합을 버티지 못했다.
상급 마병의 창이 허공을 수차례 가른 후, 두 발로 서 있는 호위는 더 이상 없었다.
쿵.
창을 땅에 세우며 상급 마병은 당설련을 바라보았다.
“이게 전부냐?”
그는 분명 비웃고 있었다.
그 뒤로 다른 마병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싸움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저들이 작정하고 당문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가장 안전하다 여기던 남쪽 정문을 통해 쳐들어온 것부터가 말이다.
“크크크.”
당설련의 굳은 표정을 보며 상급 마병은 조소를 흘렸다.
“네가 내 마병들을 죽였으니, 너의 피로 내 목을 적셔야겠구나.”
당설련은 빙긋 웃었다.
불빛에 일렁이는 붉은 입술은 요염하기까지 했다.
“그래요? 하지만 내 피는 극독일 텐데요? 당신 같은 괴물들에게는 더더욱.”
날카로운 살기를 뿜으며 당설련이 말했다.
그녀의 하얀 손은 이미 자신의 검에 가 닿아 있었다.
그러나 상급 마병은 오히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래. 바로 그 눈빛이다. 너 같은 것들의 눈이 절망으로 물드는 것이야말로…….”
그때였다.
피피빅.
낮은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상급 마병은 즉시 창을 휘둘렀다.
카앙.
충격음과 함께 무엇인가가 튕겨 나갔다.
하지만 다른 마병들은 그리하지 못했다.
털썩, 털썩.
마병들은 이마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졌다.
목이 잘려도 덤비던 그들이 맥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누구냐!”
상급 마병이 이를 갈며 말했다.
하지만 당설련의 표정은 환해졌다
“할아…….”
“분위기를 깨서 미안하지만.”
낭랑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당설련이 바라던 객옹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저벅, 저벅.
풍류 귀공자처럼 잘생긴 남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한 손에 검을 든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상급 마병에게 말했다.
“그녀는 내 여자일세.”
그림처럼 멋진 미소를 짓는 미남자는 바로 화산의 매화검이자 항주의 풍류 귀공자이며 창룡맹의 총군사, 영호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