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496화 (496/530)

496화. 패주(敗走)

사천성, 성도.

행정을 관할하는 포정사와 형법을 주관하는 안찰사, 그리고 군정을 책임지는 도지휘사가 한자리에 모였다.

사천의 최고 관료라 할 수 있는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성도를 향해 내려오고 있는 삼천여 명의 ‘민란 추종자’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크흠. 그래서, 유 제독에게선 아직도 회신이 없소?”

포정사 왕안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도지휘사 등초범은 불쾌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주에 있는 제독 총병관 유붕걸에게서 답이 오지 않은 것이다.

“으음.”

안찰사 이윤걸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제독 총병관의 명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소?”

도지휘사 등초범이 사천의 군정을 책임진다지만 함부로 군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제독 총병관 유붕걸의 명이 없으면 만일의 경우 등초범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백성들의 혼란이 점점 심해지고 있소이다.”

포정사 왕안민은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게다가 당문까지 마교의 군세라는 헛소리를 공공연히 떠들고 있지 않소?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사천은 큰 혼란에 빠지고 말 거요.”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민란 추종자’들이 마을을 전멸시켰다는 소문이 성도에 횡행했고, 당문은 그들이 마교의 군세라 말하고 있었다.

“……당문의 주장을 마냥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없지 않소?”

안찰사 이윤걸이 말했다.

포정사 왕안민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소리요?”

“모른 척하지 마시오. 포정사께서도 이미 특별 감찰어사의 서신을 받지 않았소?”

이윤걸은 도지휘사 등초범을 돌아보았다.

“도지휘사께서도 마찬가지일 터이고 말이오.”

등초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포정사 왕안민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있자는 것이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방법은 있소.”

문득 도지휘사 등초범이 입을 열었다.

포정사 왕안민과 안찰사 이윤걸의 눈이 빛났다.

등초범은 말을 이었다.

“난주에서 정체불명의 군세가 내려온 것이 아니라, 지역 내 일부 거민의 소요라면 포정사와 안찰사의 관병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오.”

포정사 왕안민은 눈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안찰사 이윤걸은 도지휘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즉, 정식으로 군을 움직인 것이 아니다. 이 말이오?”

“그렇소.”

도지휘사 등초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을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오. 관련된 법령과 규정도 대단히 복잡하고, 극히 예외적인 경우 외에는 극형으로 다스려지는 중죄요.”

중앙 조정이 무엇보다 경계하는 것은 군권을 누가 장악하느냐다.

아무리 지방 대관의 자치를 보장한다 해도 군권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허나 이 방법이라면 상관없소. 이건 일부 거민의 소요를 잠재우기 위해 관병을 동원한 것뿐이니까.”

안찰사 이윤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방법이라면 군을 함부로 움직였다고 추궁당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포정사사와 안찰사사의 관병만을 동원해야 할 터인데, 과연 저들을 막을 수 있겠소?”

안찰사 이윤걸이 물었다.

도지휘사 등초범은 묵직한 어조로 답했다.

“도지휘사사 소속의 일부 관군을 임시로 포정사사와 안찰사사에 배정하겠소. 그 정도의 권한은 있으니까.”

“얼마나 가능하오?”

포정사 왕안민이 물었다.

도지휘사 등초범이 담담하게 말했다.

“당장 동원 가능한 병력만 보자면 이곳 포정사사와 안찰사사의 관병을 합하여 삼천, 아니 오천까지 가능할 것이오.”

왕안민의 표정이 밝아졌다.

알려진 적의 규모가 대략 삼천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관병 오천은 압도적이라 할 만한 전력이다.

상대가 농민들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안찰사 이윤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만일 적이 소문처럼 마교의 군세라면?”

적이 마교의 군세라 경고한 곳은 당문만이 아니다.

특별 감찰어사 운현의 서찰은 그들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는 적과 교전하지 말고 즉시 성도로 돌아오라 하시오.”

도지휘사 등초범이 말했다.

“적이 성도를 공격하면 나는 법령에 따라 자동적으로 군의 통제권을 갖게 되오. 그렇게 되면 책임 문제를 신경 쓸 필요도 없소.”

성도가 공격받는 건 아까 말한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했다.

도지휘사 등초범의 지휘 아래 정식으로 관군이 나선다는 뜻이었다.

포정사 왕안민과 안찰사 이윤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리합시다.”

이의는 아무도 없었다.

왕안민과 이윤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도지휘사 등초범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성도가 공격받게 된다는 것은 문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부디 그리되지 않아야 하건만…….’

모순적인 이야기지만 군사력은 실제로 사용되지 않는 편이 제일 좋다.

도지휘사 등초범은 저들이 부디 평범한 ‘민란 추종자’이기를, 그래서 자신이 나설 기회가 없기를 진심으로 염원했다.

***

사천성, 당문.

총괄군사 당설련은 집무실에서 귀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아미파의 지심 사태와 혜령 사태였다.

“어서 오세요. 당문을 찾아 주셔서 감사드려요.”

당설련은 단아한 태도로 예를 표했다.

지심 사태와 혜령 사태는 불호를 외며 합장을 했다.

“이렇듯 다시 뵙게 되니 감회가 새롭소. 당 시주.”

담담한 목소리로 지심 사태가 말했다.

세 사람은 지난번 당문과 아미파의 갈등 당시 그 중심에 서 있었다.

당연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저도 그래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당설련이 말했다.

“지난번 아미에 행했던 무례를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사락.

당설련은 두 사태를 향해 다시 한번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렇듯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것에 대해, 당문을 대표하여 감사드리겠어요.”

그녀의 말은 사뭇 의미심장했다.

‘당문을 대표한다’는 말은 당설련의 사과와 감사가 당문 전체의 뜻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지심 사태와 혜령 사태의 눈빛도 변했다.

“……지금 그 말이 진심이시오?”

“네.”

당설련이 몸을 똑바로 세우며 말했다.

“이 일이 무사히 마치고 나면, 제가 직접 아미로 가서 사과와 감사의 뜻을 전하겠어요.”

지심 사태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 오만하고 무자비하던 당문이 이토록 순순히 고개를 숙이다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성도가 마교의 군세에 위협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당장 당문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앉으시지요.”

당설련은 두 사태에게 자리를 권했다.

지심 사태와 혜령 사태가 의자에 앉자 당설련이 손수 차를 대접했다.

또르륵.

부드러운 차향이 피어오르고, 세 사람은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성도 외곽의 장원에 계신 것으로 들었는데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요?”

열흘 전, 지심 사태와 혜령 사태는 백여 명의 아미파 제자들과 함께 성도에 도착했다.

그들은 지역 유지의 도움으로 외곽의 커다란 장원에 머물렀고, 열흘 만에야 당문을 찾아온 것이다.

“괜찮소. 그보다 공동파에서도 사람들이 왔다고 들었소.”

지심 사태의 말에 당설련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네. 공동파의 도인들께서는 훨씬 전에 오셔서 당문에 머물고 계셔요.”

공동파도 사천에 사람을 보냈다.

난주의 대처로 바쁜 와중에도 운현의 부탁에 따라 서른 명의 도사들을 당문으로 보낸 것이다.

후룩.

차를 음미하는 당설련을 지심 사태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하나 묻겠소만, 당문은 창룡맹에 가맹할 생각이시오?”

옆에 앉은 혜령 사태가 움찔했다.

그건 아미파 십이선사들 사이에서만 추측되던 말이었다.

당문이 옛 원한에도 불구하고 아미파에 도움을 요청하는 건 창룡맹 가맹을 위한 수순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태평맹의 맹주인 당문이 갑자기 창룡맹에 들다니, 너무나 파격적이라 대부분 믿지 못하던 추측이었다.

그 이야기를 지심 사태가 갑자기 꺼낸 것이다.

그러나 당설련의 대답은 혜령 사태를 더욱 놀라게 했다.

“네.”

당설련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당설련은 지심 사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럴 작정이에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심 사태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로서는 당문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으나…….”

지심 사태만이 아니었다.

아미파 십이선사들은 당문이 굳이 무리를 하면서 창룡맹에 가맹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당설련의 눈빛은 달랐다.

“시주께서 그리 작정하셨다면 그렇게 되겠구려.”

지심 사태를 바라보는 당설련의 눈빛은 단호했다.

당문은, 아니 당설련은 진심으로 창룡맹에 가맹하려는 것이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해요.”

당설련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마침 말이 난 김에…….”

그녀가 막 무어라 하려던 때였다.

“총괄군사님!”

덜컹.

갑자기 문이 열리고 수하가 들어왔다.

당설련은 눈살을 와락 찌푸렸지만 곧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민란을 진압하러 나갔던 관병이 대패하여 돌아왔습니다!”

당설련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수하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패주하는 관병의 뒤를 따라 마교의 군세가 성도로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이미 북쪽 성문이 뚫렸다고 합니다!”

당설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곧 이를 악물었다.

“당장 당문의 무사들을 전부 집합시켜. 일대제자와 이대제자 들 전부! 공동파의 도인들께도 상황을 알리고. 어서 가!”

“네!”

수하는 즉시 예를 표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당설련은 지심 사태와 혜령 사태를 돌아보았다.

“대화는 나중에 계속해야겠군요. 두 분께서도 제자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와 주시겠어요? 지금 북문으로 간다 해도 혼란스러울 뿐일 테니까요.”

“알았소.”

두 사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에 보겠소. 부디 보중하시오.”

당설련에게 합장을 해 보인 두 사태는 승복을 휘날리며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방 안을 채우는 부드러운 차의 향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운현 일행은 중경에서 배를 내려 마차로 갈아탔다.

일행이 탄 여러 대의 마차는 관도를 따라 성도를 향해 내달렸다.

그래도 깜깜한 밤에 마차를 달리기는 너무나 위험한지라 해가 지면 인근의 객잔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중경에서 성도까지는 상인들의 왕래가 잦아서, 운현 일행은 어렵지 않게 객잔에 머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난 운현 일행은 출발을 앞두고 가볍게 차를 나누고 있었다.

달칵.

“흐음, 역시 사천의 차는 훌륭하군.”

노부인 능세영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사천은 차의 본고장일세. 훌륭한 건 당연한 일이지.”

아미의 천수 신니가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사천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사천은 역사도 깊고 가 볼 만한 곳도 많다네. 제갈량의 무덤인 무후사나 장비의 친필이 새겨진 절벽도 있지.”

“호오. 그 제갈량 말인가?”

노부인 능세영이 흥미를 보였다.

천수 신니가 웃으며 무어라 하려던 때였다.

슥.

운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흰색 무복을 입은 설영대 무사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맹주님.”

설영대의 무사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무슨 일입니까?”

운현이 물었다.

무사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성도가 뚫렸습니다.”

쿵.

마치 커다란 돌이 떨어진 듯한 충격이 일행을 강타했다.

조용히 차를 마시던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무사를 향하고, 객옹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바스락.

설영대 무사는 품에서 얄팍한 서찰을 꺼내 운현에게 건넸다.

운현은 즉시 서찰을 폈다.

“……으음.”

나지막한 신음이 운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일행을 바라보았다.

“사흘 전 성도에 마교의 군세가 들이닥쳤습니다. 관군이 급히 대응하고 있으나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인 듯합니다. 지금 바로 출발해야겠습니다.”

덜컹, 덜컹.

일행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현은 설영대 무사에게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설영대 무사는 운현에게 예를 표한 후 모습을 감췄다.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객옹과 함께 객잔을 나섰다.

이곳에서 성도까지는 빨라도 사흘 길이다.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운현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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