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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94화 (494/530)

494화. 우회(迂廻)

폭음이 터지고 흙먼지가 휘날렸다.

섬뜩한 살기를 머금은 기운들이 바람을 찢고 흙과 나무가 사방에서 터져 나갔다.

그러나 당설련은 그 모든 광경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지만 당설련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의무였고, 문주 당천벽이 당설련에게 신경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그녀가 예상한 대로였다.

퍽.

“큭!”

청염군 당천벽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홍노의 변칙적인 권격이 당천벽의 옆구리를 내려친 것이다.

짙은 검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던 당천벽이었지만 절정의 경지에 이른 청홍쌍노는 그로서도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 당설련이 날린 독침에 중독된 상황에서는 말이다.

털썩.

당천벽은 땅에 나뒹굴었다.

청홍쌍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당천벽의 혈을 노렸다.

파바바박.

청노와 홍노의 손에서 무수한 지풍이 날았다.

당천벽은 사력을 다해 몸을 뒤틀었지만 쏟아지는 기세를 피할 수는 없었다.

퍼벅.

피가 튀고 당천벽의 몸이 경련했다.

그사이, 당천벽에게 짓쳐 든 청홍쌍노는 당천벽을 향해 주저없이 손을 내리쳤다.

순간 당설련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멈추세요.”

턱.

청홍쌍노의 손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갈퀴처럼 굽은 홍노의 새빨간 손은 이미 당천벽의 가슴과 목에 닿아 있었다.

머리와 단전을 노린 청노의 손에도 푸른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 끝내야 한다.”

“흘흘. 그래, 지금 끝장을 봐야 후환이 없는 법이니라.”

청홍쌍노가 말했다.

으득.

쓰러진 당천벽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청노와 홍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독기가 이미 그의 심장과 머리, 그리고 단전을 침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패는 이미 결정되었다.

청홍쌍노의 말대로 남은 일은 끝장을 보는 것뿐이다.

사박, 사박.

당설련이 조용히 걸어왔다.

그녀는 쓰러진 당천벽 바로 앞에 멈춰 섰다.

“하실 것이 있다면.”

문주 당천벽을 내려다보며 당설련은 말했다.

“지금 하시지요. 혹 절 죽이신다면 두 분 어르신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지 않겠어요?”

당천벽은 이를 갈았다.

당설련의 말은 거짓이었다.

여기서 당설련이 죽는다고 청홍쌍노가 물러설 리가 없다.

차라리 살인멸구를 택할지언정 말이다.

“흐.”

당천벽은 실소를 흘렸다.

“이런다고 네 마음대로 될 것 같으냐? 당문은……. 컥.”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당설련의 하얀 손끝에서 흘러나온 서늘한 기운이 당천벽의 단전을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스스.

“당문의 피를 흘리지는 않겠어요.”

“크윽!”

고통스러워하는 당천벽을 내려다보며 당설련은 말했다.

“그것은 당문의 여인으로서 할 일이 아니니까요. 문주께서는 그저…….”

당설련은 가늘게 웃었다.

“모든 일이 지나가기까지 조용히 잠들어 계시면 돼요.”

그 말은 당천벽이 당설련에게 한 말과 똑같았다.

그러나 당천벽은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끄으윽, 크아아악!”

사냥터에 당천벽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털썩.

경련하던 당천벽이 쓰러졌다.

그는 더 이상 절정고수가 아니었다.

단전이 박살 나 버렸으니까 말이다.

사락.

당설련은 손을 거뒀다.

청홍쌍노는 당천벽의 심장과 머리를 완전히 중독시킨 후 일어섰다.

“괜찮겠느냐?”

청노가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설련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모든 것은 제가 책임지겠어요. 두 분 어르신께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흘흘. 그 말이 아니다.”

홍노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독선과 다시 승부를 결하게 해 주겠다는 네 약속을 믿어도 되겠느냐는 뜻이다.”

“물론이에요. 두 어르신의 새로운 절기라면 독선 할아버지께서도 반드시 승부에 응하실 거예요.”

당설련은 당연한 듯이 말했다.

“믿으셔도 좋아요. 저보다 더 그분을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하하. 좋다, 아주 좋아!”

홍노는 크게 웃었고 청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바라보며 당설련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보기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이들은 어딘가 제정신이 아니다.

스스로 미쳤다고 시인했던 문주 당천벽처럼 말이다.

“흘, 그럼 이제…….”

쓰러진 당천벽을 힐끔 내려다보며 홍노가 말했다.

“너는 당문의 새로운 문주가 되는 것이냐?”

당설련은 태평맹의 대외 총괄군사다.

비록 지금은 그 세가 줄었다 해도 거대 연합체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문의 직계이자 독선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문 역사상 첫 여성 문주로 올라서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아뇨.”

그러나 당설련의 대답은 달랐다.

“저는 문주가 될 수 없어요. 문주님의 낙마조차 막지 못한 제가 어떻게 문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어요?”

절정고수인 당천벽이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차피 사고란 갑작스러운 것이고 공개적으로 의혹을 제기할 사람이 없다면 그냥 넘어가기 마련이다.

당천벽이 말한 것처럼 명분이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니까.

“그럼 누구를 내세울 작정이냐?”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는 영웅이 필요한 법이지요. 젊고 활기찬,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줄 영웅이 말예요.”

당설련은 나지막이 말했다.

“다음 문주는 이미 정해져 있어요.”

그녀의 대답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청홍쌍노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것뿐이었다.

어차피 이제 당문의 운명은 당설련의 손에 쥐어졌으니까 말이다.

문주 당천벽의 불행한 사고는 당문에 충격을 가져왔다.

그렇지 않아도 당문이 위축되고 있는 지금, 문주의 부재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당설련은 빠르고 과감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장로회의로부터 대외, 대내 정책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는 동시에 혈족의 위계에 관한 모든 권한을 장로회의에 일임했다.

당문의 역사는 길고 혈족들 간의 위계는 가히 황실에 버금갈 정도로 복잡하다.

그 위계의 순서를 정하거나 신임 장로의 자격 요건을 심사하는 문주의 권한을, 비록 일시적이라 해도 장로회의에 넘겨 버린 것이다.

장로들은 표정을 관리하지 못할 정도로 기뻐했다.

혈족의 위계를 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임 장로를 심사할 권한을 쥔다는 건 그 의미가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특히 당문처럼 혈족을 중요시하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눈앞에 던져진 이권에 장로회의는 순식간에 여러 계파로 나뉘기 시작했다.

장로회의가 계파 간의 논쟁으로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당설련은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착실히 당문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문주의 불행한 사고를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감숙성, 난주 근교.

마교의 호법인 환마는 커다란 저택의 대청마루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비록 오래된 저택이었지만 제법 크고 넓어서, 환마는 이곳에 자신의 영채를 세우고 마교의 군세를 다스리고 있었다.

지금도 환마의 좌우에는 상급 마병들이 서서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슥.

환마 앞에 마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법님.”

검은 무복을 입은 마병은 환마 앞에 무릎을 꿇고 극진한 예를 표하며 말했다.

“명하신 대로 일부 군세가 난주를 우회하여 남쪽으로 이동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후후.”

환마는 느긋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예상한 대로였다.

난주의 관군은 서안으로 향하는 길을 결코 열지 않는 반면에 남쪽 사천을 향한 방비는 비교적 허술했다.

사천은 군의 요충지도 아니며, 서안처럼 중원으로 향하는 길목도 아닌 까닭이다.

“난주에 대한 내부 공작은 어떻게 되었느냐?”

“공동파 도사들의 방해로 큰 진척은 없습니다.”

난주를 안쪽에서부터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진작부터 해 왔다.

그러나 공동파 도사들이 관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활동에 나서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난주 백성들의 민심을 다독이고 혼란을 막는 이들 역시 공동파의 도사들이었다.

“으음.”

환마는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마병에게 말했다.

“알았다. 가 보도록.”

마병은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자리를 떠났다.

환마는 두 손을 깍지 끼며 생각에 잠겼다.

“쯧.”

혀를 찬 환마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군(魔君)만 있었어도 난주 따위는 진작 함락시켰을 것을.”

마군이 이끄는 마교의 군세는 지금처럼 상급 마병이 이끄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환마에게 마군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난주 앞에서 지체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감숙은 우리의 것이 되었고…….’

난주가 버티고 있지만 이미 감숙은 마교의 세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국경 수비군과 정면 충돌을 피한다면 얼마든지 감숙에서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일대상인이 천하를 혼란케 할 때까지 말이다.

스륵.

환마는 뒤로 몸을 기대며 느긋하게 말했다.

“이제는 사천이로군.”

사천은 변방이자 산세가 매우 험한 곳이었다.

만일 사천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면 전황은 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마치 바둑에서 집을 짓듯 탄탄하고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사천이야말로 관군의 진입을 막기에 최적이라 할 수 있었다.

감숙과 사천에서 힘을 기른다면 마군을 일으키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후후후.”

환마는 웃음을 흘렸다.

이제 곧 펼쳐질 천마신교의 세상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

항주, 창룡맹 총단 맹주전.

객옹은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었지만 운현은 서류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간 총군사 영호준의 직권으로 결정하던 사안들이 모두 맹주인 운현에게 올라왔기 때문이다.

오전 내내 운현은 서류와 씨름했지만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듯했다.

“후우.”

운현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서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맹에 제가 결정할 것들이 이렇게 많았나요?”

“그나마 크게 줄어든 겁니다.”

총군사 영호준이 말했다.

그는 운현 앞에 또 다른 서류를 가져다 놓은 참이었다.

“문파와 세가의 연락 사항이나 조정이 필요한 사안을 모용 소저가 다 처리해 주고 있거든요. 신임 대외총괄께서 아주 능력이 출중합니다.”

모용미는 창룡맹 임시 대외총괄의 직책을 받았다.

그러나 영호준은 벌써부터 ‘임시’라는 단어를 생략하고 있었다.

“고마운 일이군요. 나중에 차라도 한 잔 사 드려야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제가 좋은 곳을 알려 드리지요.”

영호준의 말에 운현은 감사를 표했다.

앞에 쌓인 서류를 쳐다보던 운현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조 대인에게서 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감찰어사 조관은 항장익과 함께 북경으로 갔다.

그는 가끔 운현에게 조정의 소식을 전해 주곤 했다.

“없습니다. 듣기로는 병부 좌시랑이 곧 난리가 진압될 것이라 호언장담을 하고 있고, 예부 상서까지 나서서 난리를 초래했다며 박 공공을 공격하고 있다더군요. 그래서인지 박 공공을 벌하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육과 외교를 총괄하는 예부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컸다.

운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박 공공이 흔들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염려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군요. 그럼…….”

운현이 막 무엇인가 말하려던 참이었다.

탁탁탁.

맹주전 바깥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님!”

그 목소리는 바로 모용미의 것이었다.

“소저!”

운현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늘 단아하던 모용미가 상기된 얼굴로 맹주전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단번에 운현에게 다가왔다.

“공동파의 천운자께서 급보를 전하셨어요.”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천운자는 공동파의 장문인 대행이다.

난주에서 마교의 군세와 대치하고 있는 그가 보낸 급보라면 심각한 내용일 것이 분명했다.

모용미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교의 군세 중 일부가 난주를 우회하여 사천으로 향했다고 해요.”

“사천으로요?”

영호준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운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모용미에게 말했다.

“마차를 준비해 주십시오. 지금 바로 어르신들을 뵈어야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어르신들은 바로 항주 외곽 저택에 있는 장로와 가주, 그리고 절정고수 들이었다.

“네, 알겠어요.”

모용미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향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려 객옹을 바라보았다.

말은 필요 없었다.

달칵.

옆에 있던 객옹은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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