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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93화 (493/530)

493화. 권력은 신화를 이기지 못한다

운현과 객옹이 나타나자 후원의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가주와 장로, 그리고 절정고수 들은 일어나서 객옹에게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어르신.”

그들의 예는 사뭇 정중했다.

감히 객옹 앞에서 가주니, 장로니 하는 직위를 내세울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시오. 맹주.”

노년의 천수 신니가 온화한 웃음을 머금으며 운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른 장로와 가주 들도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운현은 그들에게 답례한 후 자리에 앉았다.

“오다 보니 대단한 기세가 느껴지던데, 군자검께서 빙설 여협과 비무를 하셨습니까?”

군자검 제갈명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허나 젊은 패기엔 어쩔 수가 없더군. 북해의 무공도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아주 좋은 비무였소.”

제갈명은 흡족한 표정이었다.

빙설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그녀의 눈빛 역시 만족스러워 보였다.

“맹주께서는 언제가 좋으시오?”

문득 철검 남궁벽이 물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순서에 합의하시면요.”

혈교 토벌 직전, 상급으로 운현이 약속한 ‘비무’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누가 먼저 하느냐다.

절정고수들과 가주는 물론이고 신니나 장로들까지 운현과 비무를 원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답게 그들은 온갖 논리를 들이대며 우선권을 주장했다.

그 바람에 아직 순서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미 비무를 한 빙설조차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순서를 정하는 것보다는 서로간의 비무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 것 같지만 말이다.

“자네도 비무를 할 건가?”

문득 노부인 능세영이 객옹에게 물었다.

그녀는 검성과 일은 외에 유일하게 객옹에게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든지.”

담담한 표정으로 객옹이 말했다.

그 말에 가주와 절정고수 들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객옹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 버리고 온다면 얼마든지 받아 주마. 단 한 명만 말이다.”

그 순간 서로 간에 날카로운 견제의 시선이 오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특히 가주들의 눈빛에서는 열기마저 느껴졌다.

능세영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그러면 나는 어떤가? 이미 다 내려놓은 지 오래인데 말일세.”

“상관없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든 사람이 움직임을 멈추고 노부인 능세영과 객옹을 주시했다.

“그러면…….”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능세영의 말을 끊으며 객옹이 말했다.

“너는 먼저 온전히 나을 생각이나 해라.”

가주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능세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혈교를 토벌하며 이미 놀라운 무위를 선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다 나은 것이 아니라니?

“후후.”

능세영은 웃음을 흘렸다.

“알겠네. 그리하지.”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찻잔을 들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능세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확실히 변해 있었다.

***

사천성, 성도.

당문의 문주인 청염군 당천벽은 당설련과 함께 사냥에 나섰다.

사냥이라 해도 성도 외곽의 야산이었고, 본래 당천벽이 말 달리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숲이 많이 우거진 곳도 아니었다.

사냥감을 몰기 위해 흩어진 몇몇 몰이꾼들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감히 당문의 문주가 하는 사냥을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는군요.”

말 위에 앉은 당설련이 말했다.

“음.”

당천벽은 말에 탄 채 큰 동작으로 활을 겨누었다.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날카로운 화살촉이 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잠시 후, 저편 수풀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왔다.

핑.

그것이 모습을 채 드러내기도 전에 당천벽은 화살을 날렸다.

퍽.

당천벽의 화살을 맞은 커다란 사슴은 그 자리에서 맥없이 쓰러졌다.

일반적으로 사냥감의 출혈을 유도하고 추격하는 것과 달리, 제자리에서 단 한 대의 화살로 사슴을 쓰러트린 것이다.

“축하드려요.”

당설련이 말했다.

그러나 정작 당천벽은 활을 내리며 다른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너를 당문의 눈꽃이라 부르더구나.”

당설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라 불리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 그렇게들 말하더군요.”

“눈꽃이라……. 아마도 네가 차갑고 아름답다는 뜻이겠지. 당문의 여인으로서 말이다.”

당설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무어라하기도 전에 당천벽이 말했다.

“모르는 소리다.”

당설련의 눈빛이 변했다.

당천벽은 그녀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어릴 때부터 약해빠진 아이였다. 무엇이든 한번 마음을 빼앗기면 앞뒤 가리지 않는 어리석은 면도 있었고. 그런 네가 당문의 눈꽃이라니, 참으로 우습지 아니하냐?”

“저는…….”

“화살을 거두어 오너라.”

당설련의 말을 끊으며 당천벽이 말했다.

본래 쓰러진 사냥감을 정리하는 건 몰이꾼의 일이다.

그러나 몰이꾼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문주가 명한 이상 거부할 수는 없었다.

“네.”

당설련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가볍게 말을 몰아 쓰러진 사슴에 다가갔다.

따각, 따각.

당설련은 쓰러진 사슴 앞에 멈춰 섰다.

사슴은 피를 흥건히 흘리면서도 아직 살아 있었다.

헐떡이며 당설련을 올려다보는 그 커다란 눈동자는 사뭇 처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설련은 고개를 돌렸다.

사슴을 관통한 화살은 조금 더 먼 땅에 박혀 있었다.

당설련은 말을 몰아 화살을 회수한 후, 다시 당천벽에게 되돌아왔다.

따각.

“여기 있습니다.”

당설련은 말고삐를 놓고 두 손으로 정중하게 화살을 건넸다.

말에 탄 당천벽은 무심히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슥.

무엇인가 가느다란 것이 당설련을 향해 날아들었다

‘웃!’

파라락.

말 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설련은 급히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목에 따끔한 감각이 느껴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털썩.

땅에 떨어진 당설련은 즉시 목을 만졌다.

손가락 사이에 잡힌 가느다란 짧은 침은 바로 당문의 암기인 비선침(飛旋針)이었다.

일반적인 우모침과 비슷하지만 매우 가늘어서 알아차리기가 힘든 데다가, 부드럽지만 내공을 실으면 바늘처럼 강해지는 당문의 독문 암기였다.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문주인 당천벽이 당설련에게 비선침을 쏘아 낸 것이다.

화살을 받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에 말이다.

“아버지, 어째서…….”

당설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당천벽을 올려다보았다.

“문주라 불러라.”

당천벽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자리는 부녀의 사사로운 정이 끼어들 곳이 아니다.”

당설련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당천벽은 말 위에서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항주에 다녀왔더냐?”

“……무슨 말씀이시지요?”

“후후.”

당천벽은 웃었다.

“소용없다. 네가 천하의 모든 사람을 속인다 해도 나는 속지 않으니까. 포양호까지 간 네가 항주를 찾지 않을 리가 있느냐?”

서늘한 시선으로 당설련을 내려다보며 당천벽은 말했다.

“너는 나보다 독선을 더 따르던 아이니까 말이다.”

과거, 문왕과 손잡기로 한 당문의 결정을 당설련이 순복한 것은 그것이 합리적인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대상인에게 가세한다는 이번 결정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운현과 객옹을 또다시 적대한다는 건 자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까지 해서 일대상인에게 가세하고 싶으신 건가요?”

그건 당천벽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천벽은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지금 창룡맹에 받아들여진다 해도 용의 꼬리가 될 뿐이다. 게다가 일대상인의 힘은 크고 경이로우니 어찌 그를 택하지 아니하겠느냐?”

“그가 마교와 손을 잡았는데도 말인가요?”

당설련은 날카로운 눈으로 당천벽을 올려다보았다.

당천벽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너는 여전히 어리석구나. 명분 같은 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천하가 일대상인의 것이 되면 그 누가 마교를 욕할 수 있겠느냐? 아니, 이후에는 마교의 교주가 황실의 스승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하!”

당설련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보니 제정신이 아니셨군요.”

그녀의 눈빛은 그 말만큼이나 날카로웠다.

하지만 당설련의 얼굴엔 이미 땀이 가득했다.

내력으로 억누르고는 있지만 비선침의 독기를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당천벽이 웃으며 수염을 매만졌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절정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안 그러냐?”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걱정 마라.”

당천벽은 서늘한 눈빛으로 당설련을 내려다보았다.

“문주로서 내 어찌 당문의 피를 흘리겠느냐? 너는 그저 모든 일이 지나가기까지 조용히 잠들어 있기만 하면 된다.”

깨어날지 알 수 없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당설련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

당설련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점점 흐려지던 당설련의 눈동자는 그대로 빛을 잃었다.

털썩.

당설련이 쓰러졌다.

당천벽은 말에 탄 채 그런 당설련을 무심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설련의 호흡은 안정적이었고 움직임도 더 이상 없었다.

그녀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당천벽은 고개를 돌렸다.

따각.

그가 말을 몰아 움직이려던 바로 그때였다.

‘음!’

당천벽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즉시 자신의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옆구리에는 어느새 가느다란 침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쯧.”

당천벽은 신경질적으로 그 침을 뽑아 내던졌다.

그리고 당설련을 돌아보았다.

스륵.

쓰러져 있던 당설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마지막에 방심을 하셨군요. 문주님.”

당설련은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 중독되었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천벽은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내가 손을 쓸 것을 알고 있었더냐?”

“글쎄요?”

가늘게 웃으며 당설련은 말했다.

“하지만 비선침은 문주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던 암기지요. 그러니 이 정도의 대비는 당연하지 않겠어요?”

당천벽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자신이 허를 찔린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널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구나.”

탁.

그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당설련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허나 이런다고 무엇이 바뀌겠느냐? 내 비록 방심하여 네게 한 수를 허락하긴 했으나…….”

당천벽은 조소를 머금었다.

“이 자리에서 너를 벌하고 돌아가 해독하면 그만이다.”

청염군 당천벽은 검기발현의 절정고수다.

비록 그를 중독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해도 당설련으로서는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당천벽은 사실 방심한 것이 아니라 당설련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럴 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니까.

“물론 그래요.”

당설련은 조용히 말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저뿐이라면요.”

당천벽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파라락.

바람 소리와 함께 순간 두 사람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슥.

소리도 없이 당설련 뒤에 조용히 내려선 두 노인.

푸른색과 붉은색의 옷을 입은 그들은 바로 청홍쌍노였다.

당천벽의 표정이 굳었다.

당설련은 조용히 말했다.

“독선께서는 살아 있는 당문의 신화셔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주님은 아니지요. 그저 지금 당문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일 뿐.”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권력은 신화를 이기지 못해요. 문주님께서는 독선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좀 더 숙고하셔야 했어요.”

독선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당문에 없다.

심지어 독선에게 이를 갈던 청홍쌍노마저도 그의 신화적인 행적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니 ‘문주께서 독선의 뜻을 대적할 작정이다’라는 당설련의 말에 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뻔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주는 가문의 어른으로서 실패한 사람들을 보듬을 필요가 있지요. 아무리 독선께 패했다지만 두 어르신께 ‘싸움에 진 개’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건…….”

말을 잇던 당설련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심했어요.”

청홍쌍노의 시선에는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당천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가고는 당설련의 입술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당문의 눈꽃이라는 별호에 더없이 어울리는, 지독히 차갑고도 치명적인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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