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화. 암투
당설련은 창룡맹 총단을 떠났다.
운현은 객옹과 함께 정문에서 그녀를 배웅했고, 총군사 영호준도 그 옆을 떠나지 않았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운현이 그녀에게 말했다.
흑립을 쓰고 너울로 얼굴을 가린 당설련은 공손히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곧 다시 뵙겠어요.”
당설련은 고개를 돌려 객옹에게도 예를 표했다.
객옹은 뒷짐을 진 채 묵묵히 당설련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 감도는 연민을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당설련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운현이 준비해 준, 정확히는 총군사 영호준이 마련한 마차에 올라탔다.
탁.
문이 닫히고 마차는 곧 출발했다.
따각, 따각.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운현은 말했다.
“당설련 소저가 과연 문주를 설득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대답한 사람은 영호준이었다.
“그녀라면 어떻게든 할 겁니다. 비록 거짓말은 잘하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한숨을 쉬며 영호준은 말을 이었다.
“다만 지나치게 무리를 하는 건 아닐까, 그것이 걱정될 뿐이지요.”
염려가 가득한 그 표정에 운현은 차마 반론을 말하지 못했다.
거짓말을 잘하는데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안 한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숨 쉬는 영호준을 보니 반론은커녕 오히려 불쌍한 마음이 앞섰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객옹을 향해 말했다.
“어르신, 들어가시지요.”
객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당설련이 탄 마차가 떠난 방향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슥.
객옹이 몸을 돌렸다.
뒷짐을 진 그가 총단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운현과 영호준은 객옹을 따라 발을 옮겼다.
총군사 영호준을 알아본 여인들의 놀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운현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인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손까지 들어 주는 영호준을 보며 운현은 웃음을 머금었다.
한숨을 쉬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런 모습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 가시지요.”
총군사 영호준을 향해 그렇게 말하며, 운현은 객옹과 함께 총단 맹주전으로 향했다.
***
당문으로 돌아가는 동안 당설련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아예 말조차 하지 않았고, 마차나 배에서도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다.
충성스러운 수하는 당설련을 방해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수행했다.
그렇게 사천성 성도, 당문에 도착한 당설련은 쉴 틈도 없이 곧장 문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사박, 사박.
문주의 집무실로 향하는 당문의 유서 깊은 복도는 우아하고 고풍스러웠다.
조금 좁은 듯도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예스러운 느낌을 더욱 살려 주고 있었다.
“문주님께서는 어떠시지요?”
당설련이 물었다.
앞에서 걷던 노년의 부총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여전하십니다. 총괄군사님의 도착을 계속 기다리고 계셨지요.”
당설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나 마나 한 소리군요. 그럼 부총관은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늙은 부총관은 움찔했다.
그 역시 당가의 핏줄이며 오랫동안 문주 당천벽을 모셔 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누구 편이냐고 묻는 건 사실 어리석은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부총관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저는 언제나 당문의 편입니다.”
당설련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번졌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나도 그렇거든요.”
탁.
당설련이 발을 멈췄다.
앞서 가던 노년의 부총관 역시 멈춰 섰다.
“문주님께서는 어떠시지요?”
조금 전 던졌던 질문과 단 한 마디도 변하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달랐다.
“문주의 권한으로 장로회의의 권한을 당분간 정지시킬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공식적으로 내려진 명은 아직 없으나 몇몇 원로님들과 의견을 조율 중이시지요.”
문주가 무엇을 하려는지 당설련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장로회의의 권한을 정지한다는 건 모든 결정권을 문주에게 집중시키겠다는 의미다.
그로 인해 당연히 터져 나올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일부의 원로들과 의견을, 아니 뒷거래의 조건을 조율하고 있는 것일 테고 말이다.
즉, 문주 청염군 당천벽은 비상 사태를 선언할 심산인 것이다.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렇군요.”
당설련은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이 일은 잊지 않겠어요.”
노년의 부총관은 깊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보며 당설련은 말했다.
“자, 갈까요? 저를 기다리고 계신다니 말예요.”
부총관은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당설련은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당문의 문주, 청염군 당천벽의 집무실은 넓고 환했다.
옥으로 된 향낭에서는 부드러운 향이 피어오르고, 벽에 걸린 글씨와 그림들은 하나같이 명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사박.
집무실에 들어선 당설련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찾으셨는지요?”
“어서 오너라.”
청염군 당천벽이 조용히 말했다.
그는 당설련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붓을 들고 난(蘭)을 치는 중이었다.
난초는 지조 높은 선비와 절개 있는 여인에 자주 비유되며, 사군자라 하여 서화에서 흔히 그려지는 것이기도 했다.
휘릭.
당천벽의 붓이 움직이고 백지에 난초가 그 우아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붓을 거둔 당천벽은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으음.”
탁.
당천벽은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돌려 당설련을 바라보았다.
“그래, 일은 잘 되었더냐?”
당천벽이 탁자로 걸어가며 말했다.
털썩.
의자에 앉은 그는 향이 오르는 찻잔을 들었다.
“아직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포양호까지 찾아가 표식을 남겼지만 회답은 없었어요.”
당설련이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포양호에 갔다 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곳이 문왕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있었던 장소니까 말이다.
“그래?”
문주 당천벽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긴 예전처럼 간단하지는 않겠지. 문왕도 죽었고…….”
후룩.
차를 마신 당천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탁.
찻잔을 내려놓으며 당천벽이 말했다.
“알았다. 계속 시도해 보도록. 나가 보아라.”
“네, 문주님.”
당설련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아, 그리고.”
막 몸을 돌리려던 당설련을 당천벽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잠깐 사냥이라도 갔다 오려 하는데 함께 가는 게 어떠냐?”
당설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시국에 한가로이 사냥이라니?
당천벽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문주는 이런 때일수록 여유와 건재함을 보여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아랫사람들도 안심을 하니까. 그럼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덜컹.
당천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떠냐고 물은 것은 형식일 뿐, 결정은 당천벽이 내렸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슥.
당천벽은 다시 붓을 들었다.
그는 자신이 그린 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서 쉬어라. 먼 길을 다녀왔으니 말이다.”
당설련은 문주 당천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천벽은 서화에 집중한 채 당설련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사락.
“네. 문주님.”
당설련은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조용히 집무실을 나왔다.
그때까지 문주 당천벽의 시선은 그가 그린 난초에 못박혀 있었다.
탁.
집무실의 문이 닫혔다.
당천벽은 천천히 붓을 움직이며 말했다.
“저 아이가 어디를 다녀왔더냐?”
“포양호입니다.”
아무도 없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낮고 작아서 듣기조차 힘든 목소리였다.
하지만 당천벽에겐 상관없었다.
“그리고?”
“없습니다.”
당천벽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포양호에 머무르던 기간 중에 행적이 분명하지 않은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래?”
당천벽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너희의 시선을 고의로 피했다는 뜻이냐?”
“알 수 없습니다.”
당천벽은 잠시 침묵했다.
“……그렇다면.”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항주에 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겠군.”
포양호에서 항주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사천의 성도에서 항주로 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쉽다.
무엇보다 당천벽은 당설련의 속내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어릴 적 그녀는 모두가 무서워하던 독선을 그 누구보다 잘 따르던 아이였으니까 말이다.
“알았다. 가 보아라.”
소리도, 인기척도 없었지만 당천벽은 그들이 떠난 것을 알 수 있었다.
달칵.
당천벽은 붓을 내려놓았다.
하얀 종이 위에 아름다운 난초가 그 가녀린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음미하듯 바라보며 당천벽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 너무 잎이 무성하면 아름답지 않은 법이지.”
당천벽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러나 그 눈동자는 차갑게 번뜩이고 있었다.
“난초건, 사람이건 간에.”
***
혈교의 토벌에 참가했던 각 파의 장로들과 가주, 그리고 절정고수들은 여전히 항주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항주 외곽에 있는, 과거 창룡맹 임시 총단으로 사용되던 저택에서 기거했다.
어차피 이곳도 임시 총단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큰 저택이었던 데다가, 여기라면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다만 나날이 후원이 황폐해지는 탓에, 이곳을 관리하는 총관의 시름이 깊어 가는 것이 유일한 단점일 뿐이었다.
콰앙.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그 사이로 가녀린 몸매의 여인이 허공을 날았다.
후웅.
허공을 날아간 여인은 빙글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탁.
그녀는 바로 북해일문의 빙설이었다.
빙설의 손에 들린 검에는 푸른 검기가 완연했다.
우우우웅.
“허어, 이 수법도 안 통하다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흙먼지가 바람에 날려가고 군자검 제갈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휘릭.
허공을 날던 검이 군자검의 손에 되돌아왔다.
운현과 비무하며 펼쳤던 절기지만 그 기세는 이전보다 사뭇 절제되어 있었다.
“제갈 가주의 검은 빙설 여협과 상성이 좋지 않소.”
앉아 있던 철검 남궁벽이 말했다.
“두 사람의 절기가 비슷하니 결국 섬세하고 기교가 뛰어난 빙설 여협이 우세를 점할 수밖에. 제갈 가주께서는 아무래도 나이가 있지 않으시오?”
옆에 앉아 있던 비검 공손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마시려던 그는 잔에 덮인 흙먼지를 보고는 옆으로 휙 차를 버렸다.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군.”
아미파 천수 신니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가 들면 매사에 더욱 섬세하고 예민해지는 법일세. 예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도 깨닫게 되고 말이네. 그렇지 않나?”
“신니의 말씀이 참으로 옳소.”
노부인 능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 가주께서는 섬세한 기교보다 오히려 더 과감하게 나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소.”
군자검 제갈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세가의 가주들과 절정고수들이 이렇듯 공개적으로 비무를 하고, 심지어 평하기까지 한다는 건 누구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제갈명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일이 지금 이 저택 내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운현이 비무를 약속한 것이 컸다.
이전에 빙설 때도 그랬듯이 운현은 절대 비무를 숨기지 않는다.
그러니 ‘어차피 드러날 절기와 실력이라면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데다가, 이처럼 서로의 비무를 보며 얻는 바도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고수들이 자신의 벽과 한계를 깨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들에게 이런 상황은 가히 천운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스릉.
제갈명은 검을 거두었다.
“감사하오, 빙설 여협.”
빙설 역시 검을 갈무리하고는 제갈명에게 예를 표했다.
제갈명은 빙긋 웃었다.
서로의 절기를 보여 준다는 의미는 또 있었다.
그것은 상대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사 표현이었다.
적에게 자신의 실력을 내보이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장로와 가주 그리고 절정고수 들은, 이미 서로 간에 묵시적인 평화 협약을 체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자신의 실력을 확인시켜 줌으로서 일종의 억제력으로서 작용하기도 하고 말이다.
말 그대로 강호 무림의 향방을 좌우할 수도 있는 모임이 지금 이곳에서 그 형태를 갖춰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여기 계셨군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눈이 단번에 빛나기 시작했다.
특히 금화영은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운 공자!”
금화영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저벅, 저벅.
객옹과 함께 걸어오고 있는 문사 차림의 온화한 청년.
그는 바로 창룡맹의 맹주이자 이 모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창룡검주 운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