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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91화 (491/530)

491화. 당설련의 선택

운현은 놀란 표정으로 무릎 꿇은 당설련을 내려다보았다.

‘문주가 무릎 꿇어야 한다’는 운현의 대답에 당설련은 방금 ‘그렇게 해 드리지요’라고 말했다.

객옹조차 놀라게 한 대답이었지만 정작 당설련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어째서 당문의 눈꽃이라 불리는지, 그리고 스스로 당문의 여인을 자처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독심(毒心)이야말로 당문의 정체성 그 자체니까.

“……일어나십시오.”

운현이 조용히 말했다.

당설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박.

몸을 일으킨 그녀는 꼿꼿이 몸을 세웠다.

조금 전 ‘복종’을 말한 사람 같지 않은 당당하고 자신 있는 태도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 모습이야말로 당설련이라 할 수 있었다.

“이곳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지 않으니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네. 대인.”

당설련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 그 대인이라는 호칭은 좀…….”

“어떤 것이 좋으신가요?”

희미하게 웃으며 당설련이 말했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따르겠어요.”

그 웃음은 어쩐지 도발적인 느낌이었다.

운현의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은 공자 정도면 무난하겠군요.”

“네, 운 공자님.”

당설련은 주저 없이 말했다.

이런 순종적인 모습은 처음인지라 운현은 그 호칭마저 어색함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더 이상 무어라 할 이유도 없었다.

저벅.

운현은 몸을 돌려 맹주전으로 걸어갔다.

당설련은 운현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함께 왔던 사내는 당설련을 향해 예를 표하고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운현의 뒤를 따르던 당설련은 맹주전 앞에 서 있는 객옹을 향해 머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슥.

객옹은 대답 대신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맹주전으로 걸어갔다.

영호준 역시 복잡한 눈빛으로 당설련은 바라보고 있었지만 당설련은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마치 그곳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박, 사박.

당설련이 영호준을 지나쳐 맹주전으로 들어갔다.

영호준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나를 의식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 데도 저런 태도라니…….”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런 점이 또 아주 귀엽다니까?”

영호준의 표정엔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맹주전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 모습은 언제나의 풍류 귀공자 영호준, 바로 그대로였다.

운현은 당설련과 함께 집무실에 마주 앉았다.

직접 찻주전자를 쥔 운현은 당설련과 객옹, 영호준에게 차를 따랐다.

또르륵.

따뜻한 찻잔에서 부드러운 향이 피어오르자 당설련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이 차는 몽정황아로군요.”

“네. 소저께서 예전에 제게 주셨던 차입니다.”

운현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때 맛과 향이 참 인상적이었거든요. 아, 물론 은침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과거 운현이 당설련과 독대했을 때, 당설련은 운현의 차를 직접 맛보았고 심지어 은침으로 검사까지 했다.

차 한 잔조차 마음 놓고 마시지 못하는 상황이 일상처럼 되어 버린 사람도 있다면서 말이다.

스륵.

운현은 먼저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했다.

당설련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찻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후우.”

차를 음미한 당설련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좋네요. 부드럽고 살짝 단맛이 돌면서도 어딘가 날것 그대로인 몽정황아 특유의 맛이 잘 살아 있어요.”

찻잔을 매만지며 당설련은 말했다.

“여러 난리에도 불구하고 항주 시내에 있던 그 찻집은 무사했던 모양이군요.”

운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처럼 이 찻잎은 항주 시내의 찻집에서 받아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어찌……. 아. 당연히 이미 알고 계시겠군요.”

운현은 금방 상황을 알아차렸다.

항주 시내의 그 찻집은 영호준과 함께 갔던 곳이다.

찻잎을 고르는 주인의 안목이 뛰어나다고 칭찬했던 그 찻집을 당설련은 이미 가 본 적이 있는 것이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설련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지만 그녀는 말없이 차를 음미했다.

“서찰은 잘 보았습니다.”

운현이 찻잔을 쥔 채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군요.”

“항주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달칵.

당설련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제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에요. 이렇게 만남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녀는 다시 예를 표했다.

그리고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공자님과 저, 두 사람만 독대할 수는 없는 건가요?”

운현 옆에는 객옹과 영호준이 앉아 있었다.

객옹은 무심히 차를 음미했지만, 영호준은 당설련을 쳐다보며 연신 싱글거리고 있었다.

당설련은 절대 영호준을 돌아보지 않는데도 말이다.

“괜찮습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분들은 제 자신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렇군요.”

당설련은 운현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마디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허나 그렇게 되면 맹주의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운현은 당설련의 지적을 수긍했다.

“실제로 총군사께서는 저보다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만일 총군사께서 그만두시기라도 한다면 창룡맹은 당장 난리가 나겠지요. 아니, 아예 맹의 기능을 상실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몇 달간 맹을 비웠어도 아무 일이 없었는데 말이지요.”

말하던 운현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 정도면 제가 그만둬도 되지 않을까 싶은…….”

“그렇지 않습니다. 맹주님.”

영호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맹주님이시야말로 창룡맹의 기초이자 근간이며 핵심이십니다. 맹주님께서 그만두시면 막대한 재정은 대체 어디서 충당한단 말입니까?”

그 말에 운현은 물론 당설련까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영호준은 진지하기만 했다.

“적어도 창룡맹의 자체 수입원이 탄탄해지는 십 년 후까지는 절대 그만두시면 안 됩니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십 년 후에는 그만둬도 괜찮습니까?”

“글쎄요?”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십 년 후에 봐야 알겠지요.”

“후후후.”

운현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당설련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어떤가요?”

당설련이 물었다.

운현은 객옹을 돌아보았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차를 음미하던 객옹이 조용히 답했다.

“나는 객옹이다.”

그 말은 객옹의 태도를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객옹이며 당문의 독선이나 약선이 아닌 것이다.

“알겠어요.”

당설련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가만히 찻잔을 쥐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당문은, 일대상인에게 가세하려 하고 있어요.”

운현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객옹은 물론 영호준도 얼굴을 굳혔다.

“문주님의 의지가 너무나 확고해요. 창룡맹과 독선께서 당문에 등을 돌린 이상 이제 당문이 기댈 곳은 일대상인뿐이라면서요.”

운현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물었다.

“당문이 처한 상황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입니까?”

아무리 예전 같지 않다지만 당문은 여전히 태평맹의 맹주다.

갑자기 일대상인에 기대려 한다는 당설련의 말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당설련은 쓴웃음을 지었다.

운현이 알지 못한다는 건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당문은 더 이상 운현에겐 적수조차도 아닌 것이다.

“모르셨나요? 태평맹 강남 공략은 이미 혁련세가가 주도하고 있어요. 게다가 사천에서는 아미파가 날로 그 기세를 더하고 있지요. 지금 사천에서 당문의 영향력은, 마치 이미 져 버린 해와 같아요.”

한때 태평맹에 의해 봉문의 위기까지 몰렸던 아미파는 극적으로 위기를 넘겼을 뿐만 아니라 사천의 새로운 패자로 등극하고 있었다.

불가인 아미는 여전히 세속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천의 유지와 부호 들은 모두가 아미파에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

창룡맹의 맹주, 창룡검주 운현이 직접 아미를 구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관아에도 당문의 말이 전혀 먹히지 않을 정도니까요. 그동안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관아의 대관들이 태도를 바꾼 건 이미 오래전부터였다.

운현이 특별 감찰어사가 된 이후 사천의 지방 대관들은 일제히 당문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박 공공이 잠시 물러나 있는 지금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현재의 지방 대관들은 모두가 크든 작든 박 공공의 도움을 입은 이들이었고, 그들은 박 공공이 곧 권세를 되찾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렇군요.”

운현은 당문의 상황이 생각보다 절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문 내에서는 실제로 위기감이 팽배했다.

지금 당장 무엇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아미파에 밀려 당문이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당문의 문주, 청염군 당천벽은 결단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일대상인에 가세할 것을 말이다.

“일대상인이 받아 준다 하였습니까?”

“모르지요.”

당설련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제게 상인과의 협의를 일임하셨는데 저는 이곳으로 왔으니까요.”

‘아.’

운현은 어째서 당설련이 시간 낭비를 감수하고 자신을 기다렸는지, 그리고 서슴없이 무릎을 꿇었는지 알 수 있었다.

밀서를 보내기도 전에 이미 그녀는 선택한 것이다.

“일대상인에게 가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혈교와 마교를 일으킬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을 텐데요.”

“네. 알고 있어요.”

당설련의 눈동자가 운현을 똑바로 향했다.

“하지만 저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아요. 자존심이 상한다고 오기를 부리며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지요.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일대상인에게 본격적으로 가세한다고요?”

단호한 목소리로 당설련은 말했다.

“마교의 군세가 난주를 위협하고 있다고 해도 그저 한 때의 위세에 불과해요. 설령 마교가 이긴다 해도 마찬가지예요. 세상에 누가 마교를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이건 실리를 따지기 이전에 명분 싸움에서부터 지고 들어가는 형국이에요. 대체 왜 이걸 보지 못하는 거죠?”

그간 쌓인 것이 많았는지 당설련은 단숨에 말을 쏟아 냈다.

천하에 그 누가 마교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

마교가 인정받을 방법은 단 하나, 마교의 천하를 이루는 것뿐이다.

그러나 명분을 잃고 천하를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설련의 지적은 지극히 정당했다.

그때 문득 영호준이 끼어들었다.

“혹시 일대상인과 연락할 방법이 있소? 아니, 있습니까?”

당설련이 인상을 썼다.

대답 없는 그녀를 향해 운현이 물었다.

“일대상인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그건 저도 몰라요.”

당설련이 운현에게 답했다.

그녀는 영호준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다만 문왕과 소통하던 방법이 있을 뿐이에요. 제대로 연락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요.”

애초에 당문은 일대상인과 느슨한 협력 관계였다.

연락이나 서찰도 매우 드물었고, 문왕이 죽은 이후에는 그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문주 당천벽이 당설련에게 협의를 맡긴 이유도 그녀 외에는 일대상인측과 연락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하던 운현이 당설련에게 물었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당문이 창룡맹에 가맹하게 해 주세요.”

당설련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운현의 대답 역시 즉각적이었다.

“좋습니다. 다만…….”

“문주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조건 말이지요?”

당설련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문파들과 동등한 대우를 약속하지요. 아, 물론 여러 문파들과의 관계는 알아서 해결하셔야합니다.”

“당연하지요. 공자님께서는 참으로 관대하시군요.”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관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공정하고자 노력할 뿐이지요. 그리고…….”

시선을 돌린 운현은 객옹과 영호준을 바라보았다.

“소저께서는 참으로 귀한 인연들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그 말에 당설련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할아버지는 제게 정말로 과분한 분이셔요.”

묵묵히 앉아 있던 객옹은 눈을 감았다.

그 역시 혈육의 정 앞에서는 솟구치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당설련은 그런 객옹을 촉촉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옆에 있던 영호준이 감격한 표정으로 당설련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할아버지’라고 당설련이 못 박았음에도 말이다.

“흥!”

당설련은 코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에게 보인 것은 웃고 있는 운현의 모습이었다.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고 애써 시선을 내렸다.

이미 식어 버린 몽정황아의 은은한 향만이 그런 당설련을 위로해 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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