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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90화 (490/530)

490화. 복종

운현은 창룡맹 총단 맹주전으로 들어섰다.

천수 신니와 남궁세가의 가주에게서 호평을 받은 집무실은 여전히 넓고 조용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운현은 밀서를 열었다.

바스락.

내용은 짧았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후 서찰을 영호준에게 건넸다.

영호준은 즉시 서찰의 내용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영호준의 안색이 굳었다.

“무슨 일이냐?”

객옹이 물었다.

운현은 조용히 답했다.

“당설련 소저가 저를 은밀히 만나고 싶어 하는군요. 당문의 문주에게 알리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당설련이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주에게 비밀로 한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당문은 세가들 중에서도 유독 혈족 간의 위계 질서가 철저한 문파이기 때문이다.

당설련이 문주에게 비밀로 만나자는 건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총군사님.”

운현이 영호준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 밀서가 당문의 명운이 달린 일이라고 판단하셨습니까?”

“지금 이 시점에 당문이 밀서를 보내는 건, 어지간한 문제가 아니고서야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객옹은 당문의 문주 당천벽과 총괄군사 당설련에게 분명히 경고했다.

지금은 하늘이 당문을 허락하지 않으니 조용히 숨죽이고 있으라고.

운현 역시 그들에게 ‘언젠가 반드시 절명비의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그런 운현을 향해 당문이 그저 안부 인사나 전하자고 밀서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운현을 만나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이다.

바스락.

영호준은 서찰을 접었다.

잠시 서찰을 내려다보던 영호준은 운현에게 정중히 돌려주었다.

“이 글씨는 당설련 소저의 친필이 확실합니다.”

영호준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건 스스로의 약점을 맹주님의 손에 쥐어 준 것과 마찬가지군요. 만일 맹주님께서 이 서찰을 당문의 문주에게 보내면 당설련 소저는 징계를 면치 못할 테니까요.”

징계 정도가 아니었다.

문주 당천벽을 배제하고 창룡맹의 맹주 운현을 만나는 건 배신으로 몰려도 할 말 없는 행위였다.

당설련은 운현에게 밀서를 전하는 동시에,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까지 함께 보낸 것이다.

“그만큼 당설련 소저도 진심이라는 뜻이겠지요. 당연히 태평맹 강남 공략 따위에 대한 건 아닐 겁니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이라…….”

중얼거리던 운현은 두 사람의 시선을 느꼈다.

영호준도, 그리고 객옹도 운현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밀서를 가져온 자에게 만나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헛웃음을 머금었다.

“설마 이번엔 당문으로 가시는 건 아니겠지요?”

예전 운현은 공손세가의 가주를 만나기 위해 계림으로 간 적이 있다.

정작 공손세가의 가주는 항주로 올 작정까지 했었다는 데 말이다.

“아닙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사천성 성도까지는 너무 멀어서……. 아, 그러고 보니 사천에서 감숙은 비교적 가까운 편이지요?”

사천성과 감숙성은 이웃해 있다.

물론 그렇다고 옆 마을처럼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제가 사천으로 가는 것이 좋을지도…….”

“이곳으로 오라고 하겠습니다.”

영호준이 얼른 말했다.

“어차피 강남 공략도 지지부진하니 바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 바빠도 와야지요. 맹주님께서 여기 계신데요.”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럼 그리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네.”

운현이 답하자 영호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운현과 객옹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고, 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

며칠 후, 창룡맹 정문으로 두 사람이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지만 정문을 지키는 무사들은 대번에 그들이 낯선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아무나 드나드는 것 같지만 사실 방문자들의 얼굴과 신원은 무사들이 모두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추십시오.”

정문을 지키던 무사가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무사는 두 사람을 향해 예를 표했다.

“무슨 일이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태도는 정중했지만 그건 용건을 밝히라는 명령이었다.

두 사람 중 한 명의 사내가 품 안에서 얄팍한 서찰을 꺼냈다.

그것은 총군사 영호준의 서명이 있는 서찰이었다.

무사는 흘깃 다른 방문자를 바라보았다.

너울이 달린 흑립을 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조금도 두려운 빛 없이 무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눈빛이 너울 너머로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렇군요. 확인했습니다.”

무사는 사내에게 서찰을 돌려주었다.

평소라면 너울을 걷고 얼굴을 보이라 했겠지만 무사는 그리하지 않았다.

총군사 영호준이 이들을 그대로 통과시키라고 이미 말해 두었기 때문이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무사는 뒤로 물러나 다시 자신의 임무로 되돌아갔다.

두 사람은 고개를 들어 창룡맹 총단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넓게 열린 정문으로는 항주의 사람들이 바삐 드나들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 긴장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이 아는 ‘다른 총단’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사박.

그들은 발을 옮겨 창룡맹 총단으로 들어섰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건물들이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졌다.

창룡맹 총단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맹주전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이상한 것은 그들을 불러 세우거나 막아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일하는 서기들과 무사들을 종종 지나치긴 했지만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일로 바쁘거나 혹은 휴식을 취하며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창룡맹 총단이 아니라 항주의 다른 거리로 잘못 들어선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사방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벅, 저벅.

두 사람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들이 총단 깊은 곳에 위치한 맹주전 앞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문사 차림의 한 청년이 그들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탁.

두 사람이 멈춰 섰다.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사이, 뒤에 있던 여인은 조용히 자신의 흑립을 벗었다.

사락.

너울이 사라지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조금 날카로운 눈빛의, 누구나 돌아볼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여인.

그녀는 바로 태평맹의 대외 총괄군사이자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운현이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군요. 비록 환영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러나 운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사박.

당설련은 그대로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운현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소저!”

운현은 깜짝 놀랐다.

비록 다른 사람은 없다지만 이곳은 바깥이다.

당문의 눈꽃이자 태평맹 대외 총괄군사인 그녀가 흙먼지를 아랑곳 않고 운현에게 극진한 예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운현은 급히 당설련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여인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운현은 당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당설련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 예(禮)는.”

고개를 숙인 채 당설련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대인께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그렇다.”

문득 객옹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이 고개를 돌리자 맹주전 앞에 서 있는 객옹이 보였다.

“너는 연아의 예를 받아 마땅하다. 연아는 너를 선택하는 대신 감히 너와 적대했으니까.”

객옹은 시선을 돌려 당설련을 내려다보았다.

무릎 꿇은 그녀를 보는 객옹의 눈빛은 사뭇 매서웠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옳아요.”

당설련은 말했다.

“제가 문왕에게 절명비를 건넨 일은, 비록 당문을 위해서라지만 잘못된 선택이었어요. 제가 너무나도 어리석었죠.”

운현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당설련이 문왕에게 절명비를 건넨 잘못은 그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은 운현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당설련이 고개를 들었다.

“대인께서 하고 싶으신 대로요.”

똑바로 운현을 쳐다보며 당설련은 말했다.

“모든 것은 제 결정이며 저의 책임이에요.”

스륵.

자신의 가슴에 하얀 손을 얹으며 당설련은 말했다.

“당문이 대인께 범한 모든 죄는 제가 감당하지요. 그러니 무엇이든 명하세요. 대인의 뜻에 무조건 복종하겠어요.”

그건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운현의 눈빛은 담담하기만 했다.

“조건을 전제한 것은 복종이 아니라 계약이라고 해야겠지요. 소저께서는 제게 원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운현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당설련이 그냥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당설련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복종이에요. 상대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을 계약이라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당설련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대인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뜻을 돌이킬 수 있어요. 저와 당문은 대인의 손에 운명을 맡긴 채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지요. 이것을 복종이라 하지 않고 무어라 할까요?”

운현이 무엇인가 약속하고 그것을 어긴다 해도 당문은 제재할 방법이 없다.

아니, 당문뿐만 아니라 현재 강호 무림의 그 어느 문파도 운현의 뜻을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계약이 아니라 복종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당문으로서는 말이다.

슥.

당설련은 고개를 숙였다.

“명하세요. 복종하겠어요. 무엇이든지.”

부탁의 말도, 애처로운 눈빛도 없었다.

그러나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은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어째서 모든 잘못을 소저가 감당하려는 것입니까?”

당설련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제가 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당문의 여인이니까요.”

당설련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제가 한 모든 일은 당문을 위해서였어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저는 당문의 여인이 아닌 적이 없어요.”

그녀의 말을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당문의 눈꽃, 차가운 독심을 품은 당설련이야말로 당문의 여인이 아니면 누구랴?

그러나 운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득.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운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저를 모욕하고 싶으신 건가요? 그렇다면 얼마든지…….”

“아니오. 모욕을 주고자 함이 아닙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분명 당문의 여인이 아니었던 적이 있습니다. 당문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었던 때가 말입니다.”

“대체 그게 무슨…….”

“당신은.”

당설련의 말을 끊으며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오래전 영호준 대협에게 당문의 모든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기물(奇物)을 주었습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독기를 억제하는 내력 운용법도 알려 주었지요.”

가녀린 당설련의 어깨가 움찔 경련했다.

당설련이 문왕에게 넘긴 절명비는 운현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지만, 운현을 구해 준 것은 놀랍게도 당설련이 과거 영호준에게 주었던 은침과 해독약이었다.

팔면 취선루에서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던 바로 그 해독약 말이다.

당문의 절명비를 해독할 수 있는 기물(奇物)이 당문 외에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

“그리고 그도.”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맹주전 앞에 멋진 미남자가 서 있었다.

슬픈 표정으로 당설련을 바라보는 그 사람은 바로 총군사 영호준이었다.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었고요.”

“흥.”

당설련은 조소를 흘렸다.

“과연 그럴까요? 그는 나를…….”

“그리고 듣다 보니 생각이 났습니다만.”

당설련의 말을 끊으며 운현은 말했다.

“소저의 모든 행위는 당문의 여인으로서 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무릎 꿇어야 할 사람은 소저가 아니라 마땅히 당문의 문주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모든 행위의 최종적인 책임자니까요.”

순간 당설련은 말을 잊었다.

그러나 운현의 눈빛은 진지하기만 했다.

‘아.’

당설련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운현의 말은 결코 농담도, 과장도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당문의 문주가 무릎 꿇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게다가 그 말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문의 문주, 당천벽을 무릎 꿇리겠다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하아.”

당설련은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운현은 물론 객옹도 움찔 놀랐다.

그러나 당설련은 담담하게 말했다.

“대인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 드리지요.”

차가운 미소가 당설련의 붉은 입술에 흘렀다.

그것은 바로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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