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화. 밀서(密書)
운현은 객옹과 함께 항주의 창룡맹 총단으로 돌아왔다.
높이 솟은 창룡맹 총단의 정문 앞에서 마차가 멈추고, 운현과 객옹이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총군사 영호준이 웃으며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 그리고 어르신.”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운현 역시 답례하며 영호준에게 물었다.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네. 잘 지냈습니다. 이제는 일할 사람도 많이 충원했고, 특히 맹주님께서 모용 소저 같은 인재를 영입해 주신 덕분에 제법 여유가 생겼습니다. 하하하.”
감찰어사 조관과 항장익은 북경으로 소환되었지만, 같은 일행이었던 진예림과 담소하는 일찌감치 관의 일을 내려놓고 창룡맹 업무에 전념하고 있었다.
총단 건물이 완공되면서 서기와 무사 들도 충분히 고용했고, 특히 모용미 같은 고급 인재가 들어온 덕에 영호준은 과중한 업무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총단으로 들어가시지요.”
영호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문을 지키는 무사들의 예를 받으며 세 사람은 창룡맹 총단으로 걸어갔다.
활짝 열려 있는 정문은 벌써부터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맹주인 운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늘 열려 있었던 것이다.
예전 운현이 바랐던 대로 말이다.
저벅, 저벅.
총단 내부의 건물들은 단아하고 멋스러웠다.
이전의 무림맹이 주로 위압적이고 장엄한 분위기를 풍겼다면 창룡맹은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을 주었다.
운현과 영호준의 취향이 일치한 결과였다.
아직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는 곳도 있었지만 총단의 기능 자체는 완벽히 갖춰진 상태였다.
“어르신들은 모두 가셨습니까?”
운현이 물었다.
그가 말한 어르신은 혈교의 토벌에 함께 했던 세가의 가주와 장로 들, 그리고 절정고수들이었다.
북경을 다녀오는 여정이 짧지 않았으니 이미 각자의 세가와 문파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도 안 가셨습니다.”
“네?”
운현의 반문에 영호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다들 항주에 계십니다. 예전 임시 총단으로 사용하던 저택에요.”
“아니, 가주님들이나 장로님들 전부 다요?”
“네. 능 여협과 금 여협, 심지어 북해일문의 빙설 여협마저 있습니다. 장로님들과 가주들께서는 어차피 급할 것도 없다고 하시더군요.”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급할 것도 없다니요? 설마 마교가 각 문파와 세가에 침투하려 한 일을 아직 모르신단 말입니까?”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벌써 다 말씀드렸지요.”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알아서 잘들 대처하고 있는데 본인들께서 가 봤자 뭐 변하는 게 있겠냐는 겁니다. 젊은 세대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하고 있으니 경험도 쌓게 할 겸 어른들은 여기서 조용히 있는 게 좋다는 말씀도 하시더군요.”
한마디로 장로와 가주들이 이곳을 떠나지 않고 느긋하게 지내고 있다는 뜻이다.
“대체 왜…….”
운현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마교의 위협이 실재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 고작 그런 이유로 이곳에 머물고 있다니 말이다.
“그놈들이 여기 있는 것은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문득 객옹이 말했다.
운현이 고개를 돌리자 객옹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은 일개 문파나 세가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산 빠른 가주와 장로 들이 혈교를 토벌하며 무엇을 느꼈을 것 같으냐?”
운현을 지긋이 쳐다보며 객옹이 말했다.
“창룡맹은, 아니 너는 현재의 상황을 좌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자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들이 여기 있는 것이지.”
객옹의 말뜻을 운현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거대 문파의 장로와 세가 가주 들의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그러나 그 거대 문파와 무림 세가 들을 하나로 움직이게 하는 힘은 오직 창룡맹의 맹주, 운현에게만 있다.
이미 혈교를 토벌하며 모든 가주와 장로 들에게 신뢰를 얻었으며, 그 능력마저 입증하지 않았는가?
산전수전 다 겪은 가주와 장로 들이 객옹의 말처럼 판단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객옹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제법 널 귀찮게들 할 거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귀찮게라니요?”
객옹은 대답 대신 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운현은 깨달았다.
세가의 가주와 절정고수 들이 원하는 것은 비무가 분명했다.
제갈가의 가주인 제갈명은 노골적으로 비무를 원했고, 북해의 빙설 역시 서슴없이 나서지 않았던가?
젊은 절정고수인 금화영 같은 경우에는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형편이고 말이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비무라면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객옹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비무만이 아닌 듯했지만, 객옹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세 사람은 창룡맹 맹주 집무실 앞에 이르렀다.
“맹주님.”
총군사 영호준이 문득 말했다.
“들어가시기 전에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당문에서 맹주님께 밀서가 도착해 있습니다.”
운현은 물론 객옹마저 걸음을 멈췄다.
혹시나 당문이 무슨 일을 저질렀나 싶어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영호준이 말을 이었다.
“밀서를 가져온 자는 며칠 전부터 계속 항주 시내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맹주님의 답변을 받아 가기 위해서지요.”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십니까?”
“아직 모릅니다. 밀서를 보시면 자연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영호준은 잠시 말을 끊었다.
“당문의 명운을 좌우할 만한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객옹의 얼굴이 굳었다.
입을 다문 영호준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제독 총병관 유붕걸은 완전히 변해 버렸다.
마교의 유인 작전에 빠져 대패하고 돌아온 유붕걸에게 이전의 거만하고 위압적인 모습은 없었다.
난주로 귀환할 당시에는 멍하니 초점 없는 눈빛에 투구마저 잃어버린 채였다.
함께 돌아온 관군 역시 채 일만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나중에 돌아온 낙오병들까지 합하면 일만 삼천에 이르렀지만, 절반을 넘게 잃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대패(大敗)가 아닐 수 없었다.
살아 돌아온 관군의 상태도 심각했다.
조금이라도 다친 자들은 상처가 썩어 들어갔고, 살아남은 자들은 악몽에 시달렸다.
난주는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그리고 패전의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힌 제독 총병관 유붕걸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으하하하. 어서 마시거라! 어서!”
제독 총병관 유붕걸은 크게 취해 있었다.
패배하고 돌아온 그는 자신의 관사로 사용하는 대저택에서 연일 연회를 열었다.
술은 물론이고 악사들과 창기들까지 불러, 말 그대로 질펀한 향락의 자리를 연 것이다.
동석한 지역 유지들의 표정은 씁쓸했다.
지금 이런 연회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우.”
술잔을 매만지고 있던 누군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만취한 유붕걸을 흘깃 쳐다본 후, 옆에 앉은 사람에게 조용히 말했다.
“백성들이 난주를 빠져나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소?”
“듣다 뿐이오? 내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다오.”
옆에 앉은 중년인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시장의 상인들도 짐을 꾸리고 있소. 난주의 성벽이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아직 많기는 하지만.”
그는 유붕걸을 쳐다보았다.
“정작 군을 지휘하는 제독이 저런 모습이니……, 원.”
눈앞에서 창기들을 희롱하고 있는 유붕걸 역시 난주의 성벽을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패하고 돌아온 유붕걸은 심리적으로 완전히 위축되어 버렸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난주의 성벽 안에서 한 발도 나가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난주만 지키면 ‘민란의 추종자’들이 서안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서 말이다.
게다가 병부 좌시랑 유호기가 물자와 군을 증원하겠다고 보낸 서찰은 유붕걸의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그러엄! 나야말로 대단한 사람이지! 수만의 관군이 내 명령 하나에 움직이고, 중앙 조정도 내게 협조를 아끼지 않는데 어찌 대단한 사람이 아니겠느냐? 하하하하.”
제독 총병관 유붕걸은 창기들 중 한 명을 안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유지들은 혀를 차거나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패배하고 돌아온 유붕걸은, 이제 만취하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조차 없다는 것을 말이다.
탁탁탁.
그때 누군가 연회장으로 뛰어왔다.
군복을 입은 그는 제독 총병관 유붕걸을 보좌하는 부사관 중 한 명이었다.
척.
만취한 유붕걸에게 정중하게 군례를 표한 부사관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성 밖에 적의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손님으로 앉아 있던 유지들은 물론 창기들도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취한 유붕걸은 그저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래서?”
부사관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곧 다시 말했다.
“명을 내려 주십시오.”
“……없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유붕걸이 말했다.
만취한 그는 부사관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따로 내릴 명은 아무것도 없다. 경계 책임자더러 알아서, 끄윽. 대처하라고 해. 성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말고.”
유붕걸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부사관이 멍하니 서 있는데 유붕걸은 창기의 앞섶에 손을 넣었다.
“흐흐, 네 살결이 참으로 곱구나. 오늘은 네가 나와 연분을 쌓아 보자꾸나.”
“아이, 참. 어르신.”
창기가 교태를 부리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유붕걸은 더욱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다 문득, 유붕걸이 눈을 들었다.
연회장이 조용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사관을 향해 있는 것을 본 유붕걸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빨리 꺼지지 않고 뭐해!”
“네, 네!”
부사관은 급히 군례를 올린 후 자리를 떴다.
악사들이 다시 연주를 시작하고, 연회장엔 창기들의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유지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유붕걸 제독의 명을 전해 들은 군관은 어이가 없었다.
알아서 대처하되 절대 성 밖으로 나가지 말라니?
일단 명령의 앞뒤가 안 맞는 데다가, 절대 성 밖에 나가지 말라는 건 그냥 적이 움직이는 대로 지켜보라는 말이 아닌가?
고민하던 군관은 유붕걸과 함께 온, 우군도독부 소속 양천만 장군의 막사로 달려갔다.
“장군. 적들의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수상하다니, 어떻게 말인가?”
우군도독부 소속의 양천만은 여러 번 실전을 경험한 노련한 장군이었다.
비록 그의 진언이 유붕걸 제독에게 받아들여진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저들이 야음을 틈타 난주를 우회하여 서안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허나 제독께서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양천만 장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성벽에 기를 올리고 불을 피우게. 마치 당장이라도 출정할 것처럼 말일세.”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들을 향해 화포도 쏘게. 최대한 요란하게.”
“허나 거리가 멀어서 닿지 않을 것입니다.”
군관의 말에 양천만은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네. 우리가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 족하니까.”
“그래도 저들이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내가 출진하겠네.”
양천만 장군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제독께서도 이해하실 걸세. 저들이 서안으로 향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하니까.”
불안해하는 군관에게 양천만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걱정 말게. 이번 움직임은 아마도 우리의 대비 태세를 확인하려는 것일 테니까. 우리를 뒤에 두고 서안으로 향하는 건 저들에겐 자충수나 마찬가지야.”
마교의 군세가 난주를 우회하여 서안으로 향하겠다면 양천만 장군으로서는 오히려 바라는 바다.
서안의 관군과 연계하여 앞뒤에서 저들을 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마교도 바보는 아니다.
아니, 지난번 관군을 끌어들인 모습을 보면 오히려 교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쨌든 저들이 서안 방면으로 향하는 건 막아야 하네. 만일의 경우라는 것이 있으니 말일세.”
“네! 알겠습니다.”
군관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군례를 올리고 막사를 나갔다.
그의 표정은 들어올 때보다 한결 가벼웠다.
탁탁.
군관이 자리를 뜨고 홀로 남은 양천만은 긴 탄식을 흘렸다.
“허어,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그건 군을 이끄는 제독의 명령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난주를 지키는 건 쉽지 않겠구나.”
아무리 성벽이 굳건하고 병사가 많다 해도 지휘관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저 모래성 안의 오합지졸일 뿐이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평범한 농민군처럼 자신들을 유인하던, 그러다 갑자기 배후에서 튀어나온 괴물 같은 마인들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노련한 양천만 장군조차 모골이 송연할 정도이니, 연줄을 타고 승진한 유붕걸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나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책무를 방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양천만 장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쿵, 쿵.
성벽에 설치한 화포가 불을 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양천만의 근심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