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화. 급변하는 전황
북경을 떠난 운현은 객옹과 함께 항주로 향했다.
남쪽으로 쭉 뻗은 관도를 질주하는 마차 속에서,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은이 무어라 하더냐?”
문득 객옹이 물었다.
운현은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별말은 없었습니다. 다만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더군요. 제가 일대상인과 결착을 지을 때가요.”
객옹은 코웃음을 흘렸다.
“흥, 이제는 신선 흉내라도 내려나 보군. 이미 다 아는 것을 가지고.”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객옹의 불평은 오히려 그가 일은을 각별히 생각한다는 증거였다.
본래 객옹은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무관심하니까 말이다.
“예전에는 마교를 어떻게 막았다더냐?”
객옹이 다시 물었다.
과거 마교를 상대한 사람은 일은이었다.
“당시 마교에서는 마군을 일으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더군요.”
마군(魔君)은 마교의 군세를 이끄는 존재다.
공동파의 장로인 옥로 진인은, 마군이 마병을 이끌 때에는 천하에 당할 자가 없을 정도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실제로 마교는 마군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일은이라는 존재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지요.”
이어질 말은 객옹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객옹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은이 마군을 쓰러뜨렸군.”
“네.”
혈마인이 혈교의 핵심 전력인 것처럼 마교의 핵심은 마군이었다.
일은에 의해 마군이 쓰러지자 마교는 새로이 마병을 일으킬 여력조차 잃고 오랜 침묵에 들어갔다.
혈마인을 천일검 능세영에게 잃은 혈교가 지금껏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지금은? 역시 마군을 일으킨 것이냐?”
“조금 다른 듯합니다.”
“다르다고?”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한 소수의 마군을 깨우는 대신, 마병들을 아주 많이 일으킨 것 같다고 하더군요. 무림으로 비유하면 한 명의 고수 대신 하급 무사들을 많이 받아들인 셈이 되겠지요.”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마교의 군세가 난주를 위협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확실히 그럴듯한 말이었다.
“허나 그리하면 한계가 명확할 터인데?”
하급 무사가 많은 문파는 수적인 우세를 기반으로 빠르게 세를 키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성장은 곧 한계에 봉착한다.
하급 무사들만으로는 고만고만한 지역 문파를 벗어나기 힘든 데다가, 다른 문파와 분란이라도 터지면 문제가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수적 우세만을 믿고 강하게 나가기도 힘들고, 자칫 상대편에 고수라도 있다면 오히려 문파의 존립마저 흔들릴 수 있었다.
그래서 거대 세가나 문파 들이 고수를 키우려고 전력을 다하는 것 아닌가?
“그렇기에 마교도 난주를 노리는 것입니다. 일단 난주를 차지하면 감숙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마교의 군세가 난주를 노리는 것은 어찌 보면 정확한 판단이었다.
감숙의 지형 특성상 난주를 얻으면 감숙 전체가 마교의 손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난주에 전력을 집중하여 관군의 진입을 막는 동안, 뒤에서는 감숙 전역을 지배하며 힘을 기르려 하는 것이겠지요.”
좁고 긴 하서주랑(河西走廊)의 남쪽 입구인 난주에 전력을 모은다면 마교가 관군의 진군을 막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사이 마교는 중앙 조정에서 단절된 감숙 전역을 마음대로 지배하며 힘을 기를 수 있다.
마교로서는 그야말로 최적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듯하군.”
객옹이 눈살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허나 황실이 그걸 가만히 놔두겠느냐?”
마교의 움직임은 감숙에 마교만의 독립적인 영역을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실로서는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가만히 있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겠지요. 그렇기에 마교의 이런 움직임에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어떤 전제 말이냐?”
“천하가 혼란스러워질 것이라는 전제지요. 황실이 마교를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객옹의 표정이 굳었다.
황실이 마교를 신경 쓸 수 없을 정도의 혼란이라니, 정사대전을 겪은 객옹조차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혼란은 아마도 일대상인이 일으킬 테고요.”
일대상인이 천하를 혼란케 하면 마교는 더욱 손쉽게 힘을 기를 것이다.
본디 마교는 사람들의 피폐해진 마음을 파고드는 것이니 말이다.
“으음.”
객옹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천하를 어지럽힐 혼란이라…….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일대상인 정도라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일대상인은 이미 문왕을 통해 강호 무림을 어지럽혔다.
이번 혈교와 마교의 발흥 역시 그의 의도였다.
일대상인은 실제로 천하를 크게 혼란케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또 다른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운현의 말에 객옹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라는 전제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 모두는 제가 일대상인을 막지 못한다는 전제하에서만 성립하는 것이지요.”
“흠.”
객옹은 웃음을 머금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 표정에는 운현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따각, 따각.
두 사람을 실은 마차는 관도를 따라 내달렸다.
운현은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보았다.
관도의 풍경이 운현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지만, 운현의 마음은 머나먼 감숙의 난주를 향하고 있었다.
***
감숙성, 난주.
제독 총병관 유붕걸은 강제로 징발한 커다란 저택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기름진 요리와 진귀한 술이 놓여 있었고, 좌우로 줄지어 앉은 사람들 앞에도 각기 술과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이 자리에 와 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날카로운 인상의 유붕걸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께서 조정의 일에 이처럼 협조를 아끼지 않으시니 이 유붕걸은 참으로 감동하였소이다. 하하하.”
유붕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앉아 있는 이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이곳 난주의 유력가와 부호 들인 그들은, 이미 유붕걸로부터 재산의 반을 내놓으라는 통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지역 유지로서 관의 일에 협조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유붕걸의 요구는 너무나도 과했다.
당연히 유지들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리 걱정들 마시오.”
유붕걸이 빙긋 웃었다.
그는 유지들을 바라보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여러분이 조정의 일에 협조적인 한, 지난번 같은 불행한 사고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테니 말이오.”
그 말에 유지들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제독 총병관 유붕걸이 난주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성벽의 보수도, 군사들의 재배치도 아니었다.
난주의 모든 권한을 손에 쥔 그는 지역 유지와 부호 들을 불러 놓고 재산의 반을 ‘자발적으로’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난주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관 대인’은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을뿐더러 유붕걸에게 대놓고 화를 냈다.
그리고 며칠 후, ‘관 대인’의 저택이 불타고 그 식솔들은 무참히 도륙당했다.
온 난주가 충격에 빠졌지만 조사 결과라고 발표된 것은 어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몰래 난주에 숨어들어 온 ‘민란 추종자’들이 일으킨 일이라는 것이다.
증거로 범인들의 수급까지 내어 걸렸지만 유지들 중에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주의 모든 권한을 한 손에 쥔 제독 총병관 유붕걸이 유지들에게 본때를 보인 것이다.
“어이쿠, 이거 다들 시장하실 텐데 내가 너무 말이 길었구려. 자자, 어서들 드시오. 전시(戰時)라 기녀를 부르지 못해 유감이오. 하하하.”
명목상 이것은 제독 총병관 유붕걸이 지역 유지들을 접견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누가 봐도 연회가 분명했다.
단 한 사람, 제독 총병관 유붕걸만이 즐길 수 있는 연회 말이다.
“한 가지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만…….”
유지 중의 한 사람인 ‘장 대인’이 말했다.
유붕걸은 술잔을 든 채 빙긋 웃었다.
“말씀하시오.”
“지금 난주를 향해 진을 친 자들은 평범한 농민이 아니라 마교의 군세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실제로 마인들을 목격한 자들도 있고 말입니다.”
그 말에 다른 유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 밖에 진을 친 ‘민란 추종자’들이 마교의 군세라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니었다.
“게다가 공동파에서도 이 일을 심각히 여겨 장로들까지 보냈는데 유 제독께서 물리치셨다 들었습니다.”
장 대인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공동파는 대대로 감숙에서 존경받아 온 문파입니다. 그러니 부디 다시 한번 고려를…….”
탕.
말하던 장 대인이 움찔했다.
술잔을 내려놓은 유붕걸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첫째, 이것은 마교 따위가 아닌 민란이오. 차후 어떤 연유로든 마교라는 말이 나올 경우 결코 좌시하지 않겠소.”
유붕걸의 눈빛은 흉흉했다.
웃음이 사라진 그의 표정은 살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둘째, 하찮은 도사 나부랭이들이 어디서 감히 군의 일에 참견하려 한단 말이오? 황상의 성은에 빌붙어 살고 있는 것들이 주제를 모르고 끼어든다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제독 총병관으로서 엄히 징계할 것이오!”
그 말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고, 말을 꺼낸 장 대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쪼르륵.
유붕걸 옆에 있던 시녀가 술잔을 채웠다.
시녀 역시 겁을 먹었는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유붕걸은 시녀를 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뭐, 그리 염려할 것 없소.”
시녀의 봉긋한 가슴을 바라보던 유붕걸은 눈을 돌려 유지들을 향했다.
“이제 곧 성문을 열고 나아가 저 참역한 무리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참이오. 물론, 여러분의 협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오.”
유붕걸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유지들의 표정은 복잡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도 있었지만 여전히 불안한 표정인 이들도 있었다.
제독 총병관 유붕걸이 감숙, 사천, 섬서의 세 군을 총괄한다지만 감숙 국경 방어군을 제외하면 사실상 사천과 섬서의 관군뿐이다.
상대가 평범한 농민들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난주의 성벽 밖으로 나가는 건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마교의 군세라는 소문까지 도는 ‘민란 추종자’들이 지금까지 가만히 있는 건 분명 난주의 성벽 덕분일 테니까 말이다.
“아니, 다들 드시지 않고 뭐하시오?”
생각이 복잡한 유지들을 향해 유붕걸이 말했다.
“설마 나 유붕걸이 주는 술은 마시지 못하겠다는 뜻이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장 대인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덜컹.
“여러분! 유 제독의 승전을 미리 축하하며 다 같이 잔을 듭시다! 유 제독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유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컹, 덜컹.
“축하드립니다!”
“유 제독의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유지들은 혹여 유붕걸의 눈 밖에 날까 싶어 힘껏 외쳤다.
싸우기도 전에 승전을 축하하는 해괴한 광경이었지만 유붕걸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장 대인의 말이 참으로 옳소. 승전의 확신이 없고서야 어찌 승리를 쟁취할 수 있겠소? 군의 사기는 승패에 절대적인 요인이니 말이오.”
슥.
유붕걸은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지들을 향해 잔을 뻗었다.
“나 유붕걸,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도록 하겠소. 그때는 이런 것 말고 정말 제대로 된 연회를 즐겨 봅시다! 하하하.”
유붕걸은 호탕하게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유지들 역시 들고 있던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이 자리를 마련하는 데 드는 비용조차 유지들이 댄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들어갈 돈을 생각하며 유지들은 애써 술을 목으로 넘겨야 했다.
***
호언장담한 것과 달리 제독 총병관 유붕걸은 쉽게 군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유지들에게 계속 ‘자발적 협조’를 강요했고 접견을 빙자하여 날마다 연회를 열었다.
물론 그 연회의 경비는 모두 난주의 유지들이 대야 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시간을 끌던 유붕걸은 갑작스럽게 출정을 명했다.
마치 지금껏 때를 기다린 것처럼 말했지만 유붕걸의 내심은 달랐다.
‘이따위 변방 구석에서 언제까지 있을 순 없지.’
왕 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지만 변방인 이곳 난주가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이번 난리를 평정하고 황제에게 승전보를 전하고 나면 화려한 북경의 삶을 누릴 것이라 생각하니 하루라도 빨리 난주를 떠나고 싶어졌다.
유지들을 쥐어짜도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는 판단 역시 유붕걸의 결정에 한몫을 했고 말이다.
쿠르릉, 쿠르릉.
화포를 실은 마차의 묵직한 소리와 함께 제독 총병관 유붕걸은 군을 이끌고 당당하게 난주를 나섰다.
감숙의 국경 방어군이 빠진 데다가 사천과 섬서에서도 전군을 동원한 것은 아니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붕걸의 군세는 삼만에 달했다.
“와아아!”
“만세! 만세!”
무장한 삼만 관군의 위용은 그야말로 엄청나서 난주의 백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환호를 내질렀다.
다들 곧 난리가 끝나리라 여겼고 제독 총병관 유붕걸 역시 승전을 확신했다.
그러나 며칠 후 전해 온 소식은 모두의 기대를 배신하고 말았다.
삼만 관군은 마교의 계략에 빠져 어이없이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패전의 충격이 난주를 휩쓸고,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