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대화
개시장에서 풀려난 좌시랑 유호기는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병부의 좌시랑이 개시장에 묶여 있었다는 소문이 화제가 되지 않을 리 없었다.
비록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관원들 사이에서는 이번 일이 사방팔방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 비웃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서 유호기는 제대로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사흘째 되는 날.
유호기는 충혈된 눈으로 마차를 타고 북경 중심가의 한 저택으로 향했다.
언제나 타던, 사방이 열린 마차 대신 휘장을 쳐 안이 보이지 않도록 철저히 가린 마차였다.
그 마차가 향한 곳은 바로 예부 상서, 장위의 저택이었다.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장위의 서재에서 병부 좌시랑 유호기가 분을 가득 담은 채 말했다.
“감히 감찰어사 따위가 병부의 좌시랑을 욕보이다니요! 이는 황상의 권위에 거스르는 역모나 다름없습니다! 내 그 일만 생각하면……. 크흑.”
원통하고 분한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유호기는 눈물마저 글썽였다.
그러나 앞에 앉은 예부 상서 장위는 눈살을 찌푸렸다.
“쯧, 내 자네의 이야기는 들었네만…….”
장위는 자신의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예부는 나라의 외교와 교육을 총괄하는 곳이다.
그곳의 수장인 예부 상서 장위는 좌시랑 유호기와, 감숙으로 출정한 유붕걸이 속한 계파의 가장 큰 어른이었다.
“그래서 어찌하겠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이 일을 공론화할 수도 없지 않나?”
“공론화라니요! 절대 안 됩니다!”
유호기는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당한 치욕을 조정 대신들이 다 알게 된다니, 그랬다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내 반드시 그놈을…….”
유호기는 운현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천참만륙을 해도 시원치 않을 정도였다.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유호기는 놀란 표정으로 장위를 쳐다보았다.
“어르신! 한낱 감찰어사 따위가 박 공공의 위세를 믿고 조정 대신의 저택에 함부로 침입했습니다! 게다가 무력으로 저를 욕보이기까지 했으니 이는 마땅히 참형에 처해야…….”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가?”
장위의 차가운 목소리가 유호기의 말을 끊었다.
눈살을 찌푸린 장위는 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박 공공이 도찰원의 직위를 내려놓았다 하나 그는 여전히 동창 병필태감일세.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처분을 기다린다지만 황상께서는 아직도 그를 신임하고 계시고.”
박 공공을 병필태감에서 파면하고 벌을 주어야 한다는 상소는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노년의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본래 환관 조직의 일에 대해서는 조정의 대신들도 함부로 관여할 수 없다지만, 사실은 황제가 여전히 박 공공을 믿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대로라면 박 공공이 언제 다시 권세를 쥘지 모르네. 지금은 이 나라를 망치던 박 공공을 완전히 쫓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야.”
탁.
예부 상서 장위가 서탁을 치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 감찰어사 따위의 행위를 문제 삼아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게다가 박 공공은 이미 도찰원과 무관하지 않은가!”
유호기는 움찔했다.
하지만 복수의 의지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우선 그 감찰어사를 파면하는 것만이라도…….”
장위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어떻게 말인가?”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장위는 말했다.
“그 감찰어사는 황상의 성지(聖旨)에 따라 직접 임명된 자일세. 그를 파면하자는 건 황상의 판단에 먹칠을 하는 것과 같네. 지금 황상의 심기를 어지럽혀서 대체 무엇을 얻겠느냔 말이야!”
장위의 목소리는 노기마저 띠고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되면 그 감찰어사가 가만있을 것 같은가? 자네의 비리를 낱낱이 적어서 황상께 올릴 걸세! 그게 바로 그자가 받은 특권이니까.”
탕.
장위는 다시 한번 서탁을 내리쳤다.
“그러다가 혹 그 틈을 타서 박 공공이 다시 기세를 얻어 치고 올라오면 어쩌려고!”
운현은 특별 감찰어사다.
보고도 필요 없고 상급 기관의 감독도 받지 않으며 언제 어디서든 초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 운현이 황제에게 직접 이 일을 고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황제는 여전히 박 공공을 믿고 있으니 말이다.
“저, 저는 비리 같은 건…….”
유호기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장위의 표정은 싸늘했다.
“내게도 말이 들어올 정도인데, 감찰어사가 모를 것 같나?”
유호기는 말문이 막혔다.
재물과 이권을 얻기 위해서라면 권세를 휘두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자신이다.
처첩도 많이 들였고 쌓아 온 재산도 대단히 컸다.
관리로서 해서는 안 될 행위였지만 유호기는 그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 재산들이 지금껏 유호기를 지켜 준 데다가, 능력이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 건 멍청한 짓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나라를 위해서…….”
유호기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장위 앞에 놓인 작은 함을 힐끔 쳐다보는 건 잊지 않았다.
유호기가 장위에게 바친 그 함에는 귀한 진주가 들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크흠.”
아니나 다를까?
장위는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돌렸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확실한 공을 세워 황상의 신임을 얻는 것일세. 그렇기에 자네의 역할이 중요하고.”
짐짓 엄한 표정으로 장위가 말했다.
“감숙의 민란은 어찌 되고 있나?”
“걱정 마십시오, 어르신.”
유호기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독총병관 유붕걸이 알아서 잘 할 것입니다. 하찮은 것들의 민란 따위는…….”
말하던 유호기가 순간 흠칫했다.
자신의 애첩 채홍이 마인으로 변한 끔찍한 모습이 눈앞을 스쳤기 때문이다.
“크흠, 민란 따위는 군이 나서기만 해도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하지만 장위의 표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며 장위는 유호기를 노려보았다.
“……그 감찰어사가 무어라고 말하던가?”
“네?”
유호기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자가 왜 자네를 찾았느냔 말이야. 영웅맹을 무너뜨린 자가 그저 모욕이나 하자고 그런 짓을 벌일 리가 있겠나? 당연히 감숙의 일 때문이 아니겠는가!”
장위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박 공공의 복수라면 유호기가 아니라 차라리 예부 상서인 장위를 찾았어야 했다.
유호기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 그게. 민란 뒤에 마교가 있다고…….”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마교’는 박 공공에게 책임을 돌리기 위해 자신들이 묻어 버린 단어였으니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감숙으로 떠난 유붕걸에게 지원을 더 보내게.”
장위가 조용히 말했다.
“원군도 편성하고 군량도 넉넉히, 아니 넘치도록 보내. 화포든 뭐든 필요한 건 전부 다.”
“허, 허나 그러면 너무 많이…….”
“차라리 많은 게 낫지.”
굳은 목소리로 장위는 말을 이었다.
“실패하는 것보다는 말일세.”
장위의 눈빛은 서늘하기까지 했다.
유호기는 즉시 고개를 조아렸다.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어르신.”
장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후방에서 아무리 지원을 많이 보낸다 해도, 과연 제독총병관 유붕걸이 그것을 활용할지는 알 수 없었다.
감숙의 난리에 대한 유붕걸의 인식은 좌시랑 유호기와 똑같은 ‘민란’이었기 때문이다.
“한 치의 실수도 없도록 하게.”
장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번 난리를 진압하게. 그리하면 내 자네의 공을 결코 잊지 않을 걸세.”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유호기는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이대로 운현을 놓아두어야 한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박 공공이 황상의 신임을 잃고 완전히 쫓겨나면.”
장위는 유호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감찰어사 한 놈 따위 파면하는 것이야 무어 그리 어렵겠는가? 그다음엔 주리를 틀건, 목을 쳐 효수를 하건 상관없겠지.”
유호기의 표정이 순간 환해졌다.
그는 장위를 향해 거듭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유호기를 바라보는 장위의 시선은 차가웠다.
공을 잊지 않겠다고 했지만 부패하고 무능한 자와 같이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유호기 같은 자는 이용하기 편하지만 자칫 흠집이나 거침돌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앞에서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유호기를 보며 장위는 미소를 머금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이자, 황제를 대리하여 육부를 총괄하는 내각대학사의 지위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
황금빛 이중 지붕이 햇살 아래 반짝이고 붉은 건물이 위엄을 뽐냈다.
그 장엄하면서도 익숙한 모습을, 운현은 찻잔을 쥔 채 담담히 쳐다보고 있었다.
“혈교를 무너뜨렸더군.”
사일천이 말했다.
창룡전의 유일한 학사이자 ‘일은’이기도 한 사일천은 찻잔의 온기를 음미하며 운현을 쳐다보았다.
“무사해 보이니 다행일세.”
운현은 빙긋 웃었다.
“천만에요.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래전, 마교와 혈교의 발흥을 막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혼자 한 일도 아닌데 감사는 무슨.”
사일천은 담담하게 말했다.
차를 음미하는 그의 모습은 깐깐한 선배 학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게다가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네. 신경 쓸 것 없네.”
“그래도 감사합니다.”
진심을 담아 운현이 말했다.
사일천은 피식 웃었지만 눈가에 어리는 기쁨은 숨기지 못했다.
“혈교에서는 뭐 특별한 일이 있었나?”
“특별하다면야 전부 특별합니다만…….”
애초에 혈교라는 상황 자체가 범상치 않은 일이다.
혈인부터 혈마인까지 특별하지 않은 일이 무엇이 있을까?
“마검이 돌아왔다는 말을 하더군요.”
“마검?”
사일천이 관심을 보였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검이 없으니 이제 마검이 깨어나는 것을 막을 자는 없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혈마가 현신할 것이라 하던가?”
“그렇습니다.”
사일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혈마의 현신이라,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로군. 이 역시 때가 가까이 왔다는 뜻이겠지.”
운현의 눈동자가 빛났다.
“때라니요?”
“별것 아니네. 그저 내 오랜 의무가 끝나는 때를 말하는 것일세.”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사일천은 말했다.
“자네가 일대상인과 결착을 지을 때를 의미하기도 하고.”
사일천의 표정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회한이기도 하고, 혹은 그리움이기도 했다.
“어르신께서는 누구십니까?”
운현이 물었다.
사일천은 대답 대신 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자네에겐 말해 줘도 상관없겠지. 이미 세계의 진실을 보았으니까.”
그건 난데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사일천이 그런 말을 하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복룡복마검에서 보았던 거대한 공허 때문이 분명했다.
“나는 한 사람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위해 남은 자일세.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다른 세상에 있지.”
그의 말은 마치 도인이나 선인 같았다.
숨어서 세상의 질서를 지키는 그런 존재들 말이다.
“다른 세상이라면…….”
“물론 돌아가셨다는 뜻은 아닐세.”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일천은 말했다.
“자네도 이제는 알지 않는가? 이 세상은 수많은 세계의 한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일세.”
그는 찻잔을 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가능성이지.”
사일천의 말은 운현의 가슴에 깊이 박혀 들었다.
이 세상이 아름답고 귀한 것은 바로 빛나는 인연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 환관과 의형 일충현, 그리고 의제 독고랑과 지금도 운현의 옆을 지키고 있는 이들까지, 그 소중하고 귀한 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랴?
“네, 그렇습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그러니 반드시 지켜야겠지요.”
사일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뜻도 그러하다네.”
그가 말한 ‘우리’는 다른 세상에 있다는, 사랑하는 이들이 분명했다.
운현은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황궁의 바람이 옷깃을 일렁였지만 두 사람의 가슴은 따뜻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