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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86화 (486/530)
  • 486화. 하늘이 보는 것[天視]

    좌시랑 유호기는 이를 악물었다.

    ‘병부의 좌시랑으로서 할 말이 그것뿐이냐’는 운현의 질책은 부끄러움보다는 분노를 불러왔다.

    “그래! 내가 바로 병부의 좌시랑이다!”

    입술까지 푸들푸들 떨며 유호기는 말했다.

    “군무를 총괄하는 것은 나의 권한이며 군사를 동원한 것 역시 나의 결정이다! 내가 가진 힘을 내가 뜻대로 행사하거늘, 네가 무엇이라고 감히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냐!”

    펄럭.

    유호기는 운현을 향해 강하게 손을 뻗었다.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 모습은 사뭇 당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운현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눈앞에서 마인의 정체를 확인하고서도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흥!”

    유호기는 코웃음을 쳤다.

    “마인이라니? 마인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한때 그의 애첩이었던 마인의 악취가 아직도 주변에 자욱했지만 유호기는 뻔뻔했다.

    “나는 모른다! 그러니 네가 말하는 그 마인이라는 것을 데려오너라. 그래야 나도 조정의 대신들에게 증거를 보일 수 있지 않겠느냐?”

    유호기는 조소를 머금고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조용히 그 시선을 맞받았다.

    “당신의 그 이기적인 욕심과 교만 때문에 수많은 군사들과 난주의 백성들이 죽을 것을 알고도 하는 말입니까?”

    “하!”

    유호기는 헛웃음을 흘렸다.

    “군사는 본래 목숨을 바치는 자들이다. 위험 따위에 얽매여서야 어찌 전장에서 죽을 수 있겠느냐? 내가 저들에게 공적을 세울 기회를 주었으니 오히려 감사해야지! 그리고 뭐? 백성들이라고?”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유호기는 말했다.

    “다리 다섯 달린 돼지는 드물어도 다리 둘 달린 사람은 천하에 무수하다. 무지몽매한 백성들 따위, 돼지만도 못한 것들 아니더냐? 난주가 아니라 감숙 전체가 죽어 나간다 해도 천하의 안위는 끄떡도 없느니라!”

    유호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것이 유호기의 평소 생각임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어리석군요.”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벅.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운현이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좌시랑의 권한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 황상께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황상을 천자(天子)라 하는 것은, 그 권위 또한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지요.”

    저벅.

    운현은 유호기를 향해 걸어왔다.

    유호기는 움찔했다.

    그러나 운현은 멈추지 않았다.

    “이르기를, 하늘은 다만 백성이 보는 것을 보며 백성이 듣는 것을 들을 뿐이라 하였습니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

    탁.

    유호기의 바로 앞에서 운현은 멈춰 섰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이 돼지보다 못하다 생각하는, 얼마든지 죽어도 상관없다는 바로 그 백성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늘이란 말입니다.”

    “헛소리!”

    유호기는 악을 썼다.

    “백성의 하늘은 그저 밥일 뿐이다! 먹이만 주면 꿀꿀거리며 진창을 뒹구는 것들이 바로 백성이란 말이다!”

    화륵.

    운현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而民以食爲天]’라는 말은 유명한 고사(故事)였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군주가 마땅히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백성들이 얼마나 절박한지를 깨우쳐 주는 선인의 충언을 감히 그따위로 해석하다니…….”

    순간 유호기는 운현의 눈빛이 자신을 꿰뚫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허억.’

    유호기는 어깨를 떨었다.

    당당하게 운현의 시선에 맞서고 싶었지만 그건 마음뿐, 유호기의 온몸은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었다.

    “나, 날 어찌하려는 것이냐?”

    “당신이 스스로 힘 있다 말하며 자신의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으니.”

    유호기를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나도 내 뜻대로 나의 힘을 사용하겠습니다.”

    털썩.

    유호기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운현은 강호 무림의 고수다.

    게다가 주위엔 죽은 듯 쓰러진 사람들 뿐, 운현이 유호기를 죽이려 작정한다면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 감히 네가…….”

    주저앉은 유호기는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그러나 부들부들 떨리는 팔다리는 주인의 뜻을 따르지 못했다.

    스릉.

    운현은 검을 뽑았다.

    “머, 멈춰라! 나는 병부 좌시랑 유호기다! 네가, 네가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그건 당신이 걱정할 바가 아닙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유호기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면 병부의 좌시랑도 아니겠군요. 죽은 시체는 관직을 가지고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운현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스륵.

    날카로운 칼날이 불빛을 받아 번뜩였다.

    “으어억!”

    유호기는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갈 그 섬뜩한 칼날을 유호기는 부들부들 떨며 바라보았다.

    피할 수도, 눈을 돌리지도 못했다.

    “어, 으어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흘리며 유호기는 입을 벌렸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로 가득했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생각조차 끊어져 버렸다.

    하지만 날카로운 칼날은 유호기를 향해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다.

    쉭.

    “으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털썩.

    유호기의 몸은 힘없이 옆으로 무너졌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객옹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쯧.”

    쓰러진 유호기를 보며 객옹은 말했다.

    “차라리 죽이지 그랬더냐?”

    “그럴 수는 없지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하면 이자를 충신으로 만들어 주는 셈이 될 테니까요.”

    박 공공을 쫓아내는 데 앞장서던 유호기가 갑작스러운 변고를 당한다면 그 이후 전개될 정치적 상황은 뻔했다.

    동창의 병필태감인 박 공공을 향한 성토가 더욱 거세어질 것이고, 좌시랑 유호기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충신으로 포장될 것이다.

    본래 동창이란 돌연한 죽음이나 이유 모를 행방불명을 만들어 내는 데 능숙한 기관이니까 말이다.

    스릉.

    미명이 칼집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조금 전, 미명의 칼날은 유호기의 머리카락 하나 자르지 않았다.

    유호기는 눈앞으로 떨어져내리는 죽음의 공포를 감당하지 못하고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이다.

    혹시 몰라 객옹에게는 운현이 이미 눈빛을 보낸 후였고 말이다.

    “그래서, 이것으로 끝이냐?”

    유호기를 내려다보는 객옹의 표정에는 불쾌감이 가득했다.

    마치 오물이라도 보는 듯 인상까지 쓰고 있었다.

    “아닙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놀라 쓰러진 것이 무슨 처벌이 되겠습니까? 본래 사대부는 덕(德)으로 다스리고, 무도한 자들은 법(法)으로 다스린다 하였으니 그리해야겠지요.”

    “덕이라니? 봐주겠다는 뜻이냐?”

    객옹의 말에 운현이 미소를 지었다.

    “덕으로 다스린다 하여 처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법을 어긴 자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죄에 따라 형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법치라 합니다. 반면 덕치는…….”

    “그래서 어쩌려고?”

    객옹이 운현의 말을 끊었다.

    운현은 쓰러진 유호기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을 잃은 그의 입가에 침이 흐르고, 화려한 비단옷은 더럽혀진 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수치를 깨닫게 해야겠지요. 그것이 바로 사대부를 처벌하는 전통적인 방법이니까요.”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수치를 깨닫게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운현은 유호기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음흉해 보인다고, 객옹은 그렇게 생각했다.

    ***

    북경 외곽의 개시장은 빈민과 하층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개시장’이라는 불린 이유는 개를 많이 팔아서가 아니라 더럽고 지저분한 데다 위험하기까지 해서였다.

    그날 아침, 주변 지역 사람들도 피하는 그 개시장 한복판에는 이상한 것이 놓여 있었다.

    “이건 뭐야?”

    수염이 듬성듬성한 중년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느긋하게 가게 문을 열던 그는 개시장 한복판에 있는 ‘그것’을 발견했다.

    “옆집 장씨가 개 우리를 새로 샀나?”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그것은 다름 아닌 커다란 우리였다.

    개나 돼지 같은 동물을 가둬 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지금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개도 돼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놈은 또 뭐지?”

    중년 사내는 인상을 썼다.

    우리 한가운데 웬 사람이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손과 발은 묶인 채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옷만은, 비록 가축의 오물과 진창으로 더럽혀지긴 했지만 값비싼 비단옷이었다.

    “설마 노예는 아닐 테고…….”

    아무리 이곳이 밑바닥이라 해도 노예를 사고팔지는 않는다.

    중년 사내는 인상을 구긴 채 우리 안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우리 앞에 커다란 방문(榜文)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관아 앞에 붙는 방문처럼 글씨가 쓰여 있고 아래에는 붉은 인장까지 찍혀 있었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중년 사내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때였다.

    쓰러져 있던 남자가 번쩍 눈을 떴다.

    “어이쿠. 깜짝이야.”

    중년 사내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눈을 뜬 남자는 더더욱 놀라고 있었다.

    “허억!”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손과 발이 뒤로 묶인 채라 다시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철벅.

    가축들의 오물이 뒤범벅된 진창에 남자가 얼굴을 처박았다.

    우리가 놓인 곳이 본래 가축들을 팔던 장소라 바닥에는 진창과 오물이 가득했다.

    오물투성이가 된 남자는 버둥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킨 그는 입안에 들어간 오물을 뱉어 냈다.

    “케엑! 퉤, 퉤.”

    그는 바로 병부 좌시랑 유호기였다.

    몸을 뒤틀던 유호기는 자신의 손발이 묶인 것을 알아채고는 화를 냈다.

    “감히 이따위 짓을!”

    유호기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던 유호기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중년 사내를 알아차렸다.

    “뭐하고 있느냐! 어서 풀지 않고!”

    대뜸 명령조인 그 말에 중년 사내의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거, 뉘신데 거기 있는거요? 그곳은 개나 돼지 들을 넣어 두는 곳인데.”

    아닌 게 아니라 유호기의 상황은 팔려고 내놓은 개나 돼지와 똑같았다.

    유호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익, 내 그놈을…….”

    유호기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다시 중년 사내에게 외쳤다.

    “너 이놈! 빨리 풀라 하지 않았더냐! 어서 이 줄을 풀어라!”

    중년 사내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니, 누구신지 알아야 풀어 줄 것이 아니오? 아까부터 소리만 지르고 있으니……. 나, 원. 더러워서.”

    중년 사내는 귀까지 후비며 여유를 부렸다.

    유호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더럽다고? 이놈이 감히 어디서……. 나는 이 나라의 병부 좌시랑이니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유호기가 외쳤다.

    유호기는 중년 사내가 즉시 고개를 조아릴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중년 사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보니 미친놈이었구먼. 에잇, 퉤!”

    탁.

    ‘윽!’

    유호기는 즉시 고개를 돌렸지만 뺨에 달라붙는 끈적끈적한 느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거, 원. 재수가 없으려니까 아침부터 별 미친 새끼를 다 보는군. 에이!”

    중년 사내는 다시 침을 뱉을 것처럼 카악 소리를 냈다.

    “윽!”

    유호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침은 날아오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뜬 유호기의 시야에 걸어가는 중년 사내의 등이 들어왔다.

    “너, 너 이놈! 어딜 가느냐! 이 줄을 풀라 하지 않았더냐!”

    그러나 사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개시장 골목 사이로 휘적휘적 멀어져 갔다.

    가게를 열던 중이 아니라 마치 지나가던 것처럼 말이다.

    “이노오옴! 어서 줄을 풀지 못하겠느냐아아아!”

    유호기는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사내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거기 누구 없느냐! 어서 이 줄을 풀란 말이다아아!”

    유호기는 고래고래 외쳤다.

    그러나 그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오후, 개시장 사람들은 이곳에 새로운 볼거리가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앞에 붙어 있던 방문에 ‘이자는 백성을 돼지라 일컬으며 얼마든지 죽어도 좋다고 주장하는 자다’라고 쓰인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지나가는 자들마다 침을 뱉고 욕을 했다.

    일부러 뒤에서 구정물을 뿌리거나 돌을 던지는 자들도 있었다.

    유호기는 수치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뒤늦게 신고를 받은 관졸이 유호기를 발견했지만, 방문에 찍힌 감찰어사의 직인은 관졸을 겁먹게 만들었다.

    결국 관졸은 관아에 돌아가 관원을 데려왔고, 관원이 감찰어사의 직인과 유호기의 신분을 상부에 확인받을 때까지는 꼬박 하루가 넘게 걸렸다.

    그동안 유호기는 개시장 바닥에 쓰러진 채 바득바득 이를 갈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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