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485화 (485/530)

485화. 한숨

병부 좌시랑 유호기는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회장에서 웃고 있던 손님들은 다들 쓰러진 채 말이 없고, 사방을 밝히는 등불만이 고요히 흔들릴 뿐이었다.

사방이 적막한 가운데 나타난 운현과 객옹의 모습은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현실감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환상이 아니었다.

저벅.

운현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연회장을 가로질러 곧장 유호기를 향해 다가왔다.

고고한 신선 같은 풍모의 객옹 역시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유호기는 벌컥 겁이 났다.

“누, 누구냐!”

그는 와락 외쳤다.

“감히 이 자리에 함부로 난입하다니! 내가 누구인지 알기나 하느냐!”

탕.

그는 짐짓 소리를 지르며 상을 내리쳤다.

평소라면 즉시 하인들이 달려왔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온 집 안이 텅 비어 버린, 아니 잠들어 버린 것처럼 말이다.

유호기가 급히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연회장 바깥은 그저 적막한 어둠뿐이었다.

저벅.

유호기가 흠칫 몸을 떨었다.

고개를 돌리니 바로 앞에 문사 차림의 청년, 운현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너, 너는 누구냐! 귀신이면 어, 어서 썩 물러…….”

유호기는 애써 당당하게 소리쳤지만 말을 맺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운현이 나지막이 물었다.

“당신이 병부 좌시랑 유호기입니까?”

유호기의 눈빛에 순간 생기가 돌아왔다.

적어도 상대는 귀신이 아니다.

게다가 그의 말처럼 자신은 군무를 총괄하는 병부의 좌시랑이 아닌가?

“그, 그렇다.”

숨을 가다듬으며 유호기는 말했다.

“내가 병부 좌시랑 유호기다! 너는 대체 누구냐!”

짐짓 책망하듯 유호기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엔 어느새 자신감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운현은 대답 없이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각 사람 앞에 차려진 호화스러운 요리와 향기로운 미주가 연회의 화려함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마교의 군세가 감숙의 성도 난주를 위협하고, 황상의 명으로 제독총병관이 출정한 지금.”

슥.

유호기를 바라보며 운현이 말했다.

“군무를 총괄하는 병부의 좌시랑이 이런 연회나 열고 있단 말입니까?”

운현의 눈빛은 서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호기는 순간 움찔했지만 곧 벌떡 일어섰다.

“너 이놈!”

덜컹.

“감히 누구 앞에서 그따위 망발이더냐! 네가 누군지 어서 밝히지 못할까!”

유호기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두려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분노가 그의 마음에 피어올랐다.

운현은 조용히 답했다.

“나는 운현입니다.”

유호기는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운현?’

기억을 떠올리는 건 금방이었다.

그 이름이 조정에 회자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박 공공을 위시한 황태자의 사람들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이름이 아니던가?

유호기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오호라. 이제 보니 끈 떨어진 연이었구나.”

그는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박 공공이 쫓겨나니 마음이 급했더냐?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말이다.”

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호기는 연회장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건 어찌한 것이냐? 아하!”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유호기는 눈을 크게 떴다.

“술에 장난질을 친 것이었구나. 이렇게까지…….”

말하던 유호기가 흠칫했다.

상황이 자신의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노옴!”

유호기는 버럭 소리를 쳤다.

“네, 네가 일신의 무공이 있다 하여 가, 감히 병부의 좌시랑을 해하려 한단 말이냐! 이런다고 네가…….”

“착각하지 마십시오.”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내가 온 이유는 당신에게 보여 줄 것이 있어서입니다.”

슥.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유호기도 덩달아 눈을 돌려 운현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자박.

‘헉!’

어둠 속에서 백색 무복을 입은 두 명의 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유호기가 놀란 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었다.

한 명의 가냘픈 여인이 무사들 사이에서 떨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르신…….”

여인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유호기는 와락 인상을 썼다.

“채홍아!”

그녀는 얼마 전 유호기의 첩으로 들어온 채홍이었다.

가냘프고 미색이 뛰어난 그녀는 유호기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마치 입안의 혀처럼 순종적이고 애교가 넘치는 데다가 몸매도 좋아서 처첩들 중에 유호기의 총애를 독차지 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감히 누구를!”

쾅.

유호기는 주먹으로 상을 내리쳤다.

술잔이 엎어지고 병이 쓰러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유호기는 분노했다.

“당장 그 손을 놓지 못할까!”

사실 무사들은 채홍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

채홍은 이미 연회장에 나갈 채비를 마치고 있었고, 무사들은 유호기가 찾는다며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왔던 것이다.

“어르신!”

타닥.

채홍은 눈물을 글썽이며 유호기에게 달려갔다.

유호기는 얼른 두 팔을 벌렸다.

팍.

그가 채홍의 가냘픈 몸을 끌어안자 채홍은 유호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흑, 어르신. 흑흑흑.”

유호기는 이를 갈았다.

“감히 내 사람에게 손을 대다니! 이 일은 결단코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유호기는 채홍을 안은 채 서슬 퍼런 목소리로 운현에게 외쳤다.

그 눈빛과 목소리에는 분노와 자신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상대가 자신을 해할 생각이 없다고 했던 데다가, 협박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 내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채홍은 겁이 나는 듯 더욱 유호기의 품을 파고들었다.

애첩의 나긋나긋한 몸을 안으며 유호기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슥.

채홍은 겁먹은 척 유호기에게 매달리면서도 운현과 객옹을 몰래 흘끔거렸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가득했고 붉은 입술에는 요염하기까지 한 조소가 머물러 있었다.

“뭐하느냐!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할까!”

유호기가 기세 좋게 외쳤다.

그러나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릉.

운현이 검을 뽑았다.

유호기는 흠칫하며 애첩을 끌어안았다.

“무, 무슨 짓이냐!”

운현은 천천히 검을 들어 유호기를 가리켰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네 모습을 보여라.”

유호기가 인상을 썼다.

그는 애첩을 안은 채 말했다.

“그게 무슨…….”

그러나 그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으윽.”

품 안에 안겨 있던 애첩 채홍이 신음을 흘렸다.

유호기는 깜짝 놀라 채홍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느냐? 채홍아. 괜찮…….”

휙.

채홍이 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넌 누구야!”

그녀는 앙칼진 소리로 운현에게 외쳤다.

“대체 어떻게 이런……. 아아악.”

매우 고통스러운 듯 채홍은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유호기는 당황했다.

가냘픈 그녀의 몸이 유호기의 품 안에서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채, 채홍아…….”

“캭!”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소리가 채홍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헉!’

유호기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평소라면 밀려 쓰러졌을 채홍은 그 자리에서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은 채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너, 넌 도사도 승려도 아닌데 어떻게…….”

채홍이 운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평소의 애교 섞인 목소리는 사라지고 마치 쇠를 긁는 듯 거친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운현은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 끝은 마치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채홍의 몸과 의지를 속박하고 있었다.

“카악!”

휘릭.

갑자기 채홍이 운현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검도 개의치 않은 채 그녀는 두 팔을 벌리며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옆에 서 있던 두 명의 무사들은 즉시 검을 뽑아 채홍을 향해 휘둘렀다.

카강.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 자루의 검은 채홍을 베지 못했다.

놀랍게도 무사들의 칼날은 채홍의 손에 막혀 있었다.

섬섬옥수 같던 채홍의 손에 새카만 기운이 안개처럼 넘실거렸다.

“캬아아!”

두 손으로 검을 막은 채홍이 운현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건 짐승의 울음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그때였다.

퍽.

“아악!”

한 줄기 기운이 채홍의 한쪽 어깨를 날려 버렸다.

채홍은 몸을 뒤틀며 남은 한 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검조차 막아 내던 그녀도 객옹의 난홍십이엽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채홍아!”

유호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채홍은 눈물을 글썽이며 유호기를 바라보았다.

“……어르신.”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이전처럼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박살 난 어깨에선 피가 흐르지 않았다.

게다가 채홍의 손가락 끝에는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짐승의 발톱인 양 번득이고 있었다.

“살려 주세요, 어르신. 저들이 소녀를…….”

“허억!”

그러나 유호기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평범한 여인이 어찌 짐승 소리를 내며 손으로 검을 막아 낼 수 있을까?

심지어 어깨가 날아갔어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그가 총애하던 애첩 채홍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으득.

채홍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이 단박에 새카맣게 물들었다.

“흥, 쓸모없는 놈.”

뱉듯이 유호기에게 말한 채홍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운현을 보며 말했다.

“……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아까처럼 운현에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어째서 저런 존재를 미리 알아보지 못했을까?

지금 채홍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운현의 시선이,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지는데 말이다.

사락.

채홍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처연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저 한낱 마인에 불과합니다. 부디 저를 놓아…….”

하지만 그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객옹의 손에서 날아온 난홍십이엽이 마인의 머리를 부숴 버렸기 때문이다.

퍽.

“으헉!”

유호기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피는 튀지 않았다.

“헛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은 없다.”

객옹이 손을 내리며 말했다.

운현은 묵묵히 자신의 검, 미명을 거뒀다.

스릉.

검을 갈무리한 운현은 유호기를 바라보았다.

“이래도 모르겠습니까?”

운현의 시선은 냉담했다.

치이이.

채홍이었던 마인의 몸이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 올리며 녹아내렸다.

사방으로 퍼져 가는 매캐한 냄새를 느끼며 유호기는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나, 나는……. 나는 이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운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나 유호기는 바닥에 남은 채홍의 옷을 가리키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따위 귀신 놀음으로 무엇을 안다는 말이더냐! 마교라고 주장하려거든 확실한 증거를 가져와라! 증거를!”

여기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이번 출정을 총괄한 병부의 좌시랑이다.

돌아올 책임은 물론이거니와 이제껏 누리던 것들조차 단숨에 날아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마인의 시체는 남지 않았고 본 사람도 없다.

유호기는 단호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독기마저 일렁이고 있었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입니까?”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마교의 군세가 백성의 안전을 위협하고 수많은 군사들의 목숨을 앗아 갈 터인데, 병부의 좌시랑이 할 말이 그것뿐이냐는 말입니다.”

말하는 운현의 시선은 더없이 차가웠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