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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84화 (484/530)
  • 484화. 청하지 않은 방문자

    박 공공의 모습을 보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자네가 무사해 보이니 안심일세.”

    미리 계획한 대로라지만 운현은 내심 염려하고 있었다.

    권력 다툼이란 언제 어떻게 상황이 급변할지 모르는 것이니까 말이다.

    다행히 박 공공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운현은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무사해 보여 안심이라니, 그건 바로 제가 할 말이지요.”

    한숨을 쉬며 박 공공은 말했다.

    “관의 조력도 없이 몇몇 무인들만으로 혈교를 치러 가시다니요? 다음부턴 제발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한탄하듯 박 공공은 말했다.

    “제가 운 학사님을 특별 감찰어사로 천거한 것은 관의 힘을 실어 드리기 위해서였지 위험한 책무를 맡기려 한 것이 아닙니다. 운 학사님께서 지목만 하시면 백만 황군을 동원하여 짓밟아 버릴 것이라고 그렇게나 말씀드렸는데 무림인들만 이끌고 가셔요? 그러다 혹여 다치시기라도 하면 제가 대체 무슨 낯으로 운 학사님을 뵙겠냔 말입니다.”

    그간 쌓인 게 많았던 듯 박 공공의 한탄은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사실 운현이 ‘사고’를 친 건 이번만이 아니다.

    영웅맹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관의 협조와 감찰어사의 지위가 도움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박 공공이 보기에는 운현 홀로 영웅맹을 무너뜨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짜 배후인 일대상인은 따로 있다지만 그렇다고 영웅맹이 평범한 집단도 아니지 않은가?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을 하다 보면 위험을 무릅써야 할 때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다치는 정도야 누구에게든…….”

    “안 됩니다.”

    박 공공은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로 다치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지요?”

    눈까지 크게 뜨며 박 공공은 말했다.

    운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박 공공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처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 알겠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혼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운현도 박 공공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도 다치지 말아야 하네. 알겠나?”

    진지한 운현의 눈빛에 이번엔 박 공공이 놀랐다.

    그러나 운현은 진심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경험은 더 이상 원치 않았으니까.

    “……네.”

    박 공공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각별히 명심하겠습니다. 운 학사님.”

    그는 두 손을 모아 고개까지 숙이며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섬기는 주군의 명을 받드는 환관 같았다.

    “아니, 그렇게까지 예를 표할 건 없고…….”

    운현은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생각해 보면 박 공공은 동창 병필태감이자 조정의 실세다.

    그런 사람에게 자신이 너무 허물없이 말한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후후.”

    박 공공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운 학사님은 여전하시군요. 저 같은 사람에게…….”

    자신이 도찰원의 직위를 내려놓자마자 관리들은 뒤에서 박 공공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다른 계파야 박 공공을 적대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같은 계파의 관리들 역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들이 존중하는 건 박 공공의 권력이었지 결코 박 환관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운현은 한결같았다.

    별 볼 일 없는 박 환관일 때도, 그리고 동창 병필태감 박 공공이어도 말이다.

    “저 같은 사람이라니? 자네가 뭐 어때서 그런가?”

    운현의 짐짓 화를 내며 말했지만 박 공공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박 공공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운 학사님께서 북경까지 오신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시지요?”

    “뭐, 자네를 한 번 보고 싶기도 했고…….”

    운현은 찻잔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어쩌다 보니 병부 좌시랑 유호기와 우군도독부 유붕걸의 이야기가 들려서 말일세.”

    “하아.”

    박 공공은 대뜸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림입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진림 도독이 말해 주더군.”

    박 공공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그렇게 안 봤더니 진림 그 사람, 생각보다 입이 가볍군요.”

    진림의 우려대로 박 공공은 매우 기분이 상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으면 차라리 자신의 목을 걸고 소(疏)라도 올릴 일이지, 왜 하필 운 학사님께…….”

    운현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고, 진림 도독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생각도 없으니까. 다만 유호기와 유붕걸에 대한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을 뿐이네.”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박 공공은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차피 그자들의 끝은 정해져 있습니다. 운 학사님께서 염려하시는 바는 알겠지만, 누가 무어라 해도 그자들의 행태가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잔잔한 웃음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박 공공은 내키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그들은 최악입니다.”

    달칵.

    찻잔을 쥔 박 공공은 시선을 내린 채 말을 이었다.

    “유붕걸은 제독총병관으로 임명받은 즉시 감숙, 사천, 섬서 세 성의 도지휘사에게 명을 내렸습니다.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요.”

    운현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과 성급한 군사행동을 자제하라는 건 아주 다른 의미다.

    유붕걸이 제독총병관으로 내린 이 명령은, 그가 백성의 안위가 아닌 자신의 공에만 신경 쓰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좌시랑 유호기는 날마다 자택에서 연회를 벌이며 뇌물을 받고 있습니다. 자신이 벌써 병부의 상서라도 된 듯 온갖 청탁과 이권을 챙기고 있지요.”

    “감숙에 난리가 났는데도 말인가?”

    “네. 오히려 더합니다. 상황이 심상찮을수록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권력을 쥔 자에게 청탁하려고 몰려드니까요.”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두 사람의 행태는 어려운 사람들의 형편을 이용해 먹는 악덕 상인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운 학사님.”

    조용한 목소리로 박 공공이 말했다.

    “이제껏 저들과 같은 자들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니, 더 악독한 관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도찰원이나 동창이 존재하는 것이고요.”

    굳은 표정의 운현을 바라보며 박 공공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저들은 스스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잠시 놓아두면 곧 응분의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니, 제가 반드시 받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저런 자들 때문에 운 학사님의 손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그의 진심은 운현의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았다.

    “그래서 못 들은 척하라는 말인가?”

    “네.”

    “고맙네. 허나 그럴 수 없네. 아니, 그리하지 않겠네.”

    운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하겠다고 결심했으니 말일세.”

    그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박 공공은 운현의 뜻을 바꿀 수 없음을 알았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말이다.

    “알겠습니다.”

    조용한 어조로 박 공공은 말했다.

    “뜻대로 하십시오. 뒤는 제게 맡기시고요.”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내가 박 공공에게 어찌 폐를 끼치겠나? 그건 걱정 말게.”

    “과연 그럴까요?”

    박 공공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 기억엔 빨래부터 시작해서 천하 각지에 보낸 서찰까지, 참 손이 많이 가는 분이셨던 것 같은데요?”

    운현은 순간 당황했다.

    생각해 보니 박 공공에겐 예전 학사 시절 빨래를 부탁했던 적이 있었다.

    수련을 하느라 땀에 젖어 살던 때에 말이다.

    게다가 서찰을 보내는 것 역시 박 공공에게 맡겼었다.

    비록 은자는 조금 쥐어 주었다 해도, 그의 도움을 받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그건…….”

    운현은 변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당황한 운현을 보며 박 공공은 웃었다.

    그 웃음에는 운현을 향한 신뢰가 가득했다.

    ***

    병부 좌시랑 유호기의 저택은 북경에 있었다.

    크고 오래된 저택은 그의 집안이 오래전부터 관직에 진출해 온 유서 깊은 가문임을 말해 주었다.

    감숙의 성도인 난주가 위험한 상황인 데다 군무를 총괄하는 병부 좌시랑임에도 불구하고, 유호기의 저택에서는 오늘 밤에도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기쁜 날이외다.”

    수염을 기른 좌시랑 유호기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처럼 부족한 저를 귀한 분들께서 믿고 찾아와 주시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소이까? 하하하.”

    연회장에는 많은 손님들이 줄을 지어 앉아 있었다.

    모두가 고급 관료이거나 혹은 영향력 있는 가문에 속한 자들이었다.

    큰 상단에 있는 이들도 빠지지 않았다.

    각 사람 앞에 차려진 향기로운 술과 요리가 식욕을 돋우고 있었지만 손을 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맞이해 주셔서 좌시랑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염소수염을 기른 한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유호기를 향해 두 손을 맞잡으며 예를 표했다.

    “허나 무엇보다 기쁜 것은 좌시랑께서 조정의 권위를 바로 세우신 일이 아니겠습니까? 황상의 눈을 어지럽히는 간신을 몰아내셨으니 이제 좌시랑께서는 역사에 기록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하.”

    아부의 말이었지만 유호기는 오히려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염소수염의 사내가 당황해하는데 옆에 앉은 다른 사람이 얼른 입을 열었다.

    “어허, 유 대인께 좌시랑이라니! 이제 곧 병부를 총괄할 상서가 되실 터인데, 마땅히 상서 어르신이라 해야 하지 않겠소?”

    그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상서 어르신!”

    유호기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 갔다.

    다른 사람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제히 잔을 들었다.

    “축하합니다! 상서 어르신!”

    “허허허, 고맙소. 덕담으로 듣겠소이다.”

    유호기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잔을 들었다.

    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은 유호기와 함께 술을 마셨다.

    탁.

    술잔이 놓이자 하녀들이 일어나 술잔을 채웠다.

    가문의 재력을 말해 주듯 손님들마다 옆에 하녀들이 붙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술잔을 채운 하녀들은 다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자를 아껴 주시는 여러분의 후의에 참으로 감사드리오.”

    유호기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나 아직 상서가 된 것은 아니니 그런 말씀은 여기서만 해 주시기 바라오. 다른 이들이 듣고 비웃을까 두렵소이다. 허허.”

    짐짓 겸양의 말을 하는 유호기에게 염소수염의 사내가 얼른 나섰다.

    “감히 누가 어르신을 비웃겠습니까?”

    그는 조금 전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침까지 튀기며 말했다.

    “어르신처럼 충심으로 황상을 섬기는 신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게다가 황상의 신임마저 두터우니 어찌 상서 정도로 멈추시겠습니까? 조만간 육부를 총괄하는 내각대학사의 직에 오르실 것이 분명합니다!”

    유호기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육부를 총괄하는 내각대학사는 사실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뜻에 따라 천하가 움직일 상상을 하니 순간 유호기의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허허, 이 부족한 사람이 내각대학사까지야…….”

    유호기는 짐짓 뒤로 빼는 듯했지만 그 눈동자에 흐르는 탐욕의 빛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아닙니다! 어르신은 내각대학사의 지위에 오르실 것이 분명합니다!”

    염소수염의 사내는 크게 외쳤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나갔다 싶지만 유호기가 흡족해하는 것이 눈에 보이니 멈출 수가 없었다.

    유호기가 흡족할수록 청탁에 드는 대가가 줄어들 테니 말이다.

    “허허, 이것 참…….”

    유호기는 짐짓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향기로운 술과 기름진 요리가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사이에도 염소수염의 사내는 더욱 힘차게 소리쳤다.

    “제 목을 걸고서라도 장담합니다! 어르신께서는 반드시…….”

    고조되어 가던 사내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술잔을 들던 유호기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열정적으로 외치던 염소수염의 사내가 입을 떡 벌린 채 그대로 굳어 있는 것이다.

    ‘응?’

    유호기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염소수염의 사내는 스르르 눈을 감더니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퍽.

    그의 얼굴이 기름진 요리에 처박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퍽, 쿵, 콰장창.

    연회장 이곳저곳에서 소리가 울려나왔다.

    손님들은 앞으로 혹은 옆으로 쓰러졌고 무릎 꿇고 있던 하녀들도 힘없이 바닥에 몸을 눕혔다.

    털썩.

    “이, 이게 무슨…….”

    유호기는 술잔도 놓지 못한 채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전만 해도 흥겹던 연회장이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바로 그때였다.

    사락.

    문득 들려온 인기척에 유호기는 눈을 들었다.

    그리고 연회장으로 들어오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평범한 문사 차림의 청년과 긴 수염을 기른 날카로운 눈빛의 한 노인, 아무도 청하지 않은 그들은 바로 운현과 객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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