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재회
운현을 바라보는 수군도독 진림의 눈빛은 진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운현에게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가 마교의 손에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진림의 경고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리 중앙이 혼란하다지만 설마 마교의 위험조차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라는 말씀입니까?”
“박 공공을 제외하면,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찻잔을 매만지며 진림은 말을 이었다.
“현재 조정의 주도권을 쥔 계파는 자신들이 박 공공을 몰아냈다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박 공공을 위시한 환관 조직을 모두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계파의 관리들도 전부 배척한 채 자신들만으로 이번 난리를 진압하려 하고 있지요.”
진림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역량이 없습니다. 사실 쓸 만한 이들은 이미 박 공공에게 속해 있거든요. 그런 이들을 처음부터 모두 배제하고 있으니 제대로 될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까지 박 공공은 흔들림 없는 조정의 실세이자 미래의 권력 핵심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박 공공과 연관되지 않은 고관이 드물 정도인데, 그들을 모두 제외한다면 사실상 조정의 관리 대부분을 배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발 빠르게 갈아타는 기회주의자들을 빼면 말이다.
“이번 난리를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차이가 납니다.”
진림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은 이번 난리가 박 공공의 실정 탓에 일어난 민란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감숙에서 올라온 보고는 아예 처음부터 무시당했지요. 마교의 짓이라고 하면 박 공공에게 책임을 추궁할 수가 없으니까요.”
운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중앙 조정과 고관들의 행태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계파를 위해 마교의 위협을 일부러 과소평가한다는 건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조정은 곧 우군도독부 도독첨사 유붕걸을 제독총병관으로 임명하여 난주로 출정을 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출정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바로 병부(兵部)의 좌시랑 유호기라는 자입니다.”
병부는 군무에 관한 모든 것을 총괄한다.
좌시랑이라면 수장인 상서(尙書) 다음의 직책이니 도독에 버금가는 대단한 고위직이라 할 수 있었다.
“유호기는 평소부터 오만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데다 박 공공을 환관이라 하여 크게 업신여기고 있었습니다. 마교의 군세라는 말에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이 벌써 난리를 진압한 것처럼 행동한다더군요. 지금도 자신의 재산과 계파를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자가 어찌 병부의 좌시랑까지 올라갈 수 있단 말입니까?”
탄식 섞인 운현의 말에 진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문이 좋고 인맥이 넓으며 돈이 있으니까요. 그저 윗사람에게만 잘 보이면 되는데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유능한 관리와 무능한 관리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능력 대신 인맥과 계파에 따라 승진시키는 일은, 심지어 전란 중에도 왕왕 일어나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태평성세가 계속되어 오던 상황이라면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의 구분은 더더욱 어려워진다.
“출정한다는 도독첨사 유붕걸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못된 짓이라면 자신의 친척인 유호기에 버금가는 데다가, 유능한 수하에게 자신의 잘못을 뒤집어씌워 좌천시키기로는 천하에 제일가는 자입니다.”
도독첨사 유붕걸에 대한 진림의 평은 더욱 신랄했다.
군에 대해 잘 아는 진림인 만큼 도독첨사의 허물이 더욱 크게 느껴진 것이다.
“어이쿠, 이거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보군요. 운 대인께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박 공공께 원한이라도 사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진림이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내저었다.
운현은 진림을 바라보았다.
“도독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제가 어떻게든 해 주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진림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수군도독으로서 중앙의 상황은 한심스럽기까지 합니다. 사실 저들이야 망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마는, 그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백성들의 몫이 되지 않겠습니까?”
운현은 그 말에 동의했다.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전투에 나선 군병들과 난주의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도 목숨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말이다.
“허나 운 대인께도 딱히 방법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유호기와 유붕걸 역시 황상의 신하이니, 이런 말을 해 봤자 제 얼굴에 침 뱉기가 되겠지요.”
운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눈을 들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저야말로 쓸데없는 넋두리를 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운현은 찻잔을 들었다.
따사로운 향이 밤의 냉기를 쫓아 주었지만 운현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남경.
운현은 숙소에서 장로, 가주, 절정고수 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사람들이지만, 지금 일행의 모습은 함께 유람을 다니는 어르신들에 다름 아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언제나 그렇듯 차를 나누었다.
남경의 오랜 다루는 차(茶)만큼이나 풍광도 좋았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운현은 일행에게 말했다.
“잠시 북경에 다녀오려 합니다.”
“북경?”
군자검 제갈명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도 운현을 돌아보고, 모용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아닙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박 공공이 어떤지 걱정되기도 하고, 조금 알아볼 것도 있어서요. 가능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군요.”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는 못했다.
갑자기 이렇게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모용 소저.”
운현이 문득 모용미에게 물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창룡맹의 일을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용소저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번에 모용미는 각 문파의 장로와 가주, 절정고수 들에게 큰 신뢰를 얻었다.
그녀라면 창룡맹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총군사 영호준의 표정이 벌써부터 환해지는데, 모용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이자 가주인 관일검 모용단천을 바라보았다.
모용단천은 웃음을 머금었다.
“네가 좋다면 괜찮다.”
손녀가 원하는 일을 모용단천이 반대할 리가 없었다.
본래 모용미가 맡고 있던 외당 당주의 직무도 오라비인 청풍검 모용진에게 넘긴 터라 모용단천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운현은 그가 무인으로서 존경하며 신뢰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모용미는 모용단천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운현에게 답했다.
“네. 하겠어요.”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모용 소저. 감사합니다. 모용 어르신.”
“나야말로 미아를 잘 부탁하오.”
모용단천이 짐짓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강호 무림에 이름을 떨치는 세가의 가주인데도 이럴 때 보면 능청스러운 옆집 할아버지 같았다.
물론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모습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북경으로 오늘 출발하실 건가요?”
모용미의 물음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떠나려 합니다.”
“그렇군요. 잘 다녀오세요, 운 학사님.”
웃으며 모용미가 말했다.
운현 역시 미소로 답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먼 길 평안히 다녀오시오. 맹주.”
“조심하시게나.”
장로와 가주, 그리고 절정고수 들의 인사를 들으며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컹.
묵묵히 차를 마시던 객옹이 당연하다는 듯 일어섰고, 두 사람은 그날로 남경을 떠나 북경으로 향했다.
***
감숙에서 일어난 난리의 소문은 곧 사방으로 퍼져 갔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대대로 감숙은 변방에서도 아주 외진 곳으로 취급받았던 데다가, 난리를 진압하기 위해 군이 움직였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기 때문이다.
제독총병관으로 임명받은 유붕걸 도독첨사의 지휘에 따라 감숙은 물론 인접한 사천, 서안 세 성(省)의 관군은 감숙의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감숙성의 관군이 이미 난주를 방어하고 있는 가운데 사천과 서안의 관군이 각 도지휘사의 인솔 아래 즉시 감숙성 난주로 이동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그건 아마도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일부러 흘린 소문이겠지만 어차피 난리가 곧 진압될 것을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운 학사님!”
박 공공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날세. 박 공공.”
의자에 앉아 있던 박 공공은 벌떡 일어섰다.
그는 급히 문 밖으로 나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시다니 참으로 송구스럽사옵니다.”
박 공공이 있는 곳은 황궁 안에 있는 그의 거처였다.
힘과 지위를 얻은 환관들이 궁 밖에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고 권세를 과시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과거의 운현처럼 작은 방 하나가 아니라 어엿한 집이긴 했지만 박 공공이 가진 권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았다.
“송구스럽다니, 그렇지 않네. 자, 어서 일어나게.”
운현은 박 공공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 어깨가 어쩐지 가냘프게 느껴져서 운현은 마음이 아팠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박 공공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박 공공의 표정엔 환한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또르륵.
찻잔이 채워지며 따듯한 향이 주위를 채웠다.
운현의 찻잔을 채운 박 공공은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른 후 자리에 앉았다.
“누추한 곳이라 죄송합니다. 그래도 차는 좋은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후후후.”
“염려는 무슨. 고맙네.”
운현은 찻잔을 쥔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박 공공이 있는 이곳은 황실의 비빈들에게 주어지는 거처들 중 하나였다.
비빈들의 거처라 해도 천차만별이어서 어떤 곳은 크고 화려했으며 또 어느 곳은 작고 볼품이 없기도 했다.
박 공공은 바로 그 작고 볼품없는 곳에 살고 있었다.
딱히 장식이나 가구라 할 만한 것도 보이지 않아서 어쩐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박 공공은 집을 꾸미는 데 관심이 없는 모양이군.”
“네. 없습니다.”
박 공공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죽을 때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화려하게 치장해 봐야 무엇하겠습니까? 집은 그저 불편 없이 머물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사실 박 공공은 이곳보다 그의 집무실이 있는 전각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심지어 며칠씩 이곳에 오지 않는 일도 허다했다.
“게다가 정말 중요한 건 집이나 장식이 아니니까요. 진짜 중요한 건 결국 돈 아니겠습니까?”
운현은 웃었다.
박 공공의 말이 농담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마침 내가 돈이 좀 생겼는데 필요하면…….”
“어이쿠, 주신다면야 절대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요.”
운현이 웃고 박 공공도 웃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환관들이 돈과 권세에 집착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천시받고 무시당하는 그들에겐 유일한 방패와 의지처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니, 딱히 환관들만이 그런 것도 아닐 테지.’
잠시 찻잔을 매만지며 생각하던 운현은 눈을 들었다.
“괜찮나?”
난데없는 말이었지만 박 공공은 알아들었다.
웃으며 박 공공은 말했다.
“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이미 다 계획한 대로가 아닙니까?”
“허나 쉬운 일은 아니지 않나? 세상은 힘을 잃은 자를 가만두지 않으니까.”
“그야 천박한 자들의 일상이 늘 그러하니까요. 뭐, 시답잖은 것들이 제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이죽거릴 때는 조금 짜증이 났습니다만.”
이미 예상한 일이고 계획한 대로의 대처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 공공이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가 받은 모욕과 뒤에서 수군거리던 조롱들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박 공공이 웃으며 말했다.
“받은 그대로 되갚아 줄 테니까요.”
그의 눈동자는 생기로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에서 권세를 잃은 처참한 패배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