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화. 진림의 경고
천하제일루는 소문 이상이었다.
최상층에서 바라보는 남경의 풍경은 참으로 장관이어서 그저 보고만 있어도 절로 흥취가 일어날 정도였다.
예인들의 음률과 춤은 눈이 높은 가주들조차 흡족해 했고, 도가와 불가의 사상을 담은 서화와 시는 장로들과 천수 신니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운현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실 운현도 이곳 예인들의 기예를 보는 것은 처음인 데다가 천수 신니나 도가의 장로들도 시와 서화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수도자라고 경전만 파고 들지는 않는다오, 맹주.”
천수 신니는 차향을 음미하며 말했다.
“오히려 경전에는 시적인 표현과 아름다운 비유가 아주 많소. 당연히 시와 서화에도 익숙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소?”
“무가 역시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비슷하오.”
철검 남궁벽이 말했다.
그의 앞에는 향기로운 술이 놓여 있었다.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는 것은 필수적인 데다가 세가를 이끌어 가려면 배워야 하는 것이 아주 많소. 그러니 무공 수련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 마음 같아서는 무공 수련만 하고 싶소만 가주의 책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구려.”
비검 공손월도, 군자검 제갈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세가가 기관진식으로도 유명한 것을 생각해 보면 무공 외에도 배워야 할 것은 매우 많으리라.
“배움이라면 맹주께서도 조예가 깊지 않소?”
문득 군자검 제갈명이 말했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운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어려운 전시를 장원으로 합격한 분이니 말이오.”
“오오.”
천수 신니와 장로들이 나지막이 감탄을 흘리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그러고 보니 우리 맹주께서는 전시에 장원급제한 분이 아니신가?”
“참배객들마다 그저 통과만 해도 소원이 없다는데, 장원급제라니 정말 대단하시오.”
갑작스러운 칭찬에 운현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일로 이런 말을 들으니 오히려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때, 문득 관일검 모용단천이 말했다.
“맹주의 덕분으로 여독도 풀었고 풍류도 충분히 즐겼소. 그러니 이제 적당한 때가 된 것 같소.”
그는 운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무언가 하고 싶으신 말이 있지 않으시오?”
주위가 일시에 조용해졌다.
가주와 장로, 그리고 절정고수 들은 진지한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이미 운현의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사락.
예인들이 조용히 일어나 공손히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갔다.
주위가 조용해지고 운현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감숙에서 마교가 난을 일으켰습니다.”
모두의 표정이 일시에 굳었다.
천수 신니는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노부인 능세영의 표정은 특히나 심각했다.
“상황이 어떠하오?”
“북해일문의 연락에 의하면 마교의 군세가 난주를 위협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조정이 곧 군을 움직이리라 생각합니다.”
“허어.”
청송 진인과 태을 진인이 탄식을 흘리며 도호를 외웠다.
“난주를 위협할 정도라니, 대체 마교의 군세가 언제 그런 힘을…….”
“혈교에 눈을 돌리게 하고 그사이 힘을 모은 것인가?”
군자검 제갈명이 영호준에게 물었다.
“총군사, 우리가 없는 사이 이곳에 마교의 움직임이 있었나?”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몇몇 세가와 문파에 마교의 침투 시도가 있었습니다. 허나 모두 색출하여 무사히 막아 내었습니다.”
가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호준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무당과 화산, 소림, 아미의 장로님들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큰 어려움을 겪었겠지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우리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
천수 신니가 불호를 외우고는 말했다.
“오히려 면밀한 대책을 세운 맹주님과 총군사야말로 감사를 받아 마땅하네.”
마교가 무림 세가와 문파를 노릴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소림과 아미, 무당, 화산의 장로급 도인과 승려 들이 각 문파에 은밀히 머물고 있었던 것은 총군사 영호준의 대책이었던 것이다.
“흠, 군이 움직인다면 당분간 우리가 나설 일은 없겠군.”
군자검 제갈명이 담담하게 말했다.
관이 무림세가에 협력을 강제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다.
게다가 아무리 마교의 괴물들이라지만 화포를 맞고도 멀쩡할 수는 없을 테니 도가나 불가가 나설 이유도 없었다.
혹 출셋길로 여겨 관에 투신하는 일부 무림인들 외에는 말이다.
“그렇군. 감숙의 일은 가슴 아프나 이곳의 피해가 크지 않아 다행이오.”
관일검 모용단천의 말에 모두가 공감했다.
문득 철검 남궁벽이 운현에게 물었다.
“개파대전은 어찌하시겠소?”
“아직 시간이 있으니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지요.”
혈교의 일이 생각보다 빨리 정리된 덕분에 개파대전까지는 아직 여러 달이 남아 있었다.
“태평맹의 움직임은 어떠하오?”
그건 비검 공손월의 목소리였다.
얼마전까지 태평맹에 속해 있었던 공손세가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대답은 총군사 영호준이 했다.
“여전히 계림을 중심으로 광서성을 공략 중입니다만 지지부진합니다. 사실상 당문은 강남 공략에서 손을 뗀 모양새이고 혁련세가와 다른 문파들만이 계림에 남아 있습니다.”
비검 공손월은 혀를 찼다.
태평맹은 여전히 자신들만의 계산에 빠져 있는 듯했다.
달칵.
운현은 찻잔을 들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화려한 남경의 풍광이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
감찰어사 조관이 남경부에서 돌아온 것은 해가 진 다음이었다.
그는 박 공공이 이번 감숙 민란의 책임을 지고 도찰원의 직위를 내려놓았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평소 박 공공을 견제하던 계파가 이번 기회를 몰아 그를 밀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박 공공의 신변에 다른 일은 없습니까?”
“없는 것 같습니다만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벌써 남경부에서는 제 말이 먹히지가 않더군요.”
조관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래 유명무실하던 도찰원은 박 공공의 사임으로 다시 힘을 잃었다.
그나마 일전에 잠깐 관계가 있었던 남경의 부윤, 주덕일이 넌지시 말해 주지 않았다면 박 공공이 도찰원의 직위를 내려놓은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저들이 운 대인을 건드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황태자께서 대인을 신임하고 계심을 알고 있으니까요.”
박 공공이 도찰원의 직위를 내려놓았다 해도 감히 운현을 건드릴 사람은 없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북경의 도찰원으로 출두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운현의 감사에 조관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럼 저는 이만…….”
“조 대인.”
나지막한 운현의 목소리에 조관은 고개를 들었다.
운현은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힘들더라도 참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상황은 길지 않을 것입니다.”
조관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명심하겠습니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조관은 말했다.
그의 강인한 눈동자는 운현을 향한 신뢰로 빛나고 있었다.
***
깊은 밤, 운현과 객옹은 마차를 타고 남경 외곽으로 향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바로 수군도독 진림의 저택이었다.
이미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총관은 두 사람을 진림의 서재로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수군도독 진림이 환한 웃음으로 일행을 맞이했다.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이렇게 늦은 밤에 방문하게 되어 실례가 많습니다.”
“실례라니요.”
뚱뚱한 진림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두 분이시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야지요. 자, 어서 앉으시지요.”
진림은 직접 찻주전자를 쥐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객옹과 운현에게 차를 따랐다.
또르륵.
부드러운 향과 함께 온기가 피어올랐다.
진림은 자리에 앉아 두 손으로 찻잔을 쥐었다.
“감숙에서 사교의 무리를 무너뜨리신 일은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눈을 빛내며 진림은 말했다.
“운 대인께서 참으로 큰일을 하셨습니다. 허허허.”
운현은 이미 혈교와 마교에 대해 수군도독 진림에게 경고한 바가 있었다.
혈교가 무너진 것까지 아는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가 군의 최고위직에 속하는 수군도독인 데다 이번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나름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허나 문제는 아직 마교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운현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진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실은 제게도 접촉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제가 돈을 밝힌다는 헛소문이 있다 보니 이 진림이 쉬워 보인 모양입니다. 하하하하.”
“위험한 일은 없으셨습니까?”
운현의 물음에 진림은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일이 있겠습니까? 맹주께서 아미의 승려까지 보내 주셨는데요. 그분은 제 딸과 아주 친해지기까지 했지요.”
진림은 싱글벙글했다.
운현이 그를 위해 아미파의 장로를 보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후룩.
차를 마신 진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처럼 늦은 밤에 찾아오신 것은 중앙에서 생긴 일에 대해 알기 위해서지요?”
“네, 그렇습니다.”
“본래 조정의 일은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만…….”
진림은 빙긋 웃었다.
“제가 두 분께 무엇을 감추겠습니까? 게다가 운 대인은 이미 관직을 제수받으셨으니 외부인이라 할 수도 없지요.”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진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박 공공은 감숙에서 일어난 난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도찰원의 직위를 내려놓았습니다. 동창 병필태감의 자리까지 내려놓으려 하였으나 황상께서 윤허치 아니하셨지요. 황상의 신임은 여전하다는 의미입니다.”
도찰원의 직위는 정식 관직이지만 동창은 황제의 사적인 조직이다.
자금성이 공식적인 궁궐인 건물인 외조(外朝)와 황실의 사적인 공간인 내정(內庭)으로 나뉘는 것처럼, 동창에 대한 일은 고관들이라 해도 함부로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허나 박 공공의 세가 꺾인 것은 사실입니다. 병필태감의 지위는 유지하였다지만 현재는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자숙 중입니다. 일부에선 이번 일로 박 공공이 몰락할 것이라고 보기도 할 정도니까요.”
아무도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았던 박 공공이 도찰원의 직위를 내려놓은 것은 그 의미가 컸다.
동창 병필태감의 업무까지 중단하자 반대 계파들은 기세가 등등해졌고 이번 기회에 주도권을 되찾고자 벼르고 있었다.
“도독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운현이 물었다.
수군도독 진림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지요. 권력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요. 황상의 신임이 여전하시다 해도 한번 잃은 권력을 되찾기란 매우 어려운 법입니다. 만일 다른 계파가 이번 난리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주도권을 쥐게 된다면 더더욱 난망하게 될 테지요.”
운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뚱뚱한 진림은 찻잔을 들며 물었다.
“운 대인의 뜻은 어떠합니까? 박 공공이 권세를 회복하기를 바라십니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다만 박 공공이 평안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이번 감숙의 난리가 큰 피해 없이 끝나기를 원하지요.”
진림은 웃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운현이 권력을 원했다면 이미 자금성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현은 권력을 추구하는 대신 무림인들을 이끌고 혈교를 무너뜨렸다.
관의 도움조차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 말이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진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박 공공을 밀어낸 자들은 이번 난리의 진압을 명받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능함을 인정받을 기회라 여기고 있지요.”
진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허나 이대로라면 그들은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수군도독 진림은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위기감이 전혀 없으니까요.”
진림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軍)은 고도로 훈련되고 조직된 무력 집단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강군이라도 방심한 상태에서는 한 줌 수적들에게조차 고전을 면치 못하는 법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번 출정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어쩌면 난주는 마교의 손아귀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백전연마의 수군도독,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