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혼란
따각, 따각.
운현이 탄 마차는 화려한 남경 거리를 가로질렀다.
거리의 사람들은 크고 검은 마차를 보자마자 ‘천하제일루다!’라며 눈을 떼지 못했다.
지나던 마차들은 길을 비키고, 행인들은 걸음을 멈추고 마차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운현이라면 쑥스러워할 광경이었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감숙에서 변고가 발생한 건 언제입니까?”
운현은 영호준에게 물었다.
“제가 알아차린 것이 얼마 전이니, 아마 맹주님께서 감숙을 떠나자마자 일이 터진 듯합니다.”
영호준은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조금만 더 지체하셨더라면 꼼짝없이 휘말리셨을 테지요.”
옆에 있던 모용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감숙이라 해도 대단히 넓어요. 정확히 감숙 어느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이지요?”
영호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직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민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곳 남경부에서도 현재까지는 극히 일부입니다. 물론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겠지만요.”
충격적인 소식일수록 더욱 빠르게 전파된다.
비록 조정은 민란을 숨기고자 하겠지만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은 금방일 것이다.
바스락.
묵묵히 앉아 있던 빙설이 품 안에서 얄팍한 서찰을 꺼냈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빙설을 보았다.
“소저?”
빙설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일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운현은 서찰을 받아 들었다.
‘아.’
날카로울 정도로 정확한 그 서체를 운현은 바로 알아보았다.
바로 북해일문의 문주인 대궁주의 필체였다.
모용미나 영호준 역시 알아차린 눈치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운현은 대궁주의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바삭.
총군사 영호준에게 서찰을 건네며 운현은 말했다.
“마교의 군세가 난주 바로 앞에 진을 쳤습니다.”
영호준은 급히 서찰을 살폈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짜고짜 난주라니…….”
난주는 감숙의 성도다.
변방의 외진 지역도 아니고 감숙의 중심부가 위험하게 된 것이다.
하긴 그 정도가 아니라면 중앙 조정까지 전해질 리가 없었다.
드넓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지방대관의 자치권이 보장되어 있는 데다가, 관리들은 문책을 피하려고 문제를 은폐하거나 축소하는 경향이 강하니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것이 동창 같은 조직이 힘을 얻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제가 좀 봐도 될까요?”
옆에 앉은 모용미가 말했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영호준은 모용미에게 서찰을 건네주었다.
모용미는 차분하게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바스락.
모용미는 서찰을 고이 접어 운현에게 돌려주었다.
“이 서찰에 따르면 두 가지가 명확해졌군요. 첫째는 마교의 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일로 인해 감숙이 단절되어 버렸다는 점이에요.”
감숙은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는 특유의 지형을 가지고 있다.
남쪽의 성도 난주부터 서북쪽의 옥문관까지 남북이 산맥에 가로막혀 있는, 전체적으로 좁고 긴 복도[走廊]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하서주랑의 남쪽 입구인 난주가 막힌 이상 그 뒤편과는 완전히 단절된 상황이 된다.
“이러면 국경 수비군도 도움이 되지 못하겠네요.”
“설령 감숙이 막히지 않았다 해도 국경 수비군이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운현이 조용히 말했다.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내부의 일로 국경 수비군을 움직이는 건 나라를 망하게 하자는 말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국경 수비군은 국가 수호의 최전선이자 최후의 보루다.
외적의 침공 외에 여하한 이유라도 국경 수비군을 움직인다는 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마교의 군세가 일어났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마교의 군세라니…….”
대궁주가 전한 서신에는 적들이 마교의 군세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 혈인들을 보았던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마교의 군세 역시 괴물 같은 자들일 것이 분명했다.
“조정에 있었다던 큰 변화는 바로 이 일 탓이겠군요.”
운현의 말에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난주가 뚫리면 그다음은 바로 서안이니까요. 말 그대로 중원으로 길이 열리는 셈이니, 조정이 발칵 뒤집어질 만도 합니다.”
과거 장안이라 불리던 서안은 대대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만의 하나 이곳이 점령된다면 중원 전체가 위협받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당연히 중앙 조정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책도 대책이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운현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정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아직까지는 그저 소문들 중 하나입니다만, 박 공공께서 실각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각이라고요? 박 공공께서요?”
모용미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실각이라면 세력을 잃고 지위에서 물러났다는 의미다.
“네.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현재 남경부 전체가 크게 술렁이고 있습니다. 그 정도라면 엄청난 거물이 실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숙의 내란으로 남경부가 받을 영향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남경부 전체가 웅성거린다면 중앙 조정의 실세, 예를 들어 박 공공 정도의 사람이 실각하는 일이 아니고선 불가능했다.
따각, 따각.
“남경부에 간 조 대인이 돌아오면 확실해지겠습니다만…….”
운현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박 공공에게 책임이 돌아올 것은 예상하고 있던 바였습니다.”
영호준의 눈이 반짝 빛났다.
모용미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벌써 대책을 세워 두셨다는 말인가요?”
운현은 쓴 웃음을 지었다.
“세우긴 했습니다만, 예상을 했다고 모두 피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충격을 최소화하고 결과적으로 마교의 위협을 물리칠 방안을 강구했을 뿐이지요.”
박 공공이 현 실세인 이상 책임을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요령 좋게 회피하거나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일도 있으나 박 공공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애초에 황태자가 자신의 목숨을 맡길 정도로 신임하는 이가 어찌 얄팍한 수로 책임을 면하겠는가?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맹주님께서 박 공공께 보낸 서찰이 그런 내용까지 담고 있었군요.”
“그렇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 공공에게 보낸 두꺼운 서찰은 혈교와 마교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인해 발생할 정치적 영향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해 두었다.
황실의 생태와 중앙 조정의 권력 관계에 익숙한 박 공공이라면 크게 걱정할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일이 생각대로 진행되었을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만…….”
운현은 염려를 거두지 못했다.
박 공공은 운현에게 대단히 소중한 친인(親人)이니 말이다.
만의 하나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게 된다면 운현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마교에 대해서는 어찌하실 작정인가요?”
모용미가 물었다.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조정은 군을 움직일 것입니다. 난주가 위험하다면 이미 민심 같은 걸 걱정할 때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군이 움직인다면.”
쓴웃음을 지으며 운현은 말했다.
“개인이 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군대와 군대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일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설령 창룡맹의 맹주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지는 않으실 것 같군요.”
모용미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그녀의 한숨은 운현의 안전을 염려한 것이리라.
운현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네.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작정입니다.”
영호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미 역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따각, 따각.
각자 생각에 빠진 사람들을 싣고 마차는 남경의 천하제일루로 거침없이 달려갔다.
마차 밖으로 지나는 화려한 남경의 거리를 빙설과 객옹만이 그저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
천하제일루는 여전히 놀라웠다.
장로들과 절정고수들은 물론이고 온갖 화려한 것에 익숙한 가주들도 천하제일루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놀랍군. 이건 이제 구할 수 없다고 알려진 서화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군자검 제갈명이었다.
온갖 것에 박식한 그는 천하제일루의 건축 양식부터 그림과 글씨, 조각 같은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철검 남궁벽과 비검 공손월 역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천장과 벽을 환하게 비추는 은은한 빛은 어디서 들어오는지 알 수 없어서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허어. 이곳을 별유천지라 한다더니 과연 여기서는 시간조차 잊겠구려.”
천수 신니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화산의 태을 진인과 무당의 청송 진인은 물론 노부인 능세영도 놀라움을 드러냈다.
금화영은 눈을 반짝이며 아예 입을 떡 벌리고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뒤늦게 도착한 운현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단지 이곳에 후원을 한 것뿐이지만 이처럼 천하제일루에 감탄하는 일행의 모습을 보니 내심 흐뭇했다.
자박, 자박.
문득 들려온 발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이곳의 누주인 월향이 호위인 연화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아, 누주.”
운현이 반가운 표정을 짓자 월향은 미소를 지었다.
예인으로서는 이미 한창때를 넘겼다지만 그녀는 여전히 우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운현 앞에 멈춘 월향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꽂혀 있는 오색 머리장식이 불빛 아래 흔들리며 반짝였다.
“어서 오세요.”
월향의 예에 운현은 웃으며 답례했다.
“오랜만입니다. 누주님.”
사락.
고개를 든 월향이 미소를 지었다.
웃는 그녀의 모습은 일행의 시선을 빼앗을 정도였다.
“건강하신 모습을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주인 어르신.”
운현은 화들짝 놀랐다.
일행의 시선도 단번에 운현을 향했다.
“저기, 그 호칭은…….”
운현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월향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알아요. 어르신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시겠지만 예인의 규율이 엄격하니 저도 어쩔 수 없군요. 게다가 대인께서는 이곳의 주인이시자 저희의 보호자시니 마땅히 어르신이라 부를 수밖에요.”
조리 있는 설명이었지만 운현은 더욱 난처해졌다.
운현이 말한 것은 ‘어르신’보다 사실 그 앞 단어였기 때문이다.
천수 신니가 한숨을 쉬고, 가주들의 능글맞은 시선이 운현에게 쏟아졌다.
그사이 월향은 객옹에게도 예를 표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장로와 가주, 그리고 절정고수 들을 바라보았다.
사락.
월향은 두 손을 가슴에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듯 귀한 분들께서 찾아 주시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각별한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고개를 들고 눈을 빛내며 월향은 말했다.
“오직 주인 어르신과 그 손님들께만 허락된 천하제일루 최고의 자리지요.”
그 말은 특히 가주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는 천하제일루, 그중에서도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자리라니 말이다.
“호오, 기대가 되는군.”
제갈명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월향은 미소를 머금었다.
“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녀의 당당한 눈빛은 제갈명으로 하여금 미소 짓게 했다.
다른 가주와 장로, 절정고수 들도 기대를 품고 월향의 안내를 따라 움직였다.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위험한 순간은 지나갔지만 이상한 오해는 더욱 깊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걸음을 옮기려던 운현은 문득 모용미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가시지요, 모용 소저.”
“아, 네.”
무언가 생각하고 있던 모용미는 미소를 지었다.
운현은 그녀와 함께 일행의 뒤를 따랐다.
사박, 사박.
나지막한 발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천하제일루의 화려한 복도를 느긋하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