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급보(急報)
중후한 중년 도사의 모습은 단번에 변했다.
무당의 진언으로 청량한 기운이 퍼져 나가자 중년 도사는 발작적으로 검을 뽑으며 일어섰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눈이었다.
온통 새카맣게 변한 그 눈은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헉!”
옆에 있던 남궁범철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기이한 술법과 독심술로 그들을 감탄하게 했던 중년 도사가 갑자기 저런 섬뜩한 눈을 드러낼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그러나 총감찰 남궁비연은 놀라지 않았다.
“역시, 마교였구나.”
정체를 드러낸 중년 도사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렇다. 나는 위대하신 천마를 따르는 자다. 그런 나를 한낱 도술 따위로 어찌할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서늘한 적의를 숨기지 않으며 마교도가 말했다.
“내 너희를 이 자리에서 찢어 죽이리라!”
후우우.
마교도가 든 검에서 검은 기운이 안개처럼 서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코 검명도, 검기도 아니었다.
“제압해!”
남궁비연이 외쳤다.
그녀와 함께 온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총감찰 남궁비연은 물론, 오른팔인 남궁진휘 역시 검을 들었다.
쉬쉬식.
무사들의 검이 마교도를 향해 거침없이 짓쳐 들었다.
노리는 곳들은 하나같이 엄중한 부상을 입힐 만한 요혈들이었다.
하지만 마교도는 오히려 크게 검을 흩뿌렸다.
후우욱.
한순간 그의 검에서 섬뜩한 기운이 일어났다.
그리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뒤를 이었다.
카가강.
무사들의 검은 남궁세가의 명성이 무색하게 튕겨 나갔다.
하지만 남궁비연과 남궁진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파박.
“큭!”
남궁비연과 남궁진휘의 검은 마교도의 양어깨를 정확히 찔러 갔다.
그러나 내력이 담긴 검격에도 불구하고 마교도는 멀쩡했다.
“하찮은 것들이 감히!”
노기에 가득한 목소리로 마교도가 외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이어지지 못했다.
훅.
검 한 자루가 마교도를 향해 짓쳐 들었다.
유려한 자태에 파사의 기운을 지녀 도사들이 많이 사용하는 흔한 송문고검이었지만 지금은 확연히 달랐다.
그 검에 일렁이는 범상치 않은 파사의 기세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교도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서걱.
무당의 노도사가 내지른 송문고검은 마교도의 가슴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컥.”
마교도가 신음을 흘렸다.
남궁비연과 남궁진휘의 검에 어깨를 찔리고도 멀쩡히 소리치던 그가 노도사의 검에 가슴을 관통당한 것이다.
“……이건 뭐냐?”
마교도는 새카만 눈을 들어 노도사를 바라보았다.
“어찌 이런 기운을…….”
노도사는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그는 대답 대신 송문고검을 그어 올렸다.
서걱.
마교도의 가슴은 반으로 쩍 갈라졌다.
남궁세가의 무사들조차 얼굴을 굳힐 정도의 처참한 광경이었지만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크흐흐.”
가슴의 절반이 갈라진 채로 마교도는 말했다.
“이것으로 끝이라 생각지 마라. 나는 그저 천마를 따르는 수많은 자들 중 하나일 뿐이다. 마교는 결코…….”
쉭.
송문고검이 마교도의 목을 그었다.
마교도의 머리가 전각 바닥에 떨어졌다.
퉁.
잘린 머리는 전각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곧 시커먼 핏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치이익.
“으헉!”
장로 남궁명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녹아내린 마교도의 머리와 몸이 희미한 연기를 피워 올리며 옷과 바닥을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범철과 남궁채린의 안색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총감찰 남궁비연을 향해 소리치던 조금 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스릉.
노도사는 검을 거두었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시게.”
청량한 목소리로 노도사는 말했다.
“마에 물든 자들과 대화하는 것은 어리석고 위험한 일이니.”
“감사해요, 진인.”
총감찰 남궁비연은 노도사에게 예를 표했다.
허름한 복색을 하고 있지만 이 노도사는 무당의 장로였다.
그는 창룡맹이 세운 마교에 대한 방책에 따라 이미 여러 날 전부터 이곳 남궁세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초기에 막았으니 천만다행이외다.”
노도사는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남궁비연은 무사들을 향해 명했다.
“이자들을 압송하라!”
“네!”
무사들은 즉시 남궁비연의 명을 실행했다.
그들은 장로 남궁명과 아들 남궁범철, 그리고 손녀인 남궁채린을 끌고 나갔다.
“뭐, 뭐야! 이거 안 놔? 나도 피해자라고! 야! 비연! 너 정말 이럴 거야?”
남궁채린이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지만 무사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세가의 장로인 남궁명의 표정은 이미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마교도를 세가 안에 들인 데다 총감찰 앞에서 자신의 손님이라 단언했으니 말이다.
그들이 끌려 나간 후, 노도사는 조용히 말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자들도 모두 구금하시게. 뒤를 캐어 보면 마교도와 연관된 자들이 있을 것일세.”
“알겠어요.”
남궁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도사는 자신이 쓰러뜨린 마교도를 돌아보았다.
남은 것은 이미 타들어 간 흔적뿐이었지만 노도사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교도가 남궁세가까지 손을 뻗치다니…….’
노도사는 자신도 모르게 도호를 외웠다.
무력을 지닌 무림세가에까지 손을 뻗었다면 일반적인 권문세가들의 상황은 어떠하랴?
남궁세가에 숨어들려던 마교를 제거했지만 노도사의 마음은 어둡기만 했다.
***
운현 일행에게 급보가 전해진 것은 대운하를 따라 남경에 도착했을 때였다.
배에서 내리던 운현 일행은 문득 발을 멈췄다.
관의 표기를 단 전령이 부두로 말을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두두두.
부두로 들어선 전령은 말에서 내리며 외쳤다.
“조 대인! 조 대인은 어디 계십니까!”
설마 싶어 바라보던 운현은 감찰어사 조관을 돌아보았다.
조관은 배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전령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
전령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조 대인이십니까?”
“그렇네.”
조관은 전령에게 은밀히 자신의 신분패를 보여 주었다.
전령은 그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즉시 남경부로 오시라는 전언입니다.”
조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암행을 하는 건 아니라지만 임무를 수행 중인 감찰어사에게 이런 전언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조관은 운현에게 예를 표하고 말했다.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십시오.”
운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남경에 도착했으니 급할 것은 없었다.
조관과 항장익은 일행에게 예를 표한 후 전령과 함께 부두를 떠났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모용미가 운현에게 물었다.
운현은 그녀에게 답했다.
“긴 여정이었으니 이곳에서 잠시 여독을 풀지요.”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무예에 뛰어난 이들이라도 오랜 여행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는 건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군요. 그럼…….”
모용미가 무어라 하려던 때였다.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 불쑥 말했다.
“이곳 남경의 천하제일루가 요즘 유명하다던데, 맹주께서도 아시오?”
“아, 그건…….”
“나도 들어 보았소.”
철검 남궁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마다 극찬을 하더이다. 손님의 격을 따지는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아니라 하고.”
“천하제일루라고?”
아미의 천수 신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모용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얼마 전 남경에 세워진 기루예요. 예인들의 기예가 뛰어나고 대단히 화려해서 별유천지(別有天地)라고도 불린다더군요. 신니께서 생각하시는 기루와는 조금 달라요.”
살짝 인상을 쓰던 천수 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탐탁잖은 표정은 여전했다.
“그렇게 유명하다면 이 기회에 가 보는 것도 좋지 않겠소?”
비검 공손월이 말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며 여독을 푸는 것도 사뭇 즐거운 일이니까.”
“동감일세.”
관일검 모용단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요.”
모용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리 천하제일루라지만 어르신들께서 한꺼번에 가시면 감당하기 힘들 거예요. 우선 기별을 해서 준비를 하도록…….”
따각, 따각.
모용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여러 대의 마차가 부두를 향해 들어왔다.
하나같이 크고 검은색 윤기가 흐르는 마차들은 단번에 일행의 시선을 끌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총군사께서 나오셨군요.”
달칵.
아니나 다를까, 운현의 말처럼 영호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멋진 미소를 지으며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운현은 웃는 낯으로 그에게 답례했다.
총군사 영호준은 장로와 가주 들, 그리고 절정고수들에게 일일이 예를 표했다.
객옹에게는 물론이고 군사로 수고한 모용미에게도 감사의 예를 잊지 않았다.
“이 마차들은 다 뭔가?”
군자검 제갈명이 물었다.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천하제일루에서 보낸 마차입니다.”
“천하제일루?”
제갈명은 놀란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천하제일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 아니었던가?
“자네가 준비했나?”
철검 남궁벽이 영호준에게 물었다.
그러나 영호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천하제일루의 누주가 여러분을 모시고자 보낸 것입니다. 맹주님께서 여러 어르신들과 함께 남경에 오셨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며 말입니다.”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운현에게 향했다.
모용미 역시 놀란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천하제일루의 누주와 운현이 아는 사이인 것도 놀랍지만, 이렇게 크고 호화로운 마차를 보내 맞이할 정도라니 말이다.
운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 그게…….”
“당연히 그리하겠지.”
객옹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이가 주인이니까.”
“네?”
모용미가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장로와 가주 들, 능세영과 금화영 역시 눈을 크게 뜨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며, 명목상 그런 것뿐입니다.”
운현은 얼른 말했다.
“본래 예인들이 멸시받는 일이 많다기에 그저 조금 도움을 준 것뿐이지, 딱히 제가 관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설명은 먹히는 듯했다.
하지만 제갈명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천하제일루의 예인들은 하나같이 절색이라던데…….”
나지막한 그 말은 분위기를 단번에 바꿔 버렸다.
천수 신니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리고 가주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호오, 맹주께서도 풍류를 즐길 줄 아시는군.”
“창룡맹의 맹주라면 당연히 그럴 만도 하지.”
공손월은 감탄했고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쉬던 천수 신니도 혀를 차고는 말했다.
“하긴 맹주께서도 남자이니……. 허나 무엇이든 과한 건 좋지 않소이다.”
운현은 억울했지만 아무 변명도 하지 못했다.
객옹이 한 말을 아니라 할 수도 없는 데다 천하제일루의 주인인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무당의 청송 진인은 무덤덤해 보였지만 화산의 태을 진인은 오히려 관심을 보였다.
노부인 능세영과 금화영도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영호준은 웃으며 말했다.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천하제일루로 가시지요. 좋은 차와 멋진 자리가 어르신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지.”
일행은 기꺼이 마차에 올랐다.
장로들과 천수 신니, 혜천도 마찬가지였다.
따각, 따각.
커다란 검은 마차는 차례로 부두를 떠났다.
남은 사람은 운현과 객옹, 모용미, 영호준 그리고 빙설이었다.
“맹주님.”
마차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총군사 영호준이 말했다.
웃음이 가득하던 그의 표정은 어느새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급히 알려 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운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영호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감숙에서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운현의 얼굴이 굳었다.
모용미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랐고 객옹의 눈살 역시 일그러졌다.
“마교입니까?”
운현의 말에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확인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또 다른 문제요?”
영호준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조정에 큰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