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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79화 (479/530)

479화. 침식(侵蝕)

일대상인은 용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은 어두움에 싸여 있었지만, 커다란 용의 형상을 조각한 의자는 주인의 위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슥.

일대상인은 문득 눈을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던 용좌의 주변에 강렬한 기세가 일렁였다.

“주군.”

독요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화사한 붉은 옷과 빼어난 그녀의 미모는 어두움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듯했다.

하지만 일대상인 옆에 서 있는 인태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슥.

독요는 고개를 들었다.

공손한 눈빛으로 일대상인을 우러러보며 독요는 입을 열었다.

“혈교가 무너졌어요.”

“알고 있다.”

독요는 놀라지 않았다.

일대상인이라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어도 당연했으니까.

“그리고 이것이.”

사락.

독요는 옆에 내려놓은 목함을 열었다.

“혈교의 마검과 혈옥이에요.”

달칵.

목함 안에는 갓난아이의 머리만 한 구슬과 그리 길지 않은 소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영롱한 빛을 발하는 구슬은 인태상조차 한순간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구슬이 뿜어내는 요사스러운 기운 역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우우웅.

“쯧.”

인태상은 혀를 찼다.

“감히 그런 요사한 물건을 주군께 가져오다니…….”

말하던 인태상은 멈칫했다.

일대상인이 그 구슬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인태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주군께서?’

그의 주군인 일대상인은 단 한 번도 신외지물(身外之物)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

유일한 예외는 일대상인의 검, 천하(天下)였다.

그조차 그저 대단찮은 표정이었는데 이리도 노골적인 관심을 보이다니, 그것도 저 요사한 혈옥을 상대로 말이다.

인태상의 가슴이 순간 불안으로 물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였다.

“……필요 없다.”

일대상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묵직하고 담담했다.

이때다 싶은 인태상은 얼른 독요에게 말했다.

“뭐 하느냐? 어서 썩 치워라.”

독요는 고개를 숙였다.

달칵.

목함이 닫히고 혈옥과 마검이 모습을 감췄다.

인태상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안도는 곧 독요에 대한 짜증으로 변했다.

‘저 요사스러운 것이…….’

일대상인은 진혼령을 내린 이후 용좌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인태상은 그런 일대상인을 염려하여 한시도 쉬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런 인태상으로서는 단 한 순간이라도 일대상인의 시선을 빼앗은 혈옥이, 그리고 그것을 가져온 독요가 마음에 들 리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아뢸 것이 없다면 가라.”

툭 던지듯 인태상이 말했다.

그러나 독요는 일어서지 않았다.

“혈교가 무너진 후 창룡맹의 인물들은 항주로 향했어요. 그리고 저는…….”

오직 일대상인만을 바라보며 독요는 말했다.

“창룡검주를 보았습니다.”

그 말에는 인태상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인태상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아득.

길고 하얀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일대상인 앞에서 분노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어떠하더냐?”

일대상인이 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희미한 감정이 스쳐 지났다.

적의나 분노라기보다는 차라리 친애에 가까운 그 감정은 독요에겐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찰나에 스쳐 지난 것이라 해도.

“그는 어리석고 무모해요.”

인태상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독요는 말을 이었다.

“스스로 비범한 존재이면서도 평범을 가장하며, 하찮은 친인들에 둘러싸여 즐거워합니다. 그러면서도 감히 하늘이신 주군께 대적하고자 하니 이처럼 어리석고 무모한 자가 어디 있을까요?”

독요는 입술을 깨물었다.

매혹적으로 빛나던 붉은 입술이 새하얀 치아 아래 일그러졌다.

“그는 참으로 끔찍합니다.”

인태상은 독요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평가에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창룡검주 운현은 악몽이다.

실제로 인태상은 아직까지도 그가 문왕을 베어 버리던 때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치곤 했다.

어쩌면 일대상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도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함인지도 몰랐다.

“……그는 어리석다.”

일대상인의 목소리에 인태상은 눈을 들었다.

독요 역시 고개를 들어 일대상인을 바라보았다.

일대상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모하기도 하지. 하지만…….”

가벼운 웃음이 일대상인의 입가를 스쳐 지났다.

인태상도, 독요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에 그가 나를 지고의 좌로 이끌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일대상인은 뒤로 몸을 기대며 두 손을 깍지 꼈다.

그 모습은 사뭇 느긋하고 흡족해 보였다.

“놓아두어라. 그 역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니.”

독요는 즉시 고개를 조아렸다.

까닭 모를 분노와 본능적인 적의도 일대상인의 명 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인태상의 표정 역시 밝았다.

일대상인이 이처럼 많은 대화를 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인태상은 염려를 덜 수 있었다.

혈교와 마교에 힘을 전한 이후 용좌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던 일대상인에 대한 염려를 말이다.

일대상인은 다시 침묵했다.

용좌에 조각된 용의 형상만이 희미한 불빛 속에 일렁였다.

***

촤아아.

공동산을 떠난 운현 일행은 서안을 거쳐 황하를 따라 이동했다.

일행의 분위기는 밝았다.

장로와 가주 들도, 그리고 절정고수들의 표정에도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함께 혈교에 맞서 싸웠다는 유대감이 서로를 친밀하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은 신경전이 벌어졌지만 모용미가 적절히 중재에 나서서 심각한 다툼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항주 창룡맹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는 달리 가까운 어르신들을 모시고 유람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믿기지가 않네요.”

모용미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대정파의 장로님들과 세가의 가주님들이 이렇게 친해지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 게다가 능 어르신과 금 여협, 그리고 빙설 소저까지 말예요.”

운현은 빙긋 웃었다.

빙설은 여전히 냉담했지만 능세영과 금화영은 장로와 가주 들과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특히 가주들은 차가운 빙설에게도 넉살 좋게 말을 걸곤 했다.

비록 빙설의 반응은 없었지만 말이다.

“마교가 어떻게 나올까요?”

문득 모용미가 물었다.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끝났으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겠지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모용미를 돌아보며 운현은 말했다.

“하지만 저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용 소저.”

그러나 모용미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않아요.”

운현을 바라보며 모용미는 말했다.

“하지만 단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약속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 운현에게 모용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반드시 돌아와 주신다고요.”

운현은 가슴이 뭉클했다.

예전에 그녀는 ‘운 학사님은 절대 혼자가 아니에요’라고 말해 주었다.

‘언제든지 모용세가로 와도 괜찮다’고도 말했다.

그런 그녀가 반드시 돌아와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꼭 그리하지요.”

모용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운현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

안휘성 성도 합비, 남궁세가.

총감찰 남궁비연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걸어갔다.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뒤를 따르는 남궁세가의 무사들 역시 날카로운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방계이자 이전에 잠룡 선발전에도 나섰던 남궁진휘 역시 남궁비연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저벅, 저벅.

그들은 곧 커다란 전각 앞에 이르렀다.

남궁세가 내에서도 이렇게 큰 전각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가문의 직계이자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뿐이었다.

비록 실세는 아니라 하더라도 가주 철검 남궁벽조차 예의를 갖춰야 하는 가문의 어른들 말이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전각 앞을 지키던 백발의 노복이 물었다.

총감찰 남궁비연과 무사들의 삼엄한 기세는 세가의 일에 익숙한 노복조차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비켜라.”

남궁비연이 싸늘하게 말했다.

평소 온화하고 예의 바르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언행이었다.

“안 됩니다. 어르신께서는 지금 귀한 손님을…….”

슥.

옆에 서 있던 남궁진휘는 노복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남궁진휘는 노복의 어깨를 잡고 옆으로 밀었다.

“어, 어어.”

노복은 남궁진휘의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그나마 나뒹굴지 않은 것은 그의 배려였다.

“머, 멈추십시오!”

노복이 다급히 말했지만 총감찰 남궁비연은 상관하지 않았다.

저벅.

남궁비연과 남궁진휘는 뒤따르는 이들과 함께 전각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벌컥.

문이 열리고 전각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남궁세가의 장로 남궁명이 수염을 기른 중년의 도인과 마주 앉아 차를 나누고 있었다.

남궁명의 아들인 남궁범철, 그리고 손녀인 남궁채린도 함께였다.

“무엇인가?”

남궁명이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남궁비연이 총감찰이라 해도 가문의 어른에게 이처럼 행하는 것은 분명 무례였기 때문이다.

“감찰을 행하는 중이에요.”

남궁비연은 짧게 말했다.

가문의 어른을 향한 예의는 물론이고 한 줌의 경의조차 없었다.

“감찰?”

남궁명이 반문했다.

그의 아들인 남궁범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

남궁범철은 평소부터 남궁비연에 대해 탐탁잖게 여기고 있었다.

장로인 남궁명을 부친으로 두었음에도 남궁범철은 실세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들 역시 현 가주 철검 남궁벽을 흔들던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남궁채린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남궁비연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앙칼진 소리로 말했다.

“비연, 총감찰의 감투를 쓰더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졌어? 가문의 어르신께 이런 무례를 행하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그러나 남궁비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슥.

남궁비연은 장로 남궁명과 마주 앉은 중년의 도사를 바라보았다.

“이자는 누구지요?”

“이자라니! 네가 아직도……!”

장로 남궁명은 손을 뻗어 아들 남궁범철을 제지했다.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남궁비연에게 말했다.

“내 손님이시다.”

분노 서린 눈빛으로 남궁명은 말을 이었다.

“네 아비도 나와 내 손님께 이렇게 하지 못하겠거늘, 네가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가문의 벌을 피하리라 여기느냐?”

장로인 남궁명이 책망하자 남궁범철과 남궁채린은 덩달아 기세가 등등해졌다.

“그래! 이건 전적으로 비연이 네가 책임져야…….”

“이미 말했을 텐데요?”

남궁채린의 말을 끊으며 남궁비연은 답했다.

“이것은 감찰이라고. 당장 밖으로 끌어내려 무릎 꿇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아세요.”

“뭐, 뭐야?”

“네가 감히!”

남궁채린과 남궁범철이 눈을 부릅떴다.

장로인 남궁명의 표정도 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남궁비연은 그들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진인.”

“알겠소.”

저벅.

남궁비연과 함께 온 노도사가 앞으로 나섰다.

전각 안에 있던 도인과 달리 복색도 초라하고 인상도 평범해 보이는 노도사였다.

도인의 복색만 아니었다면 세가에서 허드렛일하는 하인으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노도사가 손을 모으고 진언을 외우기 시작하자 상황이 변했다.

우우웅.

그것은 무당파의 진언이었다.

노도사의 눈동자가 은은히 빛나기 시작하고 주변에 청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윽!”

콰당.

점잖게 앉아 있던 중년의 도사가 벌떡 일어났다.

잘생긴 그의 표정은 와락 일그러져 있었다.

“무당의 부스러기 따위가 감히 누구 앞에서!”

파박.

그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검을 뽑았다.

중년 도사의 눈은 이미 새카맣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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