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잊혀진 자들[亡者]
사박, 사박.
모용미는 단아한 모습으로 운현에게 다가왔다.
산의 찬바람 탓인지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아, 모용 소저.”
“수고하셨어요. 맹주님.”
운현이 미소를 머금었다.
“천만에요. 모용 소저야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한 것이 있나요.”
모용미는 고개를 저었다.
“모두 맹주님과 어르신들께서 애써 주신 덕분이지요. 그래도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다.
깐깐한 장로와 가주 들의 마음을 녹인 것은 바로 모용미의 이런 마음이리라.
“네. 그렇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화약까지 사용하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네. 아, 화약은 조 대인을 통해 관부로 이송했어요.”
모용미가 준비한 최후의 수단은 바로 화약이었다.
비록 군의 화포를 운용할 수는 없었지만, 조관이 준비해 준 화약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화약과 화포에 대한 것이 군의 기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조치이자 최후의 수단이라 할 만했다.
“혹시 감숙의 관부에 대한 감찰을 시작하실 건가요?”
“아직은 아닙니다.”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성급히 감찰을 시작했다가 흐지부지되면 오히려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게 되지요. 아직 마교의 위협이 남아 있으니 좀 더 신중히…….”
슥.
말하던 운현이 고개를 돌렸다.
“맹주님?”
모용미는 운현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운현이 바라보는 곳은 공동산 중턱이었다.
푸른 나무와 바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지만, 운현의 눈동자는 날카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
독요는 그자가 창룡검주 운현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의 용모파기를 이미 본 적이 있는 데다가, 창룡맹 일행 중 젊은 남자는 승려인 혜천과 감찰어사 조관 외에는 맹주 운현뿐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제대로 얼굴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먼 거리였지만 독요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흐응.”
독요는 무심한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평범해 보이네.”
그녀에게 평범하다는 것은 최저이자 최악의 평가였다.
없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니까.
독요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창룡맹의 맹주이자 창룡검주라 불리는 남자가 저런 모습이라…….’
그가 창룡검주라는 것을 몰랐다면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평범해 보이는 남자는 창룡맹의 맹주, 운현이다.
문왕을 베었고 무제가 그를 상대로 투지를 불태우며 인태상조차 이를 가는 사람.
무엇보다 그는 일대상인이 관심을 두는 유일한 존재 아닌가?
독요는 혀를 내밀어 자신의 붉은 입술을 핥았다.
‘한번, 찔러 볼까?’
강호 무림의 기인들 중에는 갑자기 성격이 돌변하는 이들이 있다.
적당한 자극을 가하면 창룡검주도 평범의 탈을 벗고 본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암습을 가한다든가 혹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망가뜨리는 것 말이다.
‘때마침 적당한 대상도 있고.’
그녀의 시야에 아름다운 모용미가 보였다.
창룡검주를 향해 호의와 애정을 보이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여전히 저런 모습일까?
상상만으로도 독요는 아찔한 희열을 느꼈다.
‘그래, 저 정도면…….’
어쩌면 창룡검주의 민낯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평범과 온화함의 탈 뒤에 숨어 있는 창룡검주의 진짜 얼굴을.
독요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슥.
운현이 고개를 돌렸다.
‘웃!’
독요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일 리 없는 운현의 눈동자가 마치 눈앞에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향한 서늘한 그 눈빛은 한순간 강렬하게 그녀의 뇌리에 새겨졌다.
휘릭.
독요는 즉시 몸을 돌렸다.
꼴사납다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저 시선을, 저 서늘한 눈빛을 피하는 것만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사라락.
독요는 순식간에 공동산의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무엇이 있었나요?”
모용미의 목소리에 운현은 시선을 돌렸다.
사뭇 염려 섞인 모용미의 표정에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그보다 잠시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이곳 공동파에는 볼만한 곳이 많더군요.”
모용미는 반색을 했다.
폐쇄적인 공동산의 도관들은 다른 곳에 비해 신비한 장소들이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쁜 것은 운현이 산책을 권했다는 사실이었다.
“네, 운 학사님.”
모용미는 환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와 함께 산책을 시작했다.
사박, 사박.
두 사람은 천천히 공동파 경내를 거닐었다.
모용미는 여동생 모용상아의 키가 자랐다거나, 철검 모용진이 외당 당주의 일을 훌륭히 감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산의 찬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훈훈하기만 했다.
휘릭.
독요는 쉬지 않고 질주했다.
나뭇가지에 그녀의 옷이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흐트러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오직 운현에게서, 아니 그 눈빛에서 멀어지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탁.
공동산을 완전히 벗어나서야 독요는 멈춰 섰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독요는 뒤를 돌아보았다.
따라올 리가 없다고 머리로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불안감은 분명한 확인을 요구했다.
사락.
독요는 흠칫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린 것뿐이었다.
‘대체 내가 왜…….’
독요는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이렇듯 황급히 도주할 이유는 없었다.
거리가 멀었으니 그저 몸을 숨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도망했다.
운현의 눈빛으로부터, 그 서늘한 시선으로부터 말이다.
그 순간 독요는 무엇인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분노와 증오, 그리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적의였다.
“욱.”
독요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목구멍을 타고 치솟아 오르는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웩!”
그것은 피였다.
자신이 토혈을 한 것이다.
시커먼 피는 독요의 손을 적시고 붉은 비단옷을 더럽혔다.
독요는 피가 가득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뭐지? 설마…….’
절정고수의 경지를 넘어서면 단지 의념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했다.
혹시 운현은 그런 경지에 오른 것일까?
그래서 그 수법에 자신이 당한 것일까?
‘아니야.’
독요는 이를 악물었다.
피로 물든 그녀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두려움과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감당 못해 피를 토해야 할 정도의 적의가, 이해할 수 없는 분노와 증오가 그녀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천적을 만난 짐승의 본능적인 적개심과도 같았다.
“……대체 넌 누구야?”
이를 갈며 독요가 중얼거렸다.
“왜 이런 감정이 솟아나는 거지?”
그러나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건 상관없을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그를 향한 적의가, 그리고 불같은 증오가 독요를 온통 뒤덮고 있다는 사실이니까.
아득.
독요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토혈로 더럽혀진 독요의 붉은 입술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녀의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운현의 눈동자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
깊은 밤, 어둠에 잠긴 산속을 누군가 오르고 있었다.
검은 외투를 걸친 중년인은 짐승들의 위협 따윈 개의치 않는 듯, 불도 없이 험한 산속을 걸어갔다.
길을 잃어 헤매는 일도, 숨이 차거나 쉬는 일도 없었다.
그는 바로 마교의 호법인 환마(幻魔)였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환마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후, 환마는 정상 부근의 넓은 공터에 도착했다.
다른 곳과 달리 나무도 거의 없고, 듬성듬성 풀이 자란 흙무더기가 주위를 둘러싼 곳이었다.
저벅.
환마는 발을 멈췄다.
이곳은 과거 거대한 산성(山城)이 존재하던 곳이었다.
한때는 수많은 군사가 주둔하던 군사 요충지이자 요새였던 이 산성은, 그러나 지금은 푸른 달빛만이 비추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무너진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이 폐허에는 풀이나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저주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원령이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흔한 위령제는 물론이고 비석조차 세울 수 없었다.
이 산성에서 죽은 이들은 현 황실의 설립 초기, 초대 황제와 대립하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황실은 이 산성을 완전히 불태우고 무너뜨렸다.
산 자는 죽이고 이미 죽은 자들까지 불에 태웠으며, 재와 석회를 뿌려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사람은 물론 산짐승들까지 피하는 폐허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후후후.”
환마는 웃음을 흘렸다.
과연 이곳에 서려 있는 원념과 사기(邪氣)는 대단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환마를 기쁘게 했다.
사락.
그는 몸을 낮췄다.
그리고 깡마른 손을 뻗어 흙바닥에 대었다.
후우우웅.
환마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그와 함께 음산한 기운이 물결치듯 사방으로 번져 갔다.
그것은 곧 검은 안개 같은 형상이 되어 주위를 뒤덮었다.
후우우욱.
환마가 뿜어내는 기운은 더욱 강해져 갔다.
검은 안개는 새카만 늪처럼 산성을 온통 삼켜 버렸다.
다음 순간, 환마의 입술이 조용히 달싹였다.
“깨어나라.”
꿈틀.
끈적한 안개가 출렁였다.
그리고 주변의 흙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콰드득, 콰득.
섬뜩한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땅을 헤치며 일어서고 있는 이들은 바로 시신들이었다.
뼈가 부서지고 가루가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지독한 원념이 그들의 뼈를 대신하고 검은 안개가 그들의 살을 이루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고 잊혀진 자들[亡者]이 환마의 부름에 응답하여 다시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쿠드득, 쿠득.
죽은 자들은 끊임없이 다시 일어섰다.
어느새 폐허는 죽음에서 일어선 자들로 가득했다.
환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후우우웅.
수천에 이르는 자들이 음산한 기운을 흘리며 서 있었다.
갑주를 입고 병장기를 든 형상인 것은 생전의 원념이 구현화된 탓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들은 곧 살과 피를 얻을 것이고 진짜 갑주와 병기를 쥘 것이다.
“나는 환마다.”
죽음에서 일어난 이들을 바라보며 환마가 말했다.
섬뜩한 시선들이 일제히 환마를 향했다.
“천마의 이름으로 내가 너희를 일으켰으니 이제부터 너희는 산 자의 살을 씹고 그 피를 마실 것이다.”
그 목소리는 사방에서 웅웅거리듯 울렸다.
환마의 눈동자 역시 사이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슥.
환마는 손을 뻗었다.
“내가 명하노니, 너희를 잊은 채 안일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어리석은 자들에게 죽음을 뿌려라.”
쩌억.
죽은 자들이 입을 벌렸다.
소리도 없고 고함도 없었다.
그러나 휘몰아치는 원념을 환마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후우우우웅.
산이 숨을 죽이고 달빛마저 모습을 감췄다.
망자들의 원념과 사기가 폭풍처럼 요동치는 가운데 환마는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