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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77화 (477/530)
  • 477화. 마검(魔劍)

    메마른 땅이 펼쳐진 광대한 황야.

    대설산이 아스라이 보이는 메마른 황야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붉은 비단옷과 하늘거리는 겉옷이 마치 한 송이 꽃 같은 그 여인은 바로 독요였다.

    “흥.”

    독요는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흘렸다.

    “너 따위가 내 눈을 벗어날 줄 알았어?”

    그곳에는 부서진 마차와 바싹 마른 시신 한 구가 누워 있었다.

    죽은 지 수십 년은 지난 것 같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조금 전 독요의 손에 목숨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슥.

    독요는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들어 올렸다.

    죽은 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던 것이었지만, 이제는 독요의 손을 막을 수 없었다.

    파스스.

    시신이 부서지며 목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사꾼들이 가끔 등에 지고 다니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함이었다.

    둔탁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독요는 상관하지 않았다.

    콰직.

    단단한 쇠뭉치가 독요의 손에서 부서졌다.

    독요는 서슴없이 목함을 열었다.

    후두둑.

    목함에 있던 것들이 땅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텅 빈 목함도 곧 시신 위로 떨어져 내렸다.

    파삭.

    “흐응.”

    독요가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이것이 혈옥인가?”

    우우웅.

    나지막이 울음을 흘려 내는 커다란 구슬이 독요의 손에 들려 있었다.

    갓난아이의 머리만 한 혈옥은 햇빛 아래 영롱한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가히 누구라도 홀릴 듯 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혈옥은 사람의 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치이익.

    섬뜩한 소리와 함께 구슬을 받쳐 든 독요의 손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손이 타고 있는 것이다.

    독요는 조소를 머금었다.

    “흥. 한낱 구슬 따위가…….”

    휙.

    독요는 가볍게 혈옥을 던졌다.

    그녀의 손을 떠난 혈옥은 땅에 놓인 목함 안에 정확히 들어갔다.

    텅.

    목함 안에서 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지만 독요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신 옆에서 다시 무엇인가를 들어 올렸다.

    사락.

    그것은 천으로 둘둘 말린 막대기 같은 것이었다.

    독요가 거침없이 천을 풀어내자 가죽 칼집에 싸인 짤막한 소검이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스릉.

    독요는 검을 뽑았다.

    그것은 검신부터 손잡이까지 통으로 이어진 검이었다.

    손잡이와 칼날 중간에 뿔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손을 보호하는, 실전보다는 예식에 쓰일 법 한 검이었다.

    “흐음.”

    독요의 매혹적인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소검의 칼날은 햇빛 아래 서늘한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독요의 표정은 그리 탐탁치 않았다.

    “확실히 괜찮은 검이긴 하지만.”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독요가 말했다.

    날카로운 칼날과 범상치 않은 모습은 누구나 탐낼 만한 명검으로 보였다.

    하지만 일그러진 독요의 눈살은 펴지지 않았다.

    “이게 혈마인들을 깨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검이라고?”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들을 옮기던 혈교의 사제는 지금 독요의 발아래 바싹 마른 시신이 되어 누워 있기 때문이다.

    휘릭.

    독요는 가볍게 손을 돌려 검을 휘둘러 본 후 다시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 목함 안으로 휙 던졌다.

    텅.

    “가지고 와.”

    독요가 목함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

    스륵.

    허공에서 목소리가 나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무복을 입은 그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독요에게 예를 표했다.

    하지만 독요는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며 독요의 붉은 옷자락을 휘날렸다.

    메마른 황야 너머로 보이는 아스라한 대설산은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요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상인께서 기뻐하셨으면 좋겠는데…….”

    대설산도, 혈교의 지보(至寶)라는 혈옥과 마검도 그녀에겐 상관없었다.

    말없이 대설산을 바라보던 독요는 고개를 돌렸다.

    “혈교는 어찌 되었지?”

    “창룡맹과 공동파가 연합하여 청해호로 향했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흐응.”

    독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혈교도, 창룡맹이나 공동파도 독요에겐 관심 밖이었다.

    누가 이기고 지는지도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싸움의 승패가 일대상인이 내린 진혼령에 영향을 줄 것은 분명했다.

    “연합을 이끄는 자는 창룡맹의 맹주였나?”

    “네. 창룡검주 운현입니다.”

    “운현이라…….”

    그에 대해 독요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문왕을 죽인 자이자 무제의 검이 지향하는 목표이며, 일대상인의 대적자인 운현에 대해 어찌 독요가 모르랴?

    하지만 관심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 일대상인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창룡검주가 정말로 일대상인에 대적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하늘과 싸우려는 자가 미련하다 여겨지듯, 일대상인에 대적하는 건 그저 자신의 어리석음을 증명할 뿐이다.

    스스로 칭하는 ‘창룡’조차 하늘을 대적하지는 못하지 않는가?

    “흥.”

    독요는 코웃음을 흘렸다.

    그녀에게 일대상인은 이미 유일무이한 절대의 하늘이었다.

    하늘에 대적하는 어리석은 자에게 독요가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그러나 확인은 해야 했다.

    그 어리석은 자는 일대상인이 관심을 가진 대상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얼굴은 한번 봐 둬야겠지.”

    독요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싸움의 승패는 아직 모르지만 혈교가 창룡검주를 죽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대상인이 관심을 두는 자가 혈마인 따위에 죽지는 않을 테니까.

    탁.

    독요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붉은 비단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메마른 황야에 날리는 한 조각 꽃잎처럼 떠나갔다.

    수하는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목함을 챙긴 수하의 모습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쏴아아.

    바람이 불며 메마른 시신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곤륜산맥이 저 멀리 보이는 황량하고 메마른 고원에서 일어난 일은 그렇게 바람 속으로 사라져 갔다.

    ***

    혈교와의 싸움이 끝난 후, 모용미는 부상당한 사람들을 인근 도시 서녕으로 후송했다.

    그리고 장로와 가주 들과 함께 고대 사원을 샅샅이 수색했다.

    고대 사원이 혈교의 근거지로 사용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지, 딱히 새로운 발견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더 이상 혈교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혈교의 일천여 혈인과 혈마인들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일행은 고대 사원을 떠났다.

    서녕에서 기다리던 감찰어사 조관과 합류하여 사흘을 지낸 후, 삼백오십여 공동파 제자들과 창룡맹의 고수들은 공동파로 향했다.

    여전히 길고 험한 길이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훨씬 짧고 가볍게 느껴졌다.

    기련산 남쪽 끝자락을 돌아 난주를 지나친 일행의 눈앞에 드디어 공동산이 나타났을 때는 모두의 표정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감숙성 공동산, 공동파 경내.

    향이 피어오르는 도관에 운현 일행과 공동파 사대장로가 자리하고 있었다.

    객옹과 운현, 군사 모용미는 물론 장로와 가주 들, 그리고 절정고수들도 자리에 있었다.

    사락.

    공동파 장문인 대행인 천운자가 일어났다.

    그는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로써 혈교의 야욕은 다시 한번 꺾였소. 게다가 공동파 제자들의 피해는 사실상 없다시피 하오.”

    그의 표정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혈마인들을 무찌르고 일천여 혈인을 진멸하고도 공동파 제자들의 피해는 수십여 부상자들뿐이다.

    대부분 혈인들의 혈독에 당한 것이지만 천천히 요양하면 완치가 가능했다.

    공동파의 장문인과 전임 사대장로들이 모두 쓰러진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대승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모두가 맹주님과 창룡맹의 영웅들 덕분이오.”

    펄럭.

    장문인 대행인 천운자가 커다란 동작으로 두 손을 마주했다.

    그와 함께 다른 사대장로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동파가 영웅들께 예를 표하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사대장로들은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덜컹.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로와 가주, 절정고수들도 모두 일어섰다.

    “이것이 어찌 창룡맹만의 힘이겠습니까?”

    손을 모아 예를 표하며 운현은 말했다.

    “공동파가 아니었다면 천하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어려움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복마의 뜻에 헌신해 오신 공동파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사락.

    운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불가와 도가의 사람들은 합장을 하고 가주와 절정고수 들 역시 예를 표했다.

    목숨을 걸고 혈교에 함께 맞섰다는 유대감 앞에서는 더 이상의 오해도, 거부감도 있을 수 없었다.

    예를 나눈 이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천운자는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교를 꺾은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오. 허나 아직 마교가 남아 있소.”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혈교와 달리 마교는 아직 그 종적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마교는 혈교보다 더 음흉하여 기반을 갖추기 전에는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소. 어둠 속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데다, 종교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현혹하니 그 꼬리를 잡기가 쉽지 않소이다.”

    불가와 도가의 사람들이 나지막이 불호와 도호를 외웠다.

    혈교의 위협이 직접적이었다면 마교는 은밀하고 더욱 위험했다.

    “그래도 창룡맹이 방비를 갖추었다 하니 다행이오.”

    천운자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동파에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영호준이 공동파의 조언에 따라 수립한 방책에는 마교에 대한 대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전에, 혈마인이 말한 마검에 대해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마검과 선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공동파에 전했다.

    천운자는 사대장로의 한 사람인 옥로 진인을 돌아보았다.

    경전 연구에 능한 옥로 진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맹주의 전언을 듣고 오래된 기록들을 조사했소. 그리고 마검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였소. 그것은 마검이 아주 오래전에 부서졌다는 것이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렇다면 혈교가 그것을 다시 만들었다는 뜻인가요?”

    모용미가 물었다.

    옥로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런 듯하오.”

    “선검에 대해서는요?”

    모용미의 물음에 옥로 진인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기록에 따르면 무당의 한 선인이 가지고 있었으나 어떤 젊은이에게 물려주었다 하오. 마검을 부순 것이 그 젊은이인지는 알 수 없소.”

    사람들의 시선이 무당의 청송 진인에게 향했다.

    그러나 청송 진인은 고개를 저었다.

    “빈도가 아는 한 무당에 그런 검은 없소이다. 선검이라 불리는 것들이 몇 있긴 하나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며 마검을 막는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소.”

    “무당에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모용미가 목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랬다면 무당에 전해졌다고 하지, 어떤 젊은이에게 물려줬다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을 거예요. 무엇보다 혈마인은 ‘선검이 없다’고 단언했으니까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마인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었지만 모용미의 지적은 일리가 있었다.

    모용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주 오래전이라니……. 이제 와서 선검의 종적을 찾는 건 무리가 있겠군요.”

    듣고 있던 능세영이 물었다.

    “헌데 마검이 정말로 혈마의 현신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인가?”

    그건 옥로 진인을 향한 물음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옥로 진인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불가능하지는 않소.”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허나 우리가 생각하듯 혈마 자신이 재래하는 것은 아니오. 빈도가 생각하기에는 일종의 강신술 같은 것이 아닌가 싶소.”

    “강신술이라면, 귀신이 들리는 것 말인가요?”

    모용미의 말에 옥로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오. 허나 그보다는 더욱 심각한 상태가 될 테지.”

    “그렇군요.”

    모용미는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혈마인이 ‘너희의 후손이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 강신술조차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군요.”

    “그렇소. 다름 아닌 혈마의 강신이니 말이오. 그릇이 될 자를 찾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

    그 말에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당장의 위협은 아니니 말이다.

    여유를 되찾은 사람들은 찻잔을 들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따뜻한 차향이 도관을 부드럽게 채웠다.

    운현은 객옹과 함께 도관을 나왔다.

    안에서는 아직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대부분 공동파와 거대 문파의 교류나 협력에 관한 것이라 운현이 있을 필요는 없었다.

    “맹주님.”

    모용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운현을 향해 모용미가 걸어오고 있었다.

    단아한 그녀의 모습은 도관의 정취와 어울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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