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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76화 (476/530)

476화. 격전의 끝

사락.

심지가 작은 불을 피워 올리자 캄캄한 지하 공동에 빛이 돌아왔다.

서너 곳의 등에 불을 밝힌 능세영은 화섭자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제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제단 앞에는 사해혈작이 쓰러져 있었다.

등을 제단에 기댄 채 붉은 비단옷 위에 쓰러져 있는 사해혈작의 모습은 마치 제단에서 굴러 떨어진 제물 같았다.

긴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두 팔 역시 힘없이 아래로 늘어뜨린 채였다.

“후후.”

사해혈작이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웃음조차 그녀에겐 힘겨웠다.

“아쉽구나. 혈마의 위(位)가 눈앞에 있었거늘…….”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었다.

운현을 삼켰다면 말이다.

그러나 너무도 탐스러워서 그녀조차 욕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운현 때문에 사해혈작은 패배하고 말았다.

슥.

사해혈작은 고개를 들어 운현을 올려다보았다.

“어리석은 자야. 네가 거절한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을 원하는 존재가 삼천 세계에 가득하느니라.”

그것은 단순한 조롱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그녀는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하지만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릉.

미명을 갈무리한 운현은 사해혈작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것이 전부입니까?”

사해혈작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운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대상인이 준 힘이, 이것뿐이냐는 말입니다.”

사해혈작은 눈을 크게 떴다.

객옹과 능세영 역시 놀란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후후.”

사해혈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일대상인. 그의 힘을 받아들인 것부터가 실수였을지도 모르지.”

으득.

사해혈작은 이를 악물었다.

“백 년만 기다렸어도 너를 피할 수 있었을 터인데.”

일대상인은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혈교의 괴멸을 가져왔다.

만일 혈교가 은밀히 힘을 기르며 백 년을 더 기다렸다면, 적어도 운현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저를 피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운현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이 악을 행하는 이상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악이라고?”

사해혈작이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네가 말하는 선과 악은 인간들의 오만함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게다가 이 세계는 본디 욕망과 죄악이 들끓는 곳이거늘, 네가 말하는 선악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이더냐?”

번들거리는 사해혈작의 눈동자가 운현을 똑바로 향했다.

그러나 운현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락.

흐트러진 사해혈작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손과 발, 그리고 몸 역시 검게 변색되고 있었다.

“다른 혈마인은 어디 있지?”

문득 능세영이 물었다.

“그들도 네게 먹혔나?”

“글쎄? 어떨까?”

사해혈작이 조롱하듯 말했다.

능세영은 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하지만 운현은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사해혈작을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이자가 흡수한 혈마인은 모두 셋입니다. 지옥혈룡 외에 다른 두 기운이 미약한 것을 보면 아마도 깨어나기 전에 흡수한 것이겠지요.”

“으음.”

능세영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운현의 말대로라면 눈앞의 사해혈작은 이제껏 한 번도 듣지 못한, 가히 혈마인을 넘어선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조금 전 사해혈작이 ‘스스로 혈마의 위를 얻겠다’고 말한 것도 납득이 될 정도였다.

능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비록 혈옥을 부수지 못한 것은 아쉬우나…….”

이곳엔 혈옥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절정고수들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 당연히 다른 곳으로 옮겼을 것이다.

“혈마인들이 전부 꺾였으니 이것으로 혈교도 끝난 게로군.”

“끝났다고?”

사해혈작이 말했다.

그녀는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혈교가 끝났다 여기느냐?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하구나.”

시뻘건 눈을 번득이며 사해혈작은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아라. 혈교가 지금까지 쌓아 온 힘에 일대상인의 조력을 더하고도 혈마인 둘을 깨우는 것에 그쳤다면,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능세영의 표정이 굳었다.

사해혈작의 말처럼 지난 세월 혈교가 쌓아 온 힘은 결코 적지 않을 터였다.

혈교는 일대상인의 힘을 얻었고, 지옥혈룡이 다시 깨어난 후 희생된 이들도 대단히 많다.

그런데 천여 명의 혈인과 혈마인 둘을 깨운 것이 전부일까?

“마검(魔劍)이 돌아왔다.”

사해혈작이 조롱하듯 말했다.

그녀의 붉은 입가에는 조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선검(仙劍)이 없으니 마검이 깨어나는 것을 막을 자는 없지. 이제 너희의 자녀와 후손은 혈마의 현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마검이라고?”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에는 저주받은 검, 혹은 마검이라 불리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사해혈작이 말하는 마검은 그런 것이 아닐 터였다.

사해혈작은 분명 ‘혈마의 현신’이라고 말했으니까.

“흥.”

사해혈작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 지식마저 끊겼는가? 인간들이란 참으로 어리석구나.”

사락, 사락.

사해혈작의 손과 발은 점점 부스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참으로…….”

그녀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점점 검게 변해 가던 사해혈작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파삭.

검은 재가 붉은 비단옷 위에 내려앉았다.

그것은 과거 능세영이 지옥혈룡을 참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사해혈작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소멸한 것이다.

“믿을 수 없군.”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능세영을 향해 물었다.

“비록 마검이라 하나 혈마의 현신이 검 한 자루로 가능한 일인가?”

“모르겠네.”

능세영은 재로 변한 사해혈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마 공동파의 장로들은 알지도 모르겠군. 선검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일세.”

“돌아갈까요?”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여기선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니까요.”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마인이 사라진 지하 공동은 더 이상 섬뜩하지도 괴기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어둡고 건조한, 오래전에 버려진 고대 사원의 폐허일 뿐.

저벅.

세 사람은 몸을 돌렸다.

재가 되어 흩어진 사해혈작의 흔적은 이제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흔들리는 불빛과 제단 아래 버려진 붉은 비단옷만이 이곳에 누군가 있었음을 보여 줄 뿐이었다.

***

격전이 벌어지는 고대 사원 앞뜰.

혈인들의 변화를 제일 먼저 감지한 사람은 금화영이었다.

후우웅.

초록빛 검기가 혈인의 허리를 가르고 지났다.

그러나 금화영은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는 상체만 남아도 금화영을 죽일 듯 달려드는 괴물이니까.

금화영은 그대로 검을 내리찍었다.

퍽.

‘응?’

혈인의 머리를 부순 금화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버둥거려야 할 혈인의 팔이 축 늘어진 것이다.

금화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혈인들의 움직임이 어딘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크륵.”

그들의 모습은 마치 혼란에 빠진 듯했다.

그리고 그때 즈음엔 천운자도 혈인들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혈인들이 멍하니 서 있었던 것이다.

“이때다!”

천운자는 크게 외쳤다.

“더욱 몰아쳐라!”

둥둥둥.

상황을 감지한 군사 모용미의 북소리가 때맞춰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공동파 제자들은 일제히 혈인들을 향해 달려 들었다.

절정고수들의 검기가 사방을 휘젓고, 삼극진과 사방진을 이루던 공동파 제자들도 각기 혈인에게 짓쳐 들었다.

퍽. 서걱.

그들의 칼날 앞에 혈인들은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하지만 그 승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순간 혈인들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퍼석.

“헉!”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공동파 제자들이 오히려 놀랐다.

혈인들은 이곳저곳에서 무너져 내렸다.

간혹 버티는 혈인도 있었지만 길지 못했다.

털썩.

혈인이 쓰러지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공동파 제자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서 있는 혈인은 더 이상 없었다.

고대 사원의 앞뜰을 가득 메우고 있던 혈인이 하나도 남김없이 쓰러진 것이다.

“오, 오오오오!”

“우와아아아!”

공동파 제자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절정고수들은 검기를 거두지 않은 채 주위를 경계했다.

하지만 그들도 이 변화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허어.”

공동파 장로 대행인 천운자가 긴 탄식을 흘렸다.

“맹주께서 성공하신 듯하오이다.”

무당의 청송 진인과 화산의 태을 진인이 검을 내리며 도호를 외웠다.

아미의 천수 신니와 소림의 혜천도 각기 합장을 하며 불호를 외우고, 빙설을 비롯한 절정고수들은 검기를 거뒀다.

사락.

쓰러진 혈인들은 이미 한 줌의 핏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사방에 피비린내가 자욱하게 번져 갔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각, 따각.

말 한 마리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말을 몰고 오는 사람은 바로 군사 모용미였다.

“진열을 정비하세요.”

모용미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닐 수도 있어요. 부상자들을 뒤로 물리고 경계를 풀지 않도록 해 주세요.”

공동파 장로 천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미는 절정고수와 장로 들을 돌아보았다.

“혹시 모르니 몇 분이 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요.”

“내가 가지.”

금화영이 즉시 말했다.

빙설도 말없이 앞으로 나섰다.

“나도 가겠다.”

철검 남궁벽이 말했지만 모용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다른 분들은 여기서 주위를 경계해 주세요. 혈교가 또 어떤 술수를 부릴지도 모르니까요.”

혈교는 잔혹하고 교활하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모용미의 의견은 옳았다.

저벅.

모용미는 빙설, 금화영과 함께 고대 사원으로 향했다.

그들이 막 입구에 들어서려는 때였다.

슥.

빙설이 손을 뻗어 모용미를 막았다.

금화영 역시 멈칫 발을 멈췄다.

그러나 세 사람의 경계는 곧 풀어졌다.

“아!”

모용미가 탄식처럼 말했다.

“운 학사님!”

“할망!”

금화영도 외쳤다.

안에서 세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객옹과 노부인 능세영, 그리고 운현이었다.

타닥.

금화영은 즉시 몸을 날렸다.

능세영은 인상을 썼지만 날아오는 금화영을 피하지는 않았다.

“할망! 무사했구려!”

금화영은 능세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노부인 능세영은 혀를 찼다.

“어이쿠, 혈교가 아니라 너 때문에 죽겠다. 이 망할 제자야.”

하지만 금화영은 능세영을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능세영도 웃음을 흘리고는 가만히 손을 들어 금화영을 안아주었다.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모용미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네. 덕분에요.”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모용미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객옹 어르신, 그리고 능 어르신.”

“자네도 수고했네.”

능세영은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객옹은 그저 무덤덤할 뿐이었다.

“맹주님!”

“맹주! 무사하시오?”

장로들과 가주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빙설은 어느새 옆으로 몸을 피했고, 장로와 가주 들은 운현과 객옹, 그리고 능세영을 둘러싸 버렸다.

“어떠했소? 혈마인들은?”

“다친 곳은 없소?”

“혈교는 이제 끝난 것이오?”

질문이 쏟아졌다.

운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직 남아 있는 문제들은 있습니다만…….”

자신을 주목하는 장로와 가주, 그리고 절정고수 들을 보며 운현은 말했다.

“우선은, 끝났습니다.”

“오오오!”

환호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도호와 불호를 외거나 혹은 서로 무사히 끝난 것을 축하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운현은 문득 모용미와 눈이 마주쳤다.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모용미 역시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기쁨의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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