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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75화 (475/530)
  • 475화. 사해혈작(死海血雀)

    거대 사원의 지하, 무저갱의 끝에서 만난 사람은 지옥혈룡이 아니었다.

    지하 공동의 제단에 앉아 있는 여인은 스스로 사해혈작이라 밝힌 또 다른 혈마인이었다.

    그렇다면 지옥혈룡은 어디 있단 말인가?

    노부인 능세영은 슬쩍 주위를 살폈다.

    지하 공동은 상당히 컸다.

    비록 고대 사원의 내부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천장이 상당히 높아서 땅 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방 벽에 밝힌 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혈인들도, 지옥혈룡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후후, 이곳이 마음에 드느냐?”

    사해혈작의 목소리에 능세영은 고개를 돌렸다.

    강렬한 눈동자를 빛내며 사해혈작은 말을 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모습이 마치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같구나. 지옥혈룡이 어째서 네게 집착했는지 알 것도 같군.”

    사해혈작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매혹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했지만 능세영은 오히려 강렬한 혐오감을 느꼈다.

    능세영의 내력이 불가에 기반하고 있는 데다, 지금도 사해혈작의 요사한 기운이 살갗을 찌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지옥혈룡은 어디 있느냐?”

    능세영이 물었다.

    그녀를 향한 지옥혈룡의 원한은 깊고 집요하다.

    자신이 오는데 지옥혈룡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후후. 글쎄?”

    사락.

    사해혈작은 정좌를 풀며 한쪽 다리를 제단 아래쪽으로 내렸다.

    붉은 비단옷 사이로 새하얀 종아리가 그대로 드러났지만 사해혈작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디 있을 것 같은가?”

    사뭇 흥미롭다는 듯 사해혈작이 물었다.

    대답은 객옹이 했다.

    “양동을 시도한 것이냐?”

    무심한 어조로 객옹이 말했다.

    지옥혈룡이 이곳에 없다면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격전을 벌이고 있는 공동파 제자들과 절정고수들을 치는 것이다.

    “그럴 리 없네.”

    그러나 노부인 능세영은 고개를 저었다.

    “지옥혈룡은 대단히 탐욕스러워서 자신의 것을 결코 남에게 넘기지 않아. 설령 양동을 시도한다 해도 지옥혈룡은 이곳에 남았을 것이야.”

    사해혈작이 웃었다.

    “바로 그렇다.”

    그녀는 감탄한 듯 능세영을 바라보았다.

    “지옥혈룡도 흡족해 하겠군. 자네가 이토록 그를 잘 알고 있으니 말이야. 가능하면 직접 자신의 귀로 듣고 싶었을 텐데……. 아쉽게 됐어.”

    능세영의 표정이 변했다.

    지금 사해혈작의 말투는 지옥혈룡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 같지 않은가?

    “……무슨 의미지? 지옥혈룡은 어디 있느냐?”

    굳은 표정으로 능세영이 물었지만 사해혈작은 여유롭기만 했다.

    “글쎄? 어디 있을까?”

    사해혈작은 눈빛은 분명 조롱이었다.

    능세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지옥혈룡은.”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능세영이 운현을 돌아보았다.

    객옹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자 안에 있습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사해혈작이었다.

    사해혈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능세영을 조롱하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능세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마 이것이 지옥혈룡, 아니 혈마인들의 선택이겠지요. 지옥혈룡으로서는 이 자리를 감당하지 못함을 알고 있으니까요.”

    “후후후.”

    사해혈작이 웃음을 흘렸다.

    사락.

    그녀는 하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흥을 깨는군.”

    마치 책망하듯 사해혈작은 운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말을 이었다.

    “그래, 맞다. 지옥혈룡은 여기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해혈작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게 먹혀 버렸지.”

    그녀의 눈동자가 붉은빛으로 번들거렸다.

    그러나 능세영은 그녀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옥혈룡이 너에게 먹혔다고?”

    슥.

    사해혈작의 눈동자가 능세영을 향했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너희가 몰려오면 그 결과가 어찌 될지 모르지 않아.”

    능세영과 금화영, 그리고 객옹만으로도 지옥혈룡은 수십의 혈인과 한 팔을 잃었다.

    검기발현의 절정고수들과 도가, 불가의 장로들이 몰려온다면 결과는 분명했다.

    “그래서 이리된 것이다. 내가 남고 그가 먹혔지. 지옥혈룡이 제법 분통해 했으나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는 약하고 나는 강했으니까.”

    사해혈작은 조소를 머금었다.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그녀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너도 내게 먹힐 테니까.”

    우웅.

    그 눈빛은 마치 요사스러운 손아귀처럼 능세영을 옭아맸다.

    그때 객옹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리석군.”

    객옹은 사해혈작을 향해 말했다.

    “지옥혈룡 따위를 취했다 하여 기고만장하다니. 혈마인 둘이 하나가 되었다 한들 변하는 것은 없다.”

    “후후.”

    사해혈작은 웃었다.

    “누가 둘뿐이라고 했지?”

    후우우욱.

    ‘웃!’

    능세영은 이를 악물었다.

    엄청난 기세가 사해혈작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지하 공동을 밝히던 불빛들도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먹은 건 지옥혈룡만이 아니다. 물론 너희가 궁금해 할 필요는 없겠지.”

    사박.

    사해혈작이 제단에서 내려섰다.

    그녀의 붉은 비단옷이 세차게 펄럭였다.

    “너희도 곧 만나게 될 테니까.”

    스스스스.

    사해혈작의 온몸에서 붉은 안개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쉬쉬쉭.

    안개 속에서 핏빛 창이 쏟아져 나왔다.

    “조심하게!”

    능세영이 즉시 몸을 뒤로 날리며 검을 내질렀다.

    그녀의 검에는 이미 초록빛 검기가 어리고 있었다.

    우웅.

    카가각.

    핏빛 창끝은 능세영의 검에 막혔다.

    ‘쯧.’

    능세영은 혀를 찼다.

    그 창은 지옥혈룡의 능력 중 하나였다.

    능세영은 사해혈작이 지옥혈룡을 먹었다는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검기가 사해혈작의 창에 조금도 상처를 내지 못했다는 것도 말이다.

    객옹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펄럭.

    소매가 펄럭이며 객옹의 손이 위로 들렸다.

    동시에 객옹의 발 앞에 깔려있던 돌바닥이 일어섰다.

    콰드득.

    퍼버벅.

    핏빛 창은 객옹의 내력이 깃들어 있는 벽을 뚫지 못했다.

    후드득.

    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벽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객옹의 손은 이미 다음 한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후우우웅.

    객옹의 손바닥 위에서 작은 나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나비는 그대로 사해혈작을 향해 날아올랐다.

    사락.

    붉은 안개에 휩싸인 사해혈작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지옥혈룡을 흡수한 그녀는 이미 저 나비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뭉클.

    붉은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사해혈작의 모습이 붉은 안개 속으로 숨어드는 그때, 빛을 발하는 나비는 이미 안개에 다다르고 있었다.

    콰아아앙.

    우르르르.

    지하 공동이 크게 흔들렸다.

    폭음과 함께 난폭한 기세가 사방을 휩쓸었다.

    여기저기서 등이 박살나고 곳곳이 어둠에 잠길 정도였다.

    그러나 붉은 안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후후후.”

    사락.

    안개 사이로 사해혈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과 붉은 비단옷이 허공에서 일렁였다.

    “놀랍구나. 이 내게 충격을 줄 정도라니.”

    사해혈작은 객옹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에 탐욕이 번들거렸다.

    “네가 내 것이 될 순간이 기다려지는군.”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운현의 목소리였다.

    사박.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운현이 말했다.

    그의 손에는 이미 그의 검, 미명이 칼날을 빛내고 있었다.

    “스스로 원하시지 않은 한 이분은 그 누구의 것도 되지 않습니다. 이분은 바로 객옹이시니까요.”

    운현은 사해혈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붉은 안개에 감싸인 그녀의 모습은 기이함을 넘어 섬뜩할 정도였지만 운현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해혈작은 웃음을 흘렸다.

    “후후, 그대 같은 존재가 내 앞에 직접 나서다니.”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까지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객옹도, 능세영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해혈작의 눈동자에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가는 것은 바로 강렬한 욕망이었다.

    “지금만은 지옥혈룡에게 감사해야겠군.”

    사해혈작은 눈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그대를 이곳에 오게 해 주었으니까!”

    후욱.

    붉은 안개가 운현을 향해 덤벼들었다.

    안개만이 아니었다.

    사해혈작은 서슴없이 운현에게 짓쳐 들고 있었다.

    웅.

    운현의 미명이 나지막이 우는 것과 동시에 발밑으로 서리가 번져 갔다.

    츠즈즈즈.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운현은 그대로 검을 그어 올렸다.

    서걱.

    푸른 검기가 서린 운현의 미명은 붉은 안개와 함께 거침없이 사해혈작을 갈랐다.

    사해혈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짓쳐 들던 사해혈작의 몸이 미명의 궤적과 함께 비스듬히 양단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였다.

    뭉클, 뭉클.

    붉은 안개가 반으로 갈라진 사해혈작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곧 사해혈작이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후후후.”

    사해혈작이 웃었다.

    잘려 나간 것은 그녀의 붉은 비단옷뿐이었다.

    “이 정도인가? 역시 그대는 인간을 버리지 못했구나.”

    새빨간 그녀의 눈동자가 희열과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탄식하듯 사해혈작은 말했다.

    “놀랍군. 이렇게 빛나는 존재이면서도 여전히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니…….”

    사락.

    자신의 입술을 핥으며 사해혈작이 말했다.

    “이 어찌 탐스럽지 아니한가?”

    “우습군요.”

    운현이 조용히 말했다.

    사해혈작이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은 말을 이었따.

    “한낱 인간이라 비하하면서 어째서 당신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도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운현은 눈을 빛냈다.

    “그리도 인간이 부러웠습니까?”

    사해혈작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아름답던 표정은 점차 일그러지고 있었다.

    “……한낱 미물 주제에.”

    으득.

    사해혈작은 이를 갈았다.

    “네가 감히 누구를 조롱하는 것이냐!”

    콰과과과과.

    지하 공동에 폭풍 같은 기세가 몰아쳤다.

    주변을 밝히던 등불이 심하게 일렁이더니 결국에는 빛을 잃고 꺼져 버렸다.

    훅.

    지하 공동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붉은 안개는 섬뜩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분노에 이글거리는 사해혈작의 새빨간 눈동자 역시 어둠 속에 더욱 그 기괴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빛을 발하는 것은 사해혈작만이 아니었다.

    우우웅.

    운현의 검, 미명이 울음을 흘렸다.

    그의 검에 서린 푸른 기운은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뿜고 있었다.

    그러나 사해혈작은 운현의 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제 놀이도 질렸다.

    그건 더 이상 목소리라 할 수도 없었다.

    무저갱에서 새어 나오는 듯 웅웅거리는 소리가 지하 공동에 울려 퍼졌다.

    ―내 너를 취하고 천하를 피로 씻을 것이다.

    아름답던 사해혈작의 모습은 이미 지옥의 악귀처럼 변해 있었다.

    탐욕에 번들거리는 눈은 이미 사람의 것조차 아니었다.

    쩌적.

    그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뺨이 갈라지고 긴 혀가 탐욕스럽게 날름거렸다.

    그것은 혈작이라기보다는 마치 뱀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혈마의 위(位)를 얻으리라!

    쉬익.

    사해혈작은 입을 쩍 벌린 채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녀의 입안에는 어느새 길고 날카로운 이빨이 번득이고 있었다.

    하지만 운현의 검은 오히려 조용히 잦아 들고 있었다.

    사락.

    빛나던 검기도 사라지고 검명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객옹도, 능세영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슥.

    운현은 검을 들어 올려 눈앞에 세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후우욱.

    운현의 미명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

    사해혈작이 괴성을 질렀다.

    그 빛은 검기도, 북해빙정의 내력도 아니었다.

    어두운 지하 공동을 밝히는 부드럽고 고요한 빛, 그것은 바로 공동파의 복룡복마전을 채웠던 서광(瑞光)이었다.

    사락.

    빛에 휩싸인 미명이 허공을 유영해 갔다.

    검을 쥔 운현의 눈동자는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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