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화. 무저갱
파라락.
객옹과 운현, 능세영은 바람을 가르며 고대 사원으로 향했다.
“크르르.”
혈인들이 그들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혈인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퍽.
객옹이 가볍게 딛나 싶더니 혈인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 나갔다.
능세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퍼걱.
세 사람은 다시 허공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고대 사원의 앞뜰이 그들의 눈 아래 가득 펼쳐졌다.
삼백여 공동파 제자들이 일천 혈인과 치열하게 맞서고, 절정고수들의 검기가 현란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탁.
객옹과 운현은 혈인들 한가운데 내려섰다.
“카악.”
주변의 혈인들이 즉시 반응했지만 뒤이어 내려서던 능세영의 검기가 지체 없이 그들을 갈랐다.
서걱.
객옹은 주위의 혈인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꼿꼿이 선 그는 거대 사원의 입구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우우우웅.
거대한 기세가 객옹의 손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곧 아름답고 작은 한 마리의 나비가 그의 손바닥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락.
나비는 천천히 날개를 펴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그 모습은 마치 환상처럼 아름다웠다.
격전의 와중에도 한순간 절정고수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하늘로 날아오른 그 아름다운 날개는 이윽고 거대한 죽음이 되어 혈인들을 향해 내려앉았다.
“조심해라!”
노부인 능세영이 공동파 제자들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은 뒤이은 폭음에 삼켜져 버리고 말았다.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음이 앞뜰을 삼켰다.
폭풍 같은 기세가 사방을 휩쓸고 뒤이어 흙먼지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그 충격에 절정고수들조차 한순간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모두는 보았다.
객옹이 선 곳부터 고대 사원의 입구까지가 마치 대로(大路)처럼 텅 비어 버린 것을.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쏟아져 나오던 혈인들은 물론 객옹을 향해 덤벼들던 혈인들도 형체조차 남기지 못한 것이다.
요행히 직격을 피한 혈인들도 충격에 나뒹군 채 아직도 일어서지 못할 정도였다.
‘허어.’
철검 남궁벽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언뜻 보아도 백 이상의 혈인을 객옹이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쓸어버린 것이다.
‘저것이…… 천향접.’
남궁벽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독선의 절기가 천향접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서 펼쳐진 천향접의 위력은 남궁벽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영롱하게 빛나는 저 아름다움이라니, 그 누가 천향접에 눈을 빼앗기지 않으랴?
탓.
그사이, 객옹은 운현을 데리고 고대 사원을 향해 질주했다.
능세영 역시 뒤처지지 않았다.
휙.
세 사람의 모습은 순식간에 고대 사원 안으로 사라졌다.
“크륵.”
혈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넘어졌던 혈인들도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검을 멈추지 마라!”
공동파의 천운자가 크게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주위에 쩌렁쩌렁 울렸다.
“혈인들을 척살하라!”
“와아아아!”
공동파 제자들의 함성에는 기세가 가득했다.
어찌 그렇지 않을까?
조금 전 그 광경을 보았으니 말이다.
카앙, 쾅, 서걱.
“크아아.”
사방은 곧 격전의 소음으로 가득해졌다.
텅 비었던 곳도 몰려드는 혈인들도 다시 메워졌다.
그러나 고대 사원의 입구에서 나오는 혈인은 더 이상 없었다.
운현과 객옹, 능세영은 고대 사원으로 들어섰다.
탁.
객옹은 발을 멈췄다.
고대 사원 안쪽은 놀랍게도 하나의 커다란 공간이었다.
후두득.
머리 위에서 돌가루가 떨어졌다.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여기저기 무너진 곳 틈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주위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크르륵.”
구석에서 혈인 하나가 걸어오며 소리를 냈다.
객옹은 혈인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손가락을 퉁겼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냐?”
퍽.
또 다른 절기인 난홍십이엽에 적중당한 혈인은 머리에 구멍이 뚫리며 뒤로 넘어갔다.
난홍십이엽에 담긴 강렬한 독기가 머릿속을 태우는 동안, 혈인은 그저 바닥에 널브러진 채 움찔거릴 뿐이었다.
“크륵.”
“크르륵.”
또 다른 혈인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퍽, 퍽.
그 혈인들의 이마에 구멍이 하나씩 생겨났다.
그리고 앞선 혈인과 같은 결과를 맞이했다.
“사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가면 될 걸세.”
능세영이 얼른 답했다.
객옹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옮겼다.
저벅, 저벅.
텅 빈 공간에 발소리가 울렸다.
바깥에서는 지금도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정작 고대 사원의 내부는 적막하기만 했다.
이곳에서 쏟아져 나오던 혈인들도, 아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하군.”
발을 옮기며 노부인 능세영이 말했다.
“밖에 있는 혈인이 전부는 아닐 듯한데, 어째서 다른 혈인들이 보이지 않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
객옹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 아래에서 말이다.”
저벅.
일행은 발을 멈췄다.
고대 사원의 중앙, 무너지고 부서진 기괴한 장식들 사이로 거대한 구멍이 있었다.
지하를 향해 수직으로 뚫린 그 구멍은 언뜻 보아도 전각 한 채는 능히 들어갈 정도로 컸다.
게다가 얼마나 깊은지 바닥조차 보이지 않았다.
후우웅.
바람이 구멍에서 불어오며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무저갱에서 울려 나오는 무언가의 울음소리 같았다.
“저기 계단이 보이는군.”
노부인 능세영이 구멍을 가리키며 말했다.
커다란 구멍 내벽에는 좁은 계단이 튀어나와 있었다.
아마도 이 사원의 사제들이 쓰던 계단인 듯 보였는데, 폭도 좁은 데다 무너진 부분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객옹은 그 계단을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지체할 시간 없다. 가자.”
휙.
객옹은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한 손으로 운현을 등에서부터 안은 채였다.
“허.”
능세영은 고개를 저으며 탄식을 흘렸다.
아래에서 무엇이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채 저렇게 서슴없이 뛰어들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곧 그녀도 구멍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무엇이 기다리건 가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말이다.
파라락.
세찬 바람이 운현의 귓가를 스쳤다.
운현은 객옹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르신, 저도 경신술 정도는…….”
“신경 쓰지 마라.”
운현의 말을 끊으며 객옹이 말했다.
“너는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해라. 길은 내가 만들 테니.”
그 말에 운현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운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라라락.
바람 소리가 세차게 울렸다.
깊은 구멍은 말 그대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휘릭.
문득 능세영이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 운현은 발밑에서 솟아오르듯 다가오는 바닥을 볼 수 있었다.
탁.
능세영은 춤추듯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즉시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방을 확인했다.
그사이, 객옹이 가볍게 발끝을 디뎠다.
사박.
운현은 눈을 들었다.
눈앞에 커다란 돌문이 보였다.
고대의 문양이 가득한 그 돌문은 마치 지옥의 입구처럼 세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이군.”
능세영이 말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곳입니다.”
와 본 적도 없고 아무런 표식도 없었지만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문 너머에 존재하는 강렬한 사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슥.
운현은 돌문에 손을 대었다.
그저 가볍게 댄 것뿐인데도 돌문은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그긍.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져 나왔다.
능세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안쪽을 살폈다.
‘……저건?’
그곳은 사방에 불을 환하게 밝힌 텅 빈 공간이었다.
중앙에 돌로 된 투박한 제단 같은 것이 하나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제단 위에 한 사람이 눈을 감은 채 좌정하고 있었다.
“지옥혈룡이 아니군.”
객옹이 말했다.
제단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지옥혈룡이 아니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얼굴선, 그리고 제단 아래까지 흘러내린 붉고 화려한 비단 옷은 분명 여인의 것이었다.
슥.
그녀가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긴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출렁이며 흘러내렸다.
“이제 왔느냐?”
사뭇 묵직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강렬한 눈빛으로 객옹과 운현, 능세영을 바라보았다.
‘음.’
객옹은 내심 신음을 흘렸다.
그저 눈빛만으로도 느껴지는 기세는 그녀가 결코 객옹의 아래가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게다가 그 여인의 붉은 눈동자는 바로 혈마인의 것이었다.
지옥혈룡 외에 또 다른 혈마인이 나타난 것이다.
“흐음, 셋뿐인가? 더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옥혈룡의 예측이 빗나갔구나. 허나 기쁘군.”
여인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 같은 존재가 이곳까지 올 줄은 몰랐으니까.”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능세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사해혈작이다. 혈마의 길을 여는 자이자 너희를 지옥으로 이끌 존재지.”
스스로를 사해혈작이라 말한 여인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에 서늘한 미소가 번져 갔다.
“어서오너라. 너희를 위한 이 지옥에.”
사해혈작이 웃으며 말했다.
운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새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
휘리리릭.
두 자루의 소검이 빛을 두른 원반처럼 날았다.
검기가 번득이는 빙설의 소검은 혈인들의 목을 사정없이 갈랐다.
서걱.
혈인의 목이 허공으로 날았다.
그러나 목이 잘렸어도 혈인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 기괴한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할 정도였다.
쉭.
빙설은 냉막 한 표정으로 가차 없이 그들을 베어 갔다.
그녀의 검이 혈인을 둘로 가르자 그제야 혈인은 움직임을 멈추고 쓰러졌다.
털썩.
빙설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전투는 더욱 극렬해지고 있었다.
공동파 제자들은 삼극진과 사방진, 때로는 오행진으로 혈인들을 상대해 나갔고, 절정고수들은 검기를 뿌리며 혈인들을 베어 갔다.
그러나 상대는 목이 잘려도 움직이는 괴물이다.
게다가 그 수도 혈인들이 더 많아서 전체적으로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둥, 둥.
북소리가 울렸다.
군사 모용미가 보내는 신호였다.
빙설이 속한 진이 어느새 다른 진들보다 혈인들 사이로 크게 돌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물러나라!”
공동파의 천운자가 크게 외쳤다.
“서두를 필요 없다. 전황은 우리가 우세하다!”
그건 그저 사기를 돋우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공동파 제자들의 부상은 경미한 반면 혈인들의 피해는 착실히 늘어 가고 있었다.
절정고수들의 검기에 힘입은 바도 컸지만 무엇보다 혈인들을 통솔해야 할 혈마인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악!”
공동파 제자 한 명이 비명을 질렀다.
쓰러진 줄 알았던 혈인이 바닥을 기며 그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그러나 혈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아!”
퍼엉.
폭음이 터져 나오며 혈인이 박살 났다.
그것은 바로 소림의 혜천이 펼친 백보신권이었다.
항마의 기운이 담긴 혜천의 백보신권은 혈인들을 상대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덕분에 공동파 제자는 위험을 벗어나 무사히 자기 자리로 물러났다.
슥.
천운자는 혜천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혜천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한 후 다른 혈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북소리도 어느새 멈췄다.
하지만 앞뜰을 가득 채운 혈인과 공동파 제자들의 격전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후우.”
진형이 다시 회복된 것을 확인하고 모용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전황을 세심하게 살폈다.
‘아직까지는 괜찮아.’
전투는 예정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문제는 객옹과 운현, 그리고 능세영이다.
그들이 고대 사원 안에서 혈마인을 쓰러뜨린다면 혈인들은 단번에 와해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오늘 이 황량한 계곡에서 뼈를 묻는 건 자신들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결코 그렇게 되어선 안 돼.’
모용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에겐 아직 비장의 수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이다.
‘부디…….’
그것을 사용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며 모용미는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