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사투(死鬪)
메마른 계곡에 서 있는 거대한 고대 사원은 마치 버려진 성채 같았다.
주위를 둘러싼 높은 석벽도 모두 다 허물어져서 이제는 그 의미조차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잊히고 쇠락한 것 같은 그 고대 사원은,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섬뜩한 사기(邪氣)를 안개처럼 흘려 내고 있었다.
“네, 맹주님. 명하신 대로 즉시 출진을 준비하겠어요.”
모용미는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공동파 장문 대행인 천운자에게 말했다.
“출진 진형을 갖춰 주세요.”
“알겠소, 군사.”
천운자는 정중하게 답한 후 공동파 제자들에게 손짓을 했다.
다각, 다닥.
삼백오십여 공동파 제자들은 일사불란하게 네 무리로 나뉘었다.
말들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사방에 자욱이 피어올랐다.
그사이, 모용미는 고대 사원과 그 주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기마대를 움직이기엔 힘든 지형이로군요.”
고대 사원의 앞뜰은 넓은 평지였지만 기마 운용에 적합할 정도는 아니었다.
전투에서 기마대의 장점은 빠른 기동성과 돌격이 가지는 파괴력에 있다.
천천히 움직일 것이라면 차라리 말에서 내리는 편이 나았다.
만일 혼전 상황이 된다면 그쪽이 더 빠르게 반응할 수 있으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차피…….”
말하던 운현이 흠칫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과 동시에 고대 사원에 변화가 일어났다.
철그럭, 철컥.
사람 그림자가 느릿하게 고대 사원의 입구에서 걸어 나왔다.
아니, 그것은 걷는다기보다는 억지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크르륵.”
운현 일행과 삼백오십여 제자들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그것은 바로 혈인이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 혈인은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갑주라 해도 몸통을 가릴 뿐인, 사실 방패를 몸에 걸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공동파 제자들의 칼을 방해하기에는 충분했다.
파사와 항마의 기운이 갑주에까지 통할 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철컥, 철컥.
고대 사원의 입구에서 혈인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무너진 벽으로 둘러싸인 고대 사원의 앞뜰은 순식간에 혈인들로 가득 찼다.
“크륵, 크르르르.”
짐승 같은 소리를 흘리던 혈인들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이 시뻘겋게 빛나는가 싶더니 동시에 입을 쩍 벌렸다.
―끄아아아아.
혈인들은 일제히 울부짖었다.
마치 비명 같은 혈인들의 울음이 계곡을 쩌렁쩌렁 울렸다.
듣는 사람들의 심신을 뒤흔드는 그 소리는 바로 귀곡성(鬼哭聲)이었다.
“귀를 막아요!”
모용미가 급히 외쳤다.
“내력을 끌어 올리고 대항하세요!”
“복마진결을 외워라!”
공동파 장로이자 장문 대행인 천운자가 외쳤다.
“저 울음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사기에 심령이 침식당한다!”
그 소리에 공동파 제자들은 즉시 손을 모으고 도호를 외웠다.
아직 수련이 깊지 못한 제자들은 귀를 막기도 했다.
그러나 말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히히힝.
놀란 말들이 사방에서 혼란을 일으켰다.
공동파 제자들이 말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꺄아아아아.
귀곡성은 점점 커져 가며 어느새 귀를 찢을 듯한 소리로 변해 있었다.
그때였다.
“하알![曷]”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마치 맑고 청명한 산사의 종소리처럼 사방에 울려 퍼졌다.
흥분하던 말들도, 소란스럽던 사람들도 일제히 조용해졌다.
사락.
합장하듯 두 손을 모은 천수 신니가 말했다.
“다들 말에서 내리게!”
공동파 제자들은 즉시 말에서 내렸다.
그들은 흥분했던 말들을 진정시켰다.
어느새 귀곡성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귀를 찢을 것처럼 울려 대던 소리가 삽시간에 사라진 것이다.
“……놀랍군.”
군자검 제갈명이 탄식을 흘리며 말했다.
혈인들이 내지른 귀곡성은 한순간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뒤흔들었다.
모용미의 경고와 천수 신니의 일갈이 없었다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평소 불가나 도가를 탐탁잖게 생각하던 제갈명에겐 인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체할 수가 없겠어요.”
모용미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 사원 앞뜰에 있는 혈인들은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공동파 제자들의 수를 넘어설 것이다.
슥.
운현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출진하십시오.”
출진을 명하는 말치고는 너무나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장로들과 가주들, 그리고 절정고수들은 묵묵히 예를 표하며 그 명을 받들었다.
공동파의 장문 대행인 천운자가 크게 외쳤다.
“복마의 때가 왔다!”
내력을 실은 그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복마의 힘이 담긴 그 음성은 조금 전 귀곡성으로 위축되었던 이들을 고양시키기에 충분했다.
스릉.
송문고검을 뽑으며 천운자는 소리쳤다.
“공동파 제자들은 모두 출진하라!”
“우오오오오.”
공동파 제자들은 일제히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그것은 공동파의 관행도,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눈앞에 가득한 혈인들의 모습과 전장의 흥분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함성이었다.
탁.
천운자가 말에서 내렸다.
“가자!”
그는 외투를 펄럭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철검 남궁벽과 금화영이 운현에게 말했다.
“먼저 가겠소, 맹주.”
“나중에 보세. 조심하게, 운 공자.”
남궁벽과 금화영은 천운자와 함께 백여 명의 공동파 제자들을 이끌고 나섰다.
다른 이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심하시오, 맹주.”
“무운을 비오.”
“후에 있을 맹주의 상급을 기대하겠소이다.”
비검 공손월과 관일검 모용단천, 군자검 제갈명이 각자 말하며 운현을 지나쳤다.
천수 신니와 태을 진인, 청송 진인 역시 가볍게 합장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소림의 혜천은 한 손으로 합장을 해 보였고 빙설은 보일 듯 말 듯 운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벅, 저벅.
수백 명의 공동파 제자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운현을 지나치며 눈으로 혹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운현은 그들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모용미 역시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개미지옥처럼 혈인들이 꾸역꾸역 밀려 나오고 있는 고대 사원.
그 끔찍한 곳을 향해 장로와 가주 들, 그리고 절정고수들과 공동파 제자들은 세 무리로 나뉘어 나아가고 있었다.
서두르지도, 고함을 내지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의에 찬 그들의 눈빛은 햇살 아래 번뜩이는 수백 자루의 검처럼 빛나고 있었다.
“크르륵.”
“크아아아!”
혈인들이 제각기 소리를 질렀다.
고대 사원이 가까워지자 가장 앞서 가던 천수 신니와 혜천이 큰 동작으로 합장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크게 외쳤다.
“하아아알!”
내력이 실린 그들의 목소리는 계곡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카악!”
파사와 항마의 기운을 담은 그들의 일갈에 혈인들은 눈에 띌 정도로 움찔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천운자가 외쳤다.
“모두 쳐라!”
“와아아아!”
삼백여 명의 제자들과 장로들, 가주들, 절정고수들은 일제히 혈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장 앞장서서 나가고 있는 이들의 검에는 어느새 낯선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격전이 시작된 고대 사원 앞뜰을 모용미는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세 무리로 나뉜 공동파 제자들은 장로와 가주, 절정고수 들과 함께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서걱.
검기로 번득이는 칼날이 혈인들의 목을 베고 갑주를 갈랐다.
절정고수들이 뿜어내는 검기는 혈인들의 갑주로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카앙.
긴 핏빛 손톱 모양의 혈조에 검기가 막혔다.
곳곳에 숨어 있는 또 다른 혈인들은 넷, 혹은 다섯씩 무리를 지어 절정고수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게다가 혈인들 중 몇은 설영대의 무복을 입은 채였다.
행방불명된 설영대 무사들이 혈인이 되어 그들을 막아선 것이다.
모용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복마진결을 익힌 공동파 제자들은 그야말로 분투하고 있었다.
파사와 항마의 기운을 지닌 도가와 불가, 그리고 검기발현의 절정고수들의 위력도 대단했다.
하지만 상대는 팔이 잘려도 멀쩡한 괴물인 데다가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지금까지 나온 혈인들의 숫자만 해도 일천을 헤아릴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개미지옥’이라는 표현이 더없이 정확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대 사원에서 밀려나오던 혈인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락.
모용미는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신이 나서야 할 때인 것이다.
“불필요한 전투는 최대한 피하세요.”
모용미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맹주님께서 할 일은 혈마인들을 처리하고 혈옥을 부수는 거예요. 그것들만 없어진다면 혈교는 더 이상 천하의 근심이 되지 못할 테니까요.”
혈마인은 혈교의 수호자이자 최강의 전력인 동시에 사실상 혈교의 핵심이다.
그들을 처리하고 혈옥까지 부순다면 혈교는 치명적인, 혹은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모용미는 눈을 돌려 객옹과 노부인 능세영을 보았다.
“맹주님을 잘 부탁드려요, 두 분 어르신.”
깊숙히 몸을 숙여 모용미가 예를 표했다.
“걱정 말게. 맹주님은 내가 멀쩡하게 자네에게 돌려줄 테니.”
노부인 능세영이 웃으며 말했다.
객옹은 슬쩍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바로 객옹이니까.
“군사께서도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운현의 말에 모용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네. 제 걱정은 마세요.”
그녀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은 오십여 명의 공동파 제자들은 결의로 눈을 빛냈다.
모용미가 명하면 그들은 언제든지 싸움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
“가자.”
객옹의 목소리가 운현의 말을 끊었다.
그는 한 팔로 운현을 감싸 안으며 몸을 날렸다.
탁.
두 사람의 몸이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운현이 얼른 말했다.
“아, 어르신. 저도…….”
“됐다.”
파라락.
바람 소리 사이로 객옹이 말했다.
“네 경공은 나중에 해라. 지금은 이게 더 빨라.”
운현은 반론하지 못했다.
객옹의 말이 사실이기도 했지만, 운현의 내력을 보존해 주려는 객옹의 뜻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어.”
뒤에 남은 능세영은 두 사람을 보며 혀를 찼다.
“혹시 맹주의 경공을 보나 했더니 객옹이 어지간히도 성급하구나.”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저것도 나름대로 배려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건 다른 사람이 들으면 귀를 의심할 말이었다.
삶과 죽음의 주관자인 독선이 타인을 배려했다는 말을 대체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독선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객옹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다만 상대가 운현일 경우에만 말이다.
“그럼 다녀오마.”
“네, 다녀오세요.”
탁.
모용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능세영은 몸을 날렸다.
세 사람의 모습은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부디 조심하세요.’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기원했다.
그들이 향한 고대 사원은 섬뜩한 사기를 흘리며 공동파 제자들과 혈인들의 사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잔혹하고 무자비한 고대의 군주 같았다.
“하아아!”
캉, 카앙, 서걱.
“크륵!”
공동파 제자들과 혈인들이 벌이는 사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육편이 날고 피가 낭자한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모용미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지고 있는 것은 바로 엄중한 군사의 직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