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화. 결전의 시작
사흘 후, 운현 일행은 삼백여 명의 공동파 제자들과 함께 공동산을 내려왔다.
주변의 주민들은 휘둥그런 눈으로 행렬을 쳐다보았다.
공동파가 이렇게 대규모로 움직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각, 따각.
수백 마리의 말과 십여 대의 커다란 마차가 움직이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장관이었다.
공동파 제자들에게도 이것은 생소한 경험이었다.
정예라 할 일대제자들은 물론 이대와 삼대 제자들의 표정에도 긴장과 자부심이 역력했다.
“다행히 시간에 맞게 준비가 되었군요.”
운현의 말에 천운자가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은 같은 마차에 타고 있었다.
“허허, 모두 맹주께서 지원해 주신 덕이 아니겠소?”
지난번에 운현은 창룡맹의 이름으로 공동파에 재정을 지원했다.
덕분에 공동파는 그 어느 때보다 넉넉한 환경에서 혈교와 맞서고 있었다.
“내가 이런 광경을 보게 되다니,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소이다.”
천운자는 사뭇 감격스러워했다.
사실 공동파에 와야 할 물품은 이보다 더 많았다.
감찰어사 조관도 관에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요청은 이해 못 할 ‘행정상의 이유’로 지체되고 있었다.
조관은 당장이라도 감찰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자칫 혼란을 더할 우려가 있기에 애써 참아야 했다.
따각, 따각.
“혹시 능 여협과 금 소저께서 보낸 연락은 없습니까?”
“아직은 없어요.”
임시 군사인 모용미가 운현의 질문에 답했다.
“공동파 일대제자들이 삼십 명이나 함께 있고, 두 분의 무위 또한 뛰어나니 별일은 없을 거예요.”
차분한 목소리로 모용미는 말을 이었다.
“만일 상황이 위험할 것 같으면 즉시 물러나도록 서찰을 통해 각별히 주의해 두었어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있는 공동파 제자들은 무공이 뛰어난 일대제자들이다.
게다가 능세영과 금화영이 있으니 위험한 일은 없을 터였다.
따각, 따각.
십여 대의 마차와 수백 마리의 말들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운현의 마음에 피어나는 불안의 그림자 같았다.
운현 일행과 삼백여 공동파 제자들은 관도를 내달렸다.
청해호로 가기 위해서는 난주를 지나 기련산맥 남쪽 끝자락을 통과해야 했다.
혹시 모를 분란을 피하기 위해 난주는 들르지 않았고, 행렬은 곧 기련산맥으로 들어섰다.
길은 좁은 계곡을 따라 계속 이어졌다.
유명한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일부답게 황량한 산들 사이로 이어지는 길은 마치 긴 복도 같아서 운현 일행의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관도와 달리 길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탓에 행렬은 자주 멈춰 재정비를 해야했다.
다행히 중간에 작은 마을이 있어 어려움은 덜했다.
그렇게 거칠고 험한 길을 지난 후에야 행렬은 비로소 청해호 인근의 도시 서녕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이백오십여 마리의 말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푸른 하늘에 피어올랐다.
서녕을 출발한 행렬은 산을 빠져나와 청해호를 향해 황야를 내달렸다.
고원의 차가운 바람이 뺨을 때렸지만 운현 일행과 공동파 제자들은 이미 털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따각, 따각.
서녕에서 하루를 쉬었지만 고원 특유의 환경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만일 모용미의 제안대로 사흘을 공동산에서 머물지 않았다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을 터였다.
파도치는 거대한 호수와 저 멀리 하얀 눈을 머리에 인 설산들을 바라보며 행렬은 황량한 땅을 질주했다.
그리고 얼마 후, 운현 일행과 공동파 제자들은 능세영과 금화영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어서 오게.”
노부인 능세영이 웃으며 일행을 반겼다.
그녀와 금화영, 공동파 제자들은 커다란 유목민 천막들에 머물러 있었다.
햇볕이 잘 들고 초원이 펼쳐진 곳이라 언뜻 보아서는 떠도는 유목민들의 야영지처럼 보였다.
“자네들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군.”
금화영도 반가운 표정으로 운현 일행을 맞이했다.
“괜찮나?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고?”
“다행히 별일 없었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운현은 웃으며 답했다.
햇빛이 강렬한 탓인지 능세영과 금화영의 피부는 그사이 살짝 거무스름해져 있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세. 할 말이 많으니.”
능세영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파 제자들이 말에서 짐을 내리는 동안 운현 일행은 능세영을 따라 제일 큰 유목민 천막으로 향했다.
한적하던 야영지가 사람과 말 들로 시끌벅적해지고 있었다.
또르륵.
찻잔이 채워지며 부드러운 향이 천막 안에 퍼졌다.
그것만으로도 한결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이곳은 정말 차가 없으면 못 살겠더군.”
노부인 능세영이 찻잔을 쥐며 말했다.
천막은 일행이 모두 들어갈 만큼 컸지만 의자 같은 건 없어서 모두들 바닥에 깐 양탄자 같은 것 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평소에는 향을 즐기려는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살기 위해 마신다는 느낌이라네. 후후후.”
일행은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따뜻한 차는 고원의 차가운 바람을 맞고 달려온 일행의 몸을 녹여 주었다.
천막 한가운데 피워 놓은 은은한 숯불 화로와 그 위에 올려놓은 찻주전자에서 피어오르는 김도 그저 고맙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정식으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사락.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운현이 말했다.
“여러분, 이분이 과거 단신으로 혈교의 야욕을 꺾으신 능 여협이십니다. 가히 영웅이라 불려 마땅한 분이시지요.”
부스럭.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장로들과 가주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편한 천막 안이지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허어.”
노부인 능세영은 자신을 기다리는 그들을 보며 나지막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각 파의 장로와 가주 들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가히 강호 무림의 최고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능세영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뭐 하나? 어서 일어서게.”
뒤에 서 있던 금화영이 핀잔처럼 스승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가에는 벌써 눈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노부인 능세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슥.
운현을 비롯한 장로와 가주 들은 일제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요란한 인사말은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노부인 능세영은 정중하게 그들의 예에 답했다.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소.”
두 손을 모은 능세영이 말했다.
“……그리고, 고맙소.”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마음 약한 금화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화로에 올려놓은 찻주전자에서 피어오른 부드러운 향이 천막 안을 훈훈하게 감돌았다.
양탄자와 방석 위에 다시 둘러앉은 후에, 운현은 함께 온 일행을 능세영과 금화영에게 소개했다.
장로와 가주 들은 능세영과 금화영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젊은 금화영의 경지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앞으로 그녀의 행보가 강호 무림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인사가 끝난 후, 일행은 혈교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면 혈교는 이곳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있겠군요.”
모용미가 말했다.
능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걸세. 한곳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계속 야영지를 옮겼으니까. 지옥혈룡은 교활하지만 성정이 급하고 신중하지 못하니 이곳을 습격할 가능성은 없을 걸세.”
“다행이군요. 정말 고생이 많으셨네요.”
모용미의 목소리엔 진심이 어려 있었다.
노부인 능세영은 빙긋 웃었다.
“고맙네. 자네는 정말 착하군. 내 제자가 좀 본받았으면 좋겠어.”
“내, 내가 뭐 어때서 그러나!”
금화영이 항의했지만 능세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능세영은 말을 이었다.
“설영대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물러나도록 했네. 서른 중에 행방불명이 열이나 되어 희생이 크다네.”
연락이 끊어진 설영대 무사들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혈마인의 기운에 침식당하면 혈인이 되거나 한 줌 핏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혈마인의 기운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네.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하네.”
“알겠습니다.”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인들을 상대로는 야습의 이점이 없으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그들의 근거지를 치도록 하지요.”
이견은 없었다.
모용미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결전은 내일 아침입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단호하게 빛났다.
혈교와 일전을 벌일 순간이 바로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
황량한 계곡 사이, 낯설고 거대한 건축물이 서 있었다.
본래 휘황찬란했을 색은 이미 바래 알아볼 수도 없었고, 군데군데 무너진 모습은 영락없이 버려진 고대 사원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늘로 솟은 볼록한 원뿔형의 기이한 구조물들 역시 오랫동안 방치되어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했다.
한때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의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이 커다란 사원은, 이미 오래전에 쇠락한 고대 왕국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 거대한 사원은 아직도 이곳에 남아서 푸른 청해호를 내려다보며 묵묵히 서 있었다.
두두두두.
나지막한 땅울림과 함께 말을 탄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계곡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운현 일행과 삼백오십여 명에 이르는 공동파의 제자들이었다.
계곡 입구에 다다른 그들은 천천히 말을 멈췄다.
휘릭.
문득 하얀 무복을 입은 무사가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을 감시하던 설영대였다.
그는 말에 탄 운현을 향해 다가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슥.
무사는 고개를 들었다.
“저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어딘지 어색한 말투였지만 뜻을 전하는 데는 충분했다.
운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무사는 가볍게 예를 표하고는 물러갔다.
운현은 말을 탄 채 눈을 들어 거대한 고대 사원을 바라보았다.
“마치 성채 같군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옆에 있던 모용미는 그 말에 동감했다.
기이하고 위압적인 사원의 모습은 경건함보다는 오히려 두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단 하나뿐이어서,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성채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저곳이 혈교의 근거지인가요?”
모용미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의 확인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운현은 고대 사원에서 흘러나오는 어두운 기운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과거 무림맹이 무너질 당시 보았던, 실혼인들에게서 풍기던 기운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쯧.”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비록 검은 기운은 볼 수 없었지만 저 고대 사원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한 기운은 분명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가주들도 다들 눈살을 찌푸렸고, 이런 기운에 민감한 도가의 장로들은 연신 도호와 불호를 되뇌고 있었다.
소림의 혜천과 아미의 천수 신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맹주님. 그러면 이제…….”
모용미가 운현을 향해 말했다.
혈교의 근거지를 공격할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었다.
삼백오십여 공동파 제자들에겐 역량에 따라 제각기 역할이 주어졌다.
공동파를 포함한 도가의 장로들, 세가의 가주들은 물론이고 소림의 혜천과 아미의 천수 신니, 능세영과 금화영 같은 절정고수들에게도 각자 할 일들을 정해 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진바 모든 전력을 쏟아붓는 것뿐이다.
비검 공손월이 비유했듯이, 개미지옥을 짓밟는 전투마의 말발굽처럼 말이다.
“네.”
운현은 조용히 답했다.
“출진의 시간입니다.”
고대 사원을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