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화. 개미지옥
항주를 떠난 일행의 여정은 비교적 순탄했다.
감찰어사 조관이 세심하게 계획한 덕에 가는 곳마다 관의 쾌속선과 마차 들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영호준이 걱정한 일도 없었다.
장로와 가주 들은 순순히 운현의 의견에 따랐고 촉박한 여정에 대해서도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객옹이 묵묵히 운현의 뜻을 받아들인 것과,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제대로 된 요리가 나온 덕분이겠지만 말이다.
놀라운 것은 모용미의 친화력이었다.
단아하고 예의 바른 데다 일행을 꼼꼼히 챙기는 모용미는 모두에게 인기가 높았다.
가주들은 그녀를 손녀딸처럼 여겼고, 가정을 이루지 않은 사대정파의 장로들은 모용미를 보기만 해도 흐뭇해했다.
특히 아미의 천수 신니는 모용미를 대단히 마음에 들어 해서 자신의 속가제자로 삼을 생각까지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여정 끝 무렵에는 군자검 제갈명조차 ‘나도 손녀딸이 있지만 미아처럼 바르게 자란 아이는 드물다.’라며 운현에게 은근히 눈치를 줄 정도였다.
그사이 일행은 어느새 섬서성의 성도 서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멀어 보이던 감숙이 이제는 지척이었다.
따각, 따각.
마차는 천천히 공동산 아래에 멈춰 섰다.
산으로 들어서는 곳에는 이미 공동파의 장로들이 나와 있었다.
산문도 아니고 산 아래까지 내려온 것은 그들이 이번 방문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일행이 내리기 시작했다.
먼저 내린 운현은 장로들을 향해 걸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
공동파의 장문인 대행 천운자가 정중히 손을 모으며 말했다.
사대장로인 혼원 진인과 옥로 진인, 그리고 현기자 역시 운현을 향해 예를 표했다.
운현 역시 그들에게 정중하게 답례했다.
“다들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맹주님 덕분이지요.”
천운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리고 운현 뒤에 서 있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허어.’
천운자는 내심 감탄을 흘렸다.
운현과 함께 온 이들의 면면은 과연 대단했다.
언뜻 보아도 다들 천운자나 사대장로보다 무위가 높은 데다, 가히 일파의 종사다운 기세가 느껴졌다.
“이곳까지 찾아와 주신 강호의 영웅들께 감사드리오. 복마의 뜻을 품은 여러분을…….”
천운자가 일행을 향해 눈을 빛냈다.
“공동은 기꺼이 환영하오.”
슥.
천운자가 고개를 숙이며 도호를 외웠다.
사대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행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락.
장로들과 가주들은 각자 예를 표했다.
나지막한 불호와 도호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지극히 폐쇄적이고 사파로까지 매도되던 공동파가 강호 무림의 장로와 가주 들에게 산문을 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공동파는 먼 길을 온 일행을 위해 쉴 곳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오래된 객사였지만 따뜻한 차를 음미하기엔 충분했다.
달칵.
운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러면 지금 능 여협과 금 소저는 청해호 인근에 계십니까?”
“그렇소.”
혼원 진인이 말했다.
그는 운현에게 얇은 서찰을 건넸다.
“얼마 전 전해 온 소식이오.”
운현은 서찰을 열었다.
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좋지 않군요.”
운현은 서찰을 임시 군사인 모용미에게 건넸다.
모용미의 표정도 굳었다.
서찰을 살핀 그녀는 고개를 들고 혼원 진인에게 물었다.
“설영대 무사들이 행방불명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연락에 따르면 대략 열흘 전부터요.”
“다른 움직임은요? 혈교가 근거지를 옮긴다든가…….”
혼원 진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는 없소. 다만 설영대 무사들의 수가 크게 줄어 확신은 못 하오.”
“함정이군.”
군자검 제갈명이 대뜸 말했다.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은 우리가 오는 사이 함정이 되었거나요.”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거리가 멀다는 건 치명적이네요. 상대에게 대비할 시간을 허락할 수밖에 없어요.”
혈교를 급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혼원 진인은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빈도도 그리 생각하오. 허나 그곳에 혈마인인 지옥혈룡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오.”
“지옥혈룡만이 아니오.”
공동의 사대장로인 현기자가 말했다.
“그곳에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다른 혈마인이 숨어 있소. 그곳에 넘실거리는 사악한 기운을 빈도가 직접 확인했으니 말이오. 혈마인은 혈교의 수호자이자 최강의 전력이니, 설령 함정이라 해도 반드시 그들을 처단해야 하오.”
“또 다른 혈마인이 있다고?”
아미의 천수 신니가 말했다.
“그건 조금 이상하군. 자신들이 노려지고 있음을 아는데도 피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마 혈교는 이번 기회에 커다란 위협 중 하나를 해결할 속셈일 거예요.”
모용미가 나지막이 말했다.
“과거 혈교는 천일검 능 여협에 의해 그 뜻이 꺾인 바 있어요. 검기발현의 절정고수가 그들에게 큰 위협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지요. 그러니 우리를 끌어들여 처리하고자 하는 거예요. 자신들이 유리한 곳에서요.”
창룡맹이 공동파와 뜻을 함께한 이상 창룡맹의 절정고수들이 혈교를 대적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들의 영역으로 창룡맹의 고수들을 끌어들이는 쪽을 혈교는 선택한 것이다.
“예컨대 개미지옥을 만든 것이로군.”
제갈명의 비유는 적절했다.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자들을 끌어들여 처리하는 개미지옥 말이다.
“허나 그것은 개미에게나 그러할 뿐이네.”
비검 공손월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투마의 말발굽 아래에서는 그저 짓이겨질 따름이지.”
“어르신들의 말씀대로예요.”
모용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허나 아무것도 모르고 상대의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는 건 과히 기분 좋지 않은 일이지요. 신중한 준비가 필요해요.”
그녀는 혼원 진인에게 물었다.
“혈교는 사람들의 피를 갈취하고 혈인을 만든다고 했는데, 현재까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지요?”
혼원 진인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나지막이 도호를 외우고 입을 열었다.
“최근까지 우리가 확인한 마을만 해도 스물여섯 곳이오. 다들 이백 호 내지 삼백 호의 규모였고, 파악하지 못한 것들까지 생각하면 그 두 배는 족히 되리라 생각하오.”
“맙소사.”
모용미는 탄식을 흘렸다.
이백 호에서 삼백 호의 마을이 스물여섯 곳이면 그 인원만 해도 대략 삼만여 명이 넘는다.
그런데 그 두 배라면 육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혈교에 희생되었다는 뜻이다.
덜컹.
감찰어사 조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관이 움직이지 않았단 말입니까?”
혼원 진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득.
조관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어찌 이런 일이…….”
“그래 봤자 작은 현(縣)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니까.”
제갈명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해가 작다는 말은 아닐세. 자네가 분노하는 것도 당연하며, 조정이 이런 일을 그냥 넘기지 않는다는 것도 아네. 그러나 수많은 현 중 하나가 사라진 정도의 일일세. 지방대관이 숨기고자 하면 당분간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 특히나 이런 변방에서는 더더욱 말이야.”
냉정하기까지 한 말이었지만 제갈명의 지적은 옳았다.
관에서 제대로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인구도 부지기수인 데다가, 때로는 사람으로도 취급받지 못하는 것이 민초들의 삶이었으니 말이다.
조관은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그들은 반드시 처벌받을 것입니다.”
문득 운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관은 고개를 들었다.
“관인의 직무를 방기한 자들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며, 그 누구라 할지라도 빠져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서늘한 눈빛으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한 방책에 집중하도록 하지요.”
조관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운현의 말은 지극히 합당했다.
“……네, 대인.”
조관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운현은 혼원 진인에게 물었다.
“이전에 혈교가 발흥했을 때도 이렇게 큰 피해가 있었습니까?”
혼원 진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답은 공동파 장문인 대행인 천운자가 했다.
“이것과는 비교할 바 없이 컸다고 하오.”
천운자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죽은 자가 수백만이며, 혈교가 일어났던 지역에서는 한동안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할 정도니 말이오.”
수백만이라는 숫자는 정확한 것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것도 분명했다.
“그러면 이번에 반드시 막아야겠군요.”
천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모용미를 바라보았다.
“군사님, 어찌 대응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상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 경솔히 뛰어들면 안 되겠지요.”
모용미는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어르신들의 여독을 풀고 최상의 상태로 혈교를 상대하는 것이 좋겠어요. 혈교에 대해 좀 더 준비할 것들도 있고요. 본래 개미지옥은 쉽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혼원 진인은 우려를 표했다.
“그렇다 해도 너무 오래 지체되면 좋지 않네. 때를 놓치면 더욱 어려워질 테니 말일세.”
“괜찮아요. 아마도 사흘 정도면 충분할 거예요.”
“사흘도 필요 없다.”
철검 남궁벽이 불쑥 말했다.
“여독을 푸는 데는 이틀이면 충분해.”
“나는 내일이면 된다.”
비검 공손월이 지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허허, 그래 가지고 무슨 절정고수라 자처하는가? 나는 지금이라도 상관없다네.”
군자검 제갈명도 나섰다.
모용미는 빙긋 웃었다.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래도 다들 푹 쉬셔야 해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 모용미는 운현을 돌아보았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느냐는 의미였다.
운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사님의 말씀대로 하지요. 다만 능 여협과 금 소저에게 서찰을 써서 상황을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쩌면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금화영의 성격을 생각하면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물론 그러다가 능세영의 핀잔을 듣겠지만 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운현의 말로 회의는 끝났다.
하지만 장로와 가주 들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이제부터 폐쇄적인 장벽에 숨어 있던 공동파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공동파 사대장로들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오해를 거두고 복마의 뜻을 위해 협력할 절정고수들은 그들에게도 절실했으니까.
***
깊은 밤, 공동파.
운현은 공동파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도관 앞에 서 있었다.
이곳저곳 불을 밝힌 공동파의 도관들이 밤하늘 아래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박.
“운 학사님.”
문득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군사 모용미가 단아한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네, 생각할 것이 조금 있어서요.”
사박, 사박.
모용미는 조용히 걸어와 운현 옆에 섰다.
그리고 품 안에서 작은 자기 병 둘을 꺼냈다.
“따뜻한 차를 가져왔어요. 혹시 괜찮으시면…….”
“감사합니다.”
운현은 기꺼이 손을 내밀어 병 하나를 받았다.
작은 병에 술을 담는 건 보았지만 차는 또 처음이었다.
그녀가 품고 온 덕분인지 차는 아직도 따뜻했다.
후룩.
운현은 가만히 차를 음미했다.
부드러운 차향이 밤바람을 타고 번져 나갔다.
두 사람은 조용히 공동파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준비는 잘 되고 있습니까? 모용 소저.”
운현이 물었다.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 대인께서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셔서 괜찮아요. 가능하면 준비할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요.”
“죄송합니다.”
난데없는 말에 모용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착잡한 표정으로 운현은 말했다.
“소저께 이런 위험부담을 지게 해서요. 소저께서 이럴 필요는…….”
“괜찮아요.”
모용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대단한 분들의 군사가 되다니, 무가의 딸로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걸요. 이 일을 알면 절 부러워할 사람들이 아주 많을 걸요?”
그녀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모용미가 괜찮다고 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운 학사님과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요.”
운현이 놀란 얼굴로 모용미를 돌아보았다.
모용미는 부드럽게 웃었다.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불빛이 아른거렸다.
“……바람이 차네요. 너무 오래 계시지 마세요.”
모용미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 네.”
운현이 얼른 그녀의 예에 답했다.
모용미는 몸을 돌리고 조용히 걸어갔다.
사박, 사박.
운현은 모용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모용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의 뺨이 붉게 달아오른 건 들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