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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70화 (470/530)

470화. 출정(出征)

빙설은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빠르게 다가오는 지표면의 모습이었다.

빙설은 반사적으로 내력을 끌어 올리며 몸을 뒤틀었다.

타닥.

그녀의 두 발과 한쪽 무릎, 그리고 손이 차례로 땅에 닿았다.

빙설은 고개를 들었다.

놀란 표정의 운현이 한 손을 그녀에게 내밀고 있었다.

빙설은 눈을 깜빡였다.

“후우. 다행이군요.”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빙설이 다쳤나 싶었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무사한 모양이었다.

스륵.

운현은 손을 거두었다.

빙설은 여전히 운현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운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괜찮습니까?”

그 말에 빙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사락.

빙설은 힐끗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다친 곳도, 부러지거나 상한 곳도 없었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기껏해야 자신과 운현이 선 자리 정도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가장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휘릭.

빙설은 검을 두 손으로 마주 잡았다.

그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졌습니다.”

그건 대단히 담백한 패배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소저의 검을 흘려 낸 것뿐이니 이것으로 승부가 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빙설을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하지만 이 비무의 끝은 조금 더 미루기로 하지요.”

“……알겠습니다.”

빙설은 고개를 숙여 운현의 뜻에 따랐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혹은 굳은 얼굴로 운현과 빙설을 쳐다보고 있었다.

운현은 그들을 향해 가볍게 예를 표했다.

스릉.

미명을 거둔 운현은 객옹에게로 걸어갔다.

“가자.”

무심한 목소리로 객옹이 말했다.

그는 벌써 몸을 돌리고 있었다.

운현은 객옹을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저벅, 저벅.

“어찌한 것이냐?”

문득 객옹이 물었다.

운현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예전에 일은께서 하셨던 수법입니다. 검이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빙설 소저의 경지가 뛰어난 바람에 그만 충격이…….”

“그것 말고.”

저벅.

발을 멈추고 객옹이 운현을 돌아보았다.

“네가 허공으로 날아오른 그 경신술 말이다.”

“아, 그건…….”

운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경신술이 아닙니다. 검로를 펼치기 위한 움직임이었으니 정확히는 보법이라고 해야겠군요.”

모든 검법은 필연적으로 발의 움직임이 함께하며 그 정해진 움직임을 일컬어 보법이라고 한다.

몸놀림을 가볍게 하는 경신술이나,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경공과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차이가 있다.

지금 운현은 아까 펼쳤던 그 몸놀림이 경신술이나 경공이 아니라 보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가 원하는 곳에 검을 내지르기 위해 발을 내디뎠을 뿐이라고 해야 할까요?”

“내려설 때는 어찌했느냐?”

객옹이 물었다.

운현은 분명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상승의 경신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금 여협의 수법을 응용했습니다.”

객옹이 눈썹을 찌푸렸다.

‘금 여협’이란 금화영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수법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싶은 것이다.

“금 여협을 처음 만났을 때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순간 기세가 강하게 회전하더군요. 그 방식을 이용한 것이지요.”

쑥스러운 듯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나 객옹의 찌푸린 눈살은 펴지지 않았다.

금화영의 경신술이 뛰어나다 해도 객옹에겐 그리 놀랍지 않은, 기억에도 남지 않았던 일이다.

그런데 그걸 보고 아까와 같은 놀라운 광경을 만들어 내다니?

“생각해 보니 그 전에도 비슷한 광경을 몇 번 본 것 같은데, 검로가 아니라서 기억에 남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객옹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저벅.

그는 몸을 돌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운현이 그 뒤를 따랐다.

“경공은?”

걸음을 옮기며 객옹이 물었다.

경신술이 몸놀림에 관한 것이라면 경공은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것이다.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범주로 묶이는 것이고 전수할 때도 대부분 같이한다.

“경공과 경신술은 몸을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지향하는 바가 대단히 다르더군요. 그 탓인지 내력의 운용 방식도 상당히 차이가 있는 듯하고요.”

운현의 대답에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공은 은신술이나 역용술처럼 한 가지 목적에 특화된 수법이다.

일종의 기술에 가까워서 배우지 않으면 능숙해지기 어려웠다.

“그래도 생각한 건 있지?”

객옹이 말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네.”

아무 설명도 없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객옹은 담담한 표정으로 발을 옮기고 운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오후의 햇살이 두 사람의 어깨에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다음 날, 운현과 함께 혈교의 근거지로 갈 사람들이 맹주전에 모였다.

아미의 천수 신니, 화산의 태을 진인, 무당의 청송 진인, 그리고 영호준과 함께 아미로 찾아왔던 소림의 혜천은 물론 철검 남궁벽과 군자검 제갈명, 비검 공손월, 관일검 모용단천, 그리고 북해일문의 빙설까지 있었다.

그야말로 누구라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광경이었다.

더구나 그들을 이끄는 이는 창룡맹 맹주 운현인 데다가 객옹까지 함께 있으니 말이다.

감찰어사 조관과 호위인 항장익도 빠지지 않았지만 총군사 영호준은 함께하지 못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맹주님.”

영호준이 사뭇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장로들과 가주들을 흘깃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창룡맹 총단을 지켜야 할 사람도 있어야 해서이지만 사실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저 많은 어르신들과 함께 먼 길을 간다니, 전 도저히 못 하겠군요.”

“모두 좋은 분들이시잖습니까?”

운현이 웃으며 답했다.

“저는 오히려 기대가 되는데요.”

“기대요?”

영호준은 고개를 저었다.

“어르신들의 취향이 얼마나 확고하신지 아십니까? 게다가 평생 양보나 배려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제가 보기엔 결코 쉽지 않아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영호준은 말을 이었다.

“뭐, 그래도 모용 소저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모용미는 영호준 대신 임시 군사 자격으로 일행에 합류했다.

강호 무림의 일에 밝고 총명한 그녀라면 충분히 군사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었다.

“운 대인.”

옆에 서 있던 청풍검 모용진이 말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저도 함께 혈교를 토벌하고 싶습니다만…….”

“안 됩니다.”

영호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두 분은 저와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일행에 참가 못 한 사람은 청풍검 모용진만이 아니었다.

공손세가의 대제자 공손강 역시 남아야 했다.

그는 비검 공손월 대신 자신이 혈교를 치러 가고자 했으나 공손월의 결심은 확고했다.

“총군사님, 뒷일을 잘 부탁드립니다.”

운현이 말했다.

영호준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네, 이곳은 걱정 마십시오. 예정대로라면 개파대전 전에 오시겠지만 혹시 늦겠다 싶으셔도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영호준은 말했다.

“앞당기는 건 몰라도 뒤로 미루는 건 자신 있으니까요. 뭐, 상황이 심각해지면 개파대전이 문제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사뭇 비관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영호준은 정중한 태도로 예를 표했다.

“맹주님과 여러분의 무운을 기원합니다.”

운현은 고개를 숙여 그의 예에 답례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북해일문의 대궁주를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고 하셨으니 이 말로 대신하지요.”

부드럽게 웃으며 운현은 말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대궁주는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답했다.

“나중에요.”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몸을 돌렸다.

각 문파의 장로들과 세가의 가주들, 그리고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이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분께서 뜻을 함께해 주신 것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지금, 출발합니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사람들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가닥, 따가닥.

그날 여러 대의 마차가 창룡맹 총단을 떠났다.

창룡맹의 기를 건 마차들은 곧 항구에 도착했고, 타고 있던 사람들은 관의 쾌속선에 몸을 실었다.

혈교의 근거지를 토벌하기 위한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

푸른 바다를 뜻하는 청해호(靑海湖)는 가히 내륙의 바다라 불릴 만한 호수였다.

동정호가 크다고 하지만 청해호는 그보다 더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바로 청해호가 새외라 불리는 머나먼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탓이었다.

촤아아.

파도치는 청해호의 모습은 바다와 다름없었다.

내륙의 호수임에도 청해호의 물결은 소금기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거대한 청해호를 지켜보듯 서 있는 높고 황량한 산들, 그리고 메마른 사막은 그야말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커억.”

나지막한 비명이 계곡에 울려 퍼졌다.

저 멀리 청해호가 굽어보이는 황량한 계곡에서, 흰색 무복을 입은 무사가 붉은 창에 가슴이 꿰뚫린 채 쓰러지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이곳을 감시하던 설영대 중 한 사람이었다.

“크크크.”

지옥혈룡이 비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로 내 이목을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더냐? 어림도 없는 일이지.”

그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득였다.

그의 손에서 뻗어 나간 핏빛 창은 여전히 무사의 가슴에 박힌 채였다.

“어디, 너는 어떤가 한번 보자.”

우우웅.

지옥혈룡의 말과 동시에 피처럼 붉은 창이 소리를 냈다.

그와 함께 혈마인의 기운이 혈창을 따라 무사의 가슴에 밀려 들어갔다.

쓰러졌던 무사의 몸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컥!”

신음과 동시에 의식을 잃은 무사가 번쩍 눈을 떴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동자가 마치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했지만 무사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상관하지 못했다.

“으, 으으, 으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황량한 계곡에 메아리쳤다.

지옥혈룡의 창을 따라 그의 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바로 지옥혈룡의 음산한 기운이었다.

털썩.

무사가 쓰러졌다.

그의 가슴을 꿰뚫고 있던 핏빛 창이 빠져나갔다.

스륵.

혈마인의 피로 만들어진 혈창은 언제 있었냐는 듯 지옥혈룡의 손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후후후.”

지옥혈룡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자신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일어나라.”

스륵.

쓰러졌던 무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은 마치 인형처럼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지만 시뻘겋게 변해 버린 그의 눈동자는 지옥혈룡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꿇어라.”

지옥혈룡의 말에 무사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주저함은 길지 않았다.

쿵.

무사는 거친 땅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를 내려다보며 지옥혈룡은 말했다.

“이제부터 너는 나의 혈인이다.”

슥.

“……존, 명.”

설영대 무사였던 혈인은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해의 언어였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지옥혈룡의 뜻은 언어를 넘어 그의 심령을 장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부자연스러운 행동도 얼마 후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크흐흐흐.”

지옥혈룡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물결치는 청해호를 바라보았다.

“자, 어서 오너라.”

두 팔을 벌리며 지옥혈룡은 말했다.

“너희를 위한 지옥이 준비되어 있으니 말이다. 크하하하하.”

지옥혈룡의 웃음소리가 황량한 계곡에 메아리쳤다.

그 목소리는 곧 바람 소리에 실려 사라졌지만, 지옥혈룡의 번들거리는 눈빛은 새빨갛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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