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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69화 (469/530)
  • 469화. 검결지(劍訣指)

    맹주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운현은 미소를 머금은 채 군자검 제갈명을 쳐다보았다.

    “……여러분이 오시기 전에.”

    차분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객옹 어르신께서 그러시더군요. 어쩌면 뒤로 빼거나 조건을 걸 사람이 나올 것이라고요. 그리고 저는 그런 분들은 놓아두고 갈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군자검 제갈명의 눈썹이 꿈틀했다.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허나 원하시는 바가 ‘비무’라면.”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제가 어찌 거절 할 수 있겠습니까?”

    군자검 제갈명은 웃음을 흘렸다.

    그는 운현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흔쾌히 받아 주심을 감사드리오.”

    “천만에요.”

    운현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례할 때였다.

    “말이 난 김에 지금 해 보는 건 어떨까요?”

    군자검 제갈명의 말을 끊은 사람은 바로 북해일문의 대궁주였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건 대가도, 보상도 아니에요. 그렇다면 지금 비무를 한다 해도 크게 상관없지 않나요? 출정을 앞둔 여흥이 되기도 할 거고요.”

    대궁주의 붉은 입술에 매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는 이미 준비되어 있어요.”

    사락.

    빙설의 주위로 차가운 한기가 흘러나왔다.

    운현을 바라보는 빙설의 눈빛에는 이미 비무에 대한 의지가 가득했다.

    “그러니까…….”

    군자검 제갈명이 입을 열었다.

    “지금 북해일문은 스스로 맹주의 상급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오?”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운현에게 미운털이 박힐 것을 각오하고 얻어 낸 밥상에 대궁주가 덜컥 수저를 얹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답니다.”

    대궁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미소는 주변을 환하게 만들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저는 다만, 빙설이 아주 오래 기다렸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이에요.”

    군자검 제갈명이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그렇게 하지요.”

    운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운현을 향하고,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만 다른 분들은 나중을 기약하겠습니다. 지금은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요.”

    군자검 제갈명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운현이 이 자리에서 비무를 받아들일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럼, 갈까요?”

    운현이 말했다.

    빙설의 눈빛이 단번에 변했다.

    하지만 운현의 표정은 그저 온화할 뿐이었다.

    운현이 사람들과 함께 향한 곳은 창룡맹 총단 안쪽에 있는 넓은 공터였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곳이었지만 사람들은 이 자리가 신승이 거처하던 옛 ‘와룡헌’ 터임을 알아차렸다.

    운현은 그곳에서 빙설과 마주섰다.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주변의 풀들이 물결처럼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은 처음 빙설과 검을 마주했던 서호의 호반을 연상케 했다.

    슥.

    빙설이 먼저 예를 표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운현은 두 손을 맞잡고 그녀에게 답례했다.

    “오랜만이군요.”

    운현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사실 소저는 제가 처음으로 검을 맞댄 진짜 고수였습니다. 그 비무는 제게 아주 큰 의미였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고개를 든 빙설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운현을 향하는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곧고 청명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후후.”

    운현은 웃음을 흘렸다.

    “그때도 소저는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예전에는 미처 대답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겠군요.”

    빙설을 똑바로 쳐다보며 운현은 말했다.

    “소저의 검을 상대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빙설이 말했다.

    “저 역시 영광입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스릉.

    운현이 검을 뽑았다.

    북해의 검 미명이 햇빛 아래 찬란하게 빛났다.

    “시작할까요?”

    사박.

    빙설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몸을 낮췄다.

    마치 예를 올리는 듯한 그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이 의아해 하는데, 어느 순간 빙설의 두 손에는 두 자루의 소검이 들려 있었다.

    쉭.

    빙설의 하얀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두 자루의 소검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날아올랐다.

    피리리리릭.

    ‘저건!’

    지켜보던 군자검 제갈명은 깜짝 놀랐다.

    마치 원반처럼 날아오른 두 자루의 소검.

    운현을 향해 짓쳐 드는 그 궤적은 결코 비검술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칼날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번득이고 있었다.

    탓.

    그 순간 빙설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섬뜩한 검명이 주위를 울렸다.

    우우웅.

    어느새 그녀의 손에 들린 검에도 그리고 양쪽에서 짓쳐 드는 소검에도 짙푸른 기운이 완연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기를 머금은 세 자루의 검은 주저없이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콰과곽.

    운현을 단번에 갈라 버릴 듯한 날카로운 기운.

    그러나 운현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웅.

    미명이 나지막이 울음을 흘렸다.

    그리고 운현의 검은 어느새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사락.

    마치 물 흐르듯 유유히 흐르는 미명의 궤적.

    그 궤적은 곧 짓쳐 드는 세 자루의 검과 마주쳤다.

    콰과광.

    폭음이 터져 나왔다.

    빙설의 가녀린 몸이 허공으로 치솟고 두 자루의 소검이 하늘로 날았다.

    운현의 유려한 검로가 세 자루의 검을 단번에 걷어 낸 것이다.

    하지만 빙설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피리리릭.

    “헉!”

    누군가 놀란 듯 신음을 흘렸다.

    두 자루의 소검이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되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빙설 역시 운현을 향해 다시금 짓쳐 들고 있었다.

    그녀의 검에 실린 기운은 점점 더 그 기세를 더해 가고 있었다.

    쾅, 콰광, 쾅.

    검명과 폭음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두 자루의 소검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운현을 향해 날아들었고, 빙설 역시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른 움직임으로 운현에게 검격을 퍼붓고 있었다.

    ‘세상에…….’

    모용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빙설의 움직임은 무공을 익힌 그녀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운현이었다.

    사락, 콰앙.

    운현의 검은 단 한 번도 다급해지거나 밀리지 않았다.

    그저 내키는 대로 허공을 가르는 것 같았지만, 미명의 검로는 빗발치듯 쏟아지는 빙설의 검을 모조리 흘려 내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군.’

    군자검 제갈명은 나지막이 탄식했다.

    빙설이 두 자루의 소검을 날린 수법은 분명 ‘어검술’의 일종이다.

    같은 어검술이자 제갈명의 절기인 ‘유검만리’처럼 엄청난 내력을 담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상대를 견제하는 데는 대단히 효과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빙설이 쉴 새 없이 운현에게 검격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초인적인 정신력과 집중력이 없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허어.’

    군자검 제갈명은 다시 한번 탄식했다.

    빙설의 저 놀라운 검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 내는 운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성의 검을 보았을 때는 거대한 벽이라 느꼈건만…….’

    지금 운현의 모습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

    제갈명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철검 남궁벽과 비검 공손월, 그리고 관일검 모용단천 역시 굳은 표정으로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미의 천수 신니와 화산의 태을 진인, 무당파 장로 청송 진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콰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빙설이 허공으로 높이 치솟아 올랐다.

    또다시 운현에 의해 검격이 막혀 버린 것이다.

    파라락.

    빙설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었다.

    그녀의 머리가 아래를 향하고, 튕겨 나갔던 두 자루의 소검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빙설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쉭.

    세 자루의 검은 그대로 운현을 향해 내리꽂혔다.

    짙푸른 세 자루의 검기가 벼락처럼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훅.

    운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웃!’

    군자검 제갈명은 즉시 고개를 들었다.

    검을 든 운현이 마치 쏘아 올린 화살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이미 운현의 미명은 세 자루의 검과 허공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번쩍.

    콰아앙.

    빛과 함께 폭음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의 옷자락이 폭풍에 휩쓸린 듯 펄럭이고 사방의 풀이 일제히 누우며 흙먼지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군자검 제갈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휘리릭, 탁.

    먼저 땅에 내려앉은 사람은 빙설이었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굽힌 채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있었다.

    다른 손은 여전히 검을 들고 있었지만, 두 자루의 소검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빙설의 흰색 무복은 마치 짐승이 할퀴기라도 한 듯 너덜너덜했다.

    “허어!”

    문득 들려온 탄식은 화산파의 장로, 태을 진인의 것이었다.

    펄럭.

    운현의 옷깃이 허공에 물결쳤다.

    마치 거짓말처럼 운현이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아미의 천수 신니도, 무당의 청송 진인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맙소사.’

    그들은 속으로 연신 불호와 도호를 외었다.

    가주들은 물론 대궁주와 모용미 역시 놀랐다.

    그러나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객옹이었다.

    탁.

    운현의 발이 땅에 닿았다.

    마지막에 조금 주춤하기는 했지만 운현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땅에 내려섰다.

    휘릭.

    운현이 검을 허공에 가볍게 휘둘렀다.

    한 손을 허리 뒤로 두르고 운현은 빙설을 향해 눈을 들었다.

    “대단하군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지요?”

    묻는 운현의 눈동자에는 은은한 열기가 떠올라 있었다.

    빙설의 눈빛 역시 여전히 날카로웠다.

    슥.

    빙설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펄럭.

    빙설의 무복이 일렁였다.

    뒤이어 서늘한 기세가 사방으로 번져 가기 시작했다.

    우웅.

    ‘웃!’

    지켜보던 이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움찔했다.

    나지막한 검명과 함께 빙설의 온몸에서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검명은 점점 더 커져 가고 빙설의 무복은 폭풍을 만난 듯 펄럭였다.

    슥.

    빙설의 검 끝이 하늘을 향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깨달았다.

    귓가를 울리는 검명은 빙설의 검 때문만이 아니었다.

    눈앞에 서 있는 빙설의 기세는 이미 한 자루의 검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건!’

    제갈명도, 공손월도, 남궁벽도 눈을 부릅떴다.

    빙설이 검처럼 느껴지는 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한때 검성만이 가능했으며 지금도 군자검 제갈명과 비검 공손월 외에는 불가능하다 여겨지던 경지.

    바로 검신일체(劍身一體)의 경지에 그녀가 들어선 것이다.

    제갈명과 공손월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한 자루 날 선 검 같은 빙설의 기세는 더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후우우욱.

    한 자루 검과 같은 빙설의 기세가 운현을 향했다.

    그러나 운현의 기세는 변하지 않았다.

    사락.

    운현은 한 손으로 미명을 들어 빙설을 향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한 손은 여전히 허리 뒤에 머물러 있었다.

    어찌 보면 빙설을 가벼이 여기는 듯했지만, 운현의 눈동자에 어리는 열기를 빙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훅.

    전조도, 낌새도 없었다.

    빙설은 한 자루 검처럼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녀의 시야에 운현의 미명이 움직이는 모습이 들어왔지만 이미 늦었다.

    검기도, 아무런 기세도 머금지 않은 운현의 미명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빙설은 그렇게 확신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훅.

    그녀의 눈앞에 검결지가 떠올랐다.

    두 손가락을 모아 검의 형상을 취한 검결지(劍訣指).

    이제껏 운현의 허리 뒤에 머물러 있던 손이 빙설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그리고 빙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사락.

    운현의 검결지가 옆으로 가볍게 움직였다.

    마치 빙설이라는 검의 끝을 옆으로 슬쩍 밀어내듯 말이다.

    ‘아!’

    번쩍.

    빛이 빙설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그것이 그녀가 의식을 잃기 전에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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