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화. 상급(賞給)
창룡맹이 개파대전을 연다는 소식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영웅맹을 무너뜨리고 태평맹을 무릎 꿇게 만든 창룡맹이 드디어 정식으로 강호 무림에 등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창룡맹 개파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대정파인 소림, 무당, 화산, 아미는 물론이고 남궁세가, 제갈세가, 혁련세가, 모용세가, 그리고 공손세가가 참석할 것은 당연했다.
각 성에서 제법 알려진 문파와 세가 들도 전부 초청을 받았고 각계각층의 유력자들과 거대 상단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천하 각지의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규모 행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흥분하는 것은 그 규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개파대전은 창룡검주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첫 자리이자 창룡맹의 시대를 만천하에 선언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몇 달 후에 있을 창룡맹 개파대전을 위해 벌써부터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천하는 넓고 개파대전은 가볍게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 준비와 이동을 생각하면 몇 달도 결코 여유로운 시간이 아니었다.
강호 무림은 온통 달아오르고 있었다.
항주 창룡맹 총단, 맹주전.
단청이 아직 고운 빛을 뽐내고 있는 창룡맹의 맹주전은 단아한 멋을 지닌 목조건물이었다.
창룡맹이라는 이름에 비하면 그리 크다 할 수 없었지만 맹주 한 사람을 위해 지어진 집무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작다고 할 수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단아하면서도 중후한 멋을 풍기는 맹주전이 지금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새 건물 냄새가 나는군.”
탁자에 앉은 공손세가의 가주, 비검 공손월이 내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본가의 증축을 얼마 전 마친 탓인지 유독 민감한 듯했다.
“냄새가 아니라 나무 향일세. 세월이 지나면 깊이를 더하게 되지. 무엇이든 무르익으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 말했다.
그는 중앙 상석에 앉아 있는 운현을 향해 말했다.
“그보다 맹주, 이 정도로 넓으면 한쪽에 서재라도 따로 꾸미는 것이 어떻겠소? 아무리 맹주전이라도 쉴 곳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소만.”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쉴 곳이 없다는 제갈명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맹주전 전체가 하나의 공간인 이곳에는 화려한 장식이나 커다란 가구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러면서도 텅 비었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조용하고 엄숙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었다.
“허허, 내가 보기에는 이대로가 더 좋소이다.”
아미파의 은거 고수, 천수 신니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마치 청정도량에 와 있는 것 같아서 마음마저 고요해지니 말이오.”
그녀는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옆에 있던 남궁세가의 가주, 철검 남궁벽이 무뚝뚝한 어조로 동의했다.
“나도 마음에 드는군. 내 취향도 이러하니까.”
남궁벽은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주 잘 지으셨소이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사실 이 맹주전은 운현의 취향과 영호준의 신조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결과였다.
처음에는 운현도 글씨나 그림을 걸거나 한쪽에 서가라도 만들까 했지만 영호준의 생각은 달랐다.
어디까지나 이곳은 맹주가 집무를 하는 곳이라며 말이다.
그건 황궁에서 익히 본, 공간을 공적인 곳과 사적인 곳으로 나누는 원칙과도 부합해서 운현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슥.
운현은 고개를 돌려 모용미에게 물었다.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모용 소저.”
“네, 괜찮아요.”
아름다운 모용미가 단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찻잔을 두 손으로 쥔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이곳에 있으면 일이 잘될 것 같네요.”
아마도 그럴 것이다.
딴짓할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요? 저는 일이 끝나자마자 나가고 싶어질 것 같군요.”
달칵.
북해일문의 대궁주는 찻잔을 들었다.
여전히 얼음꽃처럼 매력적이고 차가운 그녀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선 일 외에는 할 게 없으니까요.”
그녀의 말도 옳았다.
영호준의 지론 중 하나가 ‘일 끝났으면 빨리 퇴근해야 한다’였으니 말이다.
운현은 빙긋 웃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금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옆에 앉은 객옹은 물론이고 모용세가의 가주인 관일검 모용단천, 화산의 장로인 태을 진인과 무당파 장로 청송 진인도 묵묵히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대궁주 옆에서 서늘한 기운을 흘리고 있는 빙설, 모용세가의 대제자 청풍검 모용진과 공손세가의 대제자인 공손강, 심지어 제갈기호도 있었다.
평소라면 이들이 모인다는 것만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온갖 추측이 나돌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혹 알게 된다 해도 그저 개파대전에 대한 것이려니 여길 터였다.
달칵.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손을 맞대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곳까지 와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덜컹, 덜컹.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들은 도가나 불가 혹은 문파의 방식대로 맹주에게 예를 표했다.
운현은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앉으시지요.”
일어섰던 사람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사이를 둔 운현은 말을 이었다.
“이미 전해 드렸듯이 혈교와 마교가 천하의 안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대상인의 위험 역시 여전하지요.”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놀라지는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운현의 서찰을 받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맹주인 운현이 직접 겪은 일인 데다가 객옹도 함께 있었으니까.
하지만 물어볼 말은 정말로 많았다.
그 심정을 안다는 듯 운현은 빙긋 웃었다.
“많은 것들이 궁금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운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산의 장로인 태을 진인이 물었다.
“혈교와 마교라니, 대체 어떻게 그들이 다시 힘을 얻었단 말이오?”
“공동파는 믿을 수 있소?”
“혈마인은 어떤 자였습니까?”
“차라리 천하에 알려 경계토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온갖 질문이 쏟아졌다.
운현은 침착하게 그들의 질문에 답했다.
그렇게 얼마나 대화가 이어졌을까?
한참이 지난 후 사람들은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달칵.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금으로선 최대한 혼란을 피해 은밀히 대처하되, 모든 문파가 함께 협력할 수밖에 없겠군. 상황에 따라서는 조정과도 긴밀히 연계해야 하고.”
어쩌면 너무나 뻔한 결론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혈마인이라는 자들을 상대하려면 검기발현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하셨소?”
모용세가의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이 물었다.
운현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허나 단독으로 맞서면 위험합니다. 혈마인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허어.”
모용단천은 탄식을 흘렸다.
그는 대제자 청풍검 모용진보다 먼저 검기발현의 경지에 올랐다.
그래도 아직 부족하다 여겼지만 내심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단독으로 혈마인과 맞서면 위험하다니 탄식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면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건가요?”
그 목소리는 모용미의 것이었다.
모용미는 눈을 빛내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지나친 과잉 반응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피해야겠지만 수세적으로만 대처하는 것도 좋지 않아 보여요. 상대의 의도를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 소저께서 말씀하신 대로지요. 그래서 영호준 총군사께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총군사 영호준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책 한 권을 운현 앞에 공손히 놓았다.
그리 크지 않은 그 책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책은 공동파의 협력을 받아 총군사께서 작성한 것입니다. 혈교와 마교의 전형적인 수법은 물론, 그에 대한 대처법까지 자세히 정리되어 있지요.”
사람들의 눈이 빛났다.
혈교와 마교라는 이름은 누구나 알지만 그들에 대해 알려져 있는 것은 대단히 적다.
그들이 새외의 사교 집단인지, 혹은 일종의 비밀결사 같은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 책은 혈교와 마교의 위험을 막아 줄 매우 중요한 지침이 될 터였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총군사께서 여러분께 상세히 알려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운현은 말했다.
“바로 얼마 전 감숙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청해호 인근에서 혈교의 근거지를 찾았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의 눈이 단번에 휘둥그레졌다.
“허어.”
도가와 불가의 사람들은 도호와 불호를 외우기도 했고 가주와 장로 들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속히 움직이는 것이 좋지 않겠소?”
비검 공손월이 즉시 말했다.
철검 남궁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저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쳐야 하오. 당장 제자들을 이끌고…….”
“상대는 검기발현의 고수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에요.”
낭랑한 대궁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차갑기까지 한 어조로 그녀는 말했다.
“다급히 몰려간다고 아무나 무찌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지요.”
군자검 제갈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대궁주를, 정확히는 북해를 향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럼 북해일문은 어찌하자는 것이오?”
“제 생각은.”
달칵.
찻잔을 놓으며 대궁주가 말했다.
“맹주님과 같아요.”
대궁주는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은 사뭇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궁주는 설영대가 혈교의 근거지를 발견한 사실을 알고 있다.
총명한 그녀는 이미 결론을 내렸을 것이고, 운현 역시 같은 답에 도달했으리라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말씀처럼 속히 움직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무의미한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혈교를 상대할 역량이 있는 이들로 한정해야겠지요.”
‘혈교를 상대할 역량이 있는 이들’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분명했다.
적어도 검기발현의 경지에 이른 자들, 곧 이곳에 있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일은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운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교를 토벌했다 하여 명성을 얻는 일도, 상찬(賞讚)을 받는 일도 없습니다. 영웅이 될 일은 더더욱 없겠지요. 세상이 알지 못할 테니까요.”
혈교의 토벌은 알려져선 안 된다.
아직 마교의 위협이 남아 있는 데다가, 세상에 알려지면 혼란과 불안을 부추길 뿐일 테니 말이다.
혈교가 무림 세가처럼 이권이나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 얻을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알고 있겠지요.”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어려움의 때에 기꺼이 목숨을 건 이들을, 그 고귀한 뜻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소.”
철검 남궁벽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뜻을 함께하고 피를 나누어 비로소 맹(盟)이라 하는 것이니, 나 철검 남궁벽은 기꺼이 맹주의 뜻에 따르겠소.”
아미의 천수 신니도, 비검 공손월과 관일검 모용단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였다.
“……여러분의 뜻이 참으로 감동적이오만.”
군자검 제갈명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설령 친구 사이라 해도 서로 얻는 바가 있어야 관계가 오래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말이오. 아, 오해는 마시오. 맹주의 뜻에 나 역시 기꺼이 따를 것이니까.”
사뭇 여유로운 표정으로 제갈명이 말했다.
“다만 무언가 눈에 보이는 상급(賞給)이 있다면 더 의욕이 나지 않겠소? 그런 것도 없이 어찌 이 노구를 이끌고 머나먼 변방까지 가겠소?”
운현은 빙긋 웃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군자검 제갈명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사실 이 나이 되고 보면 별로 원하는 것이 없어진다오. 명예나 호사도 누릴 만큼 누려 봤고 재물이야 이제 뭐 쓸 시간도 없는 데다…….”
“빨리 말해라.”
문득 객옹의 목소리가 제갈명의 말을 끊었다.
제갈명은 빙긋 웃었다.
“비무입니다.”
그는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맹주님과 다시 비무를 할 수 있다면, 내 언제라도 기꺼이 검을 들겠소.”
제갈세가의 가주라는 사실도, 세가의 어른이라는 입장도 상관없었다.
그의 눈빛은 이미 한 사람의 무인,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