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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67화 (467/530)

467화. 번져 가는 위험

지옥혈룡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이곳에 과거 천일검이었던 능세영이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곳에 올 줄 알았지?”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노부인 능세영이 말했다.

“지나다 보니 냄새가 나더군.”

대답하는 그녀의 표정엔 여유마저 흐르고 있었다.

슥.

지옥혈룡은 슬쩍 상황을 살폈다.

자신의 한 팔을 가져갔던 독선은 보이지 않았다.

능세영과 함께 온 사람은 젊은 금화영과 공동파 제자들로 보이는 몇몇 도인들뿐이었다.

그나마 공동파의 제자들은 담가장 사람들을 도우려는 듯 흩어진 후였다.

‘이상하군.’

지옥혈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인들이 파사의 기운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지옥혈룡이 보기에 저 정도 숫자로 혈인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다.

담가장 사람들은 일부 구할 수 있겠지만 결국 능세영과 금화영 단 두 사람이 지옥혈룡과 수십의 혈인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코 능세영이 유리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미소를 짓고 있는 거지?’

지옥혈룡이 기억하는 과거의 능세영은 치밀하고 집요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자루 날 선 칼 같아서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는 법이 없었다.

말 그대로 ‘천하의 운명을 짊어진 자’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숙적인 자신을 앞에 두고도 여유롭기까지 하지 않는가?

“흥. 네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는 몰라도…….”

지옥혈룡은 방심하지 않았다.

웅.

그는 눈을 빛내며 하얀 손을 들어 올렸다.

우선 혈인들을 불러 모으려는 것이다.

지옥혈룡에 종속된 혈인들은 즉시 반응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던 혈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혈인들 전부는 아니었다.

‘응?’

지옥혈룡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홱.

지옥혈룡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사방에 가득하던 비명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지옥혈룡 자신에게 종속된 혈인들의 연결이 계속 끊어지고 있었다.

아득.

이를 간 지옥혈룡은 능세영에게 외쳤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능세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과거 천일검이던 그녀의 눈빛 그대로였다.

“한 건 너지.”

“뭐라고?”

지옥혈룡이 인상을 썼다.

그때였다.

타닥.

스물 남짓한 혈인들이 지옥혈룡 주위로 모여들었다.

담가장에 들어올 때와 비교하면 순식간에 절반 가까이 줄어든 수였다.

흩어졌던 공동파의 제자들도 노부인 능세영 주위로 모여들었다.

휘릭.

공동파 제자들을 보며 능세영이 물었다.

“상대할 만하던가?”

“네!”

젊은 공동파 제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복마의 힘 앞에서 저들은 십초지적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말씀하신 대로 갑자기 몸을 빼려 하더군요.”

“그래. 저자라면 당연히 그리할 줄 알았거든.”

능세영은 만족스런 미소를 흘렸다.

하지만 지옥혈룡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후우웅.

공동파 제자들의 검에는 파사의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그러나 혈인에겐 치명적인 기운이 그들의 검에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득.

지옥혈룡은 이를 갈았다.

자신이라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하급 혈인들은 감당하기 힘들다.

조금 전 능세영이 ‘한 건 너다’라고 한 말의 의미를 지옥혈룡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저런 기운을 지닌 자들과 대치 중이던 하급 혈인을 일제히 불러들였으니, 순식간에 절반이 사라진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저런 기운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젊은 도인들이 저런 기운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강한 파사의 기운은 도가나 불가의 선사 정도나 되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자, 그럼.”

능세영의 목소리가 지옥혈룡을 일깨웠다.

“어느 쪽을 내어놓겠느냐? 팔이냐, 아니면 목이냐?”

말하는 능세영의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과거 지옥혈룡 자신을 참하던 그녀의 모습이 지금 생생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흥!”

지옥혈룡은 코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카악!”

혈인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스물 남짓의 혈인들은 능세영과 금화영, 그리고 공동파 제자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진형도, 노림수도 없는 막무가내의 돌격이었다.

“어딜!”

능세영이 즉시 검을 뽑았다.

우웅.

초록빛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금화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쉬쉬쉭.

두 사람의 초록빛 검기는 어둠 속에서 선명한 궤적을 그렸다.

파사의 기운이 서린 공동파 제자들의 검 역시 일사불란하게 혈인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접전은 길지 못했다.

몇 남지 않은 혈인들의 눈동자가 붉은빛을 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두 피해라!”

능세영의 외침에 공동파 제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즉시 뒤로 물러섰다.

혈인들은 그 자리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몸이 부풀기 시작했다.

퍼버벙.

혈인들의 육편이 사방을 날았다.

그러나 피해는 없었다.

공동파 제자들과 능세영은 주변의 물건에 몸을 숨겼고, 담가장 장주 역시 금화영이 옷깃을 잡고 몸을 날린 후였기 때문이다.

“……도망갔군.”

능세영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지옥혈룡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혈인들이 덤벼드는 순간 이미 지옥혈룡은 몸을 뺀 것이다.

그러나 능세영의 실망은 길지 않았다.

슥.

고개를 돌려 어둠 속을 바라보며 능세영이 말했다.

“뒤를 부탁하네.”

슥.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기척을 냈다.

하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북해 설영대의 그 은밀한 움직임에 공동파 제자들은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다들 괜찮나?”

능세영이 물었다.

공동파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그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혈인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폭발한 것은 일부의 혈인들 뿐이었지만 쓰러진 다른 혈인들의 잔해도 이미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곧바로 도주하다니, 비겁하군요.”

젊은 공동파 제자 한 명이 말했다.

능세영은 웃음을 흘렸다.

“저들이 용감할 때는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 때뿐일세.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고.”

“허나 혈인들을 이렇게 쉽게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저들에겐 중요한 전력이 아닌가요?”

다른 제자가 물었다.

능세영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일세. 아마도 저들이 얻은 힘이 우리의 예상보다 더 큰 것 같네.”

공동파 제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복마진결이 있지 않나?”

금화영이 성큼성큼 걸어오며 말했다.

“이 심결을 널리 알리면 혈인들 정도는…….”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능세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각 문파의 심결은 무공을 쌓아 올리는 기반과도 같지. 집을 지어 놓았는데 갑자기 기반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복마진결을 알려 준다고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복마진결이 파사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심결을 사용하려면 공동파의 제자 외에는 힘들었다.

“어, 하지만 나는 되던데?”

금화영이 말했다.

능세영은 피식 웃었다.

“너니까 되는 게지.”

무공에 관한 한 금화영의 감각은 천재적이다.

그 때문에 반항기에 제대로 누르지 못해 말버릇이 이 모양이지만.

“……그래도 검기발현의 절정고수라면 복마진결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능세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괜찮소. 장주.”

그 말에 담가장의 장주 담천걸은 정신을 차렸다.

담천걸은 몸을 바로 하고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았다.

“담가장을 구원해 주셔서 감사드리오.”

고개를 숙이며 담천걸이 말했다.

“두 여협과 공동파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하오. 여러분께서 오늘 담가장을 살리셨소이다.”

능세영은 빙긋 웃었다.

“우선 주변을 정리합시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많으니 말이오. 이야기는 그 후에 해도 될 테니.”

담천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능세영과 금화영, 공동파의 제자들과 살아남은 담가장 사람들은 즉시 다친 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큰 부상을 입은 중상자들은 물론이고 이미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지옥혈룡을 내쫓았다지만 너무나 큰 피해였다.

그 와중에도 장주는 사람을 관으로 보내 혈교의 습격에 대해서 알렸다.

대도시 난주에서 담가장이 혈교의 습격을 받은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밤은커녕 다음 날이 되어도 담가장을 찾는 관인은 아무도 없었다.

***

운현 일행은 남경을 떠나 항주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 밖으로 지나는 관도의 풍경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운현은 항주가 가까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습니까? 과연 천하제일이라 자부할 만했지요?”

문득 영호준이 말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네. 정말 대단하더군요.”

영호준의 장담처럼 천하제일루는 대단했다.

이런 곳에 익숙한 영호준마저 '별천지'라 했으니 운현에겐 놀라움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은은한 조명이며 이국적인 장식도 새로웠지만, 벽에 걸린 조각과 그림, 글씨마저 대가의 작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중 일부는 맹주님 소유입니다. 값을 따질 수 없는 작품들이라 처분이 오히려 곤란할 정도니까요. 덕분에 그것들을 보려고 찾아오는 호사가들마저 있을 정도랍니다. 하하하.”

운현 자신의 것이라지만 제대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외에도 진귀한 도자기나 신기한 문양의 향로 같은 것들도 자연스럽게 놓여 있어서, 이런 쪽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발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말로 대단한 건 예인들의 기예지요. 이번엔 볼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만, 두말할 것 없이 최고입니다. 아, 항주 취선루에 있던 소월도 거기 있지요.”

소월은 일은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던 예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물론 다른 예인들의 연주나 기예는 보지 못했다.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했다던 천하제일루의 칠 층을 독차지하고서도, 그저 밤새도록 혈교와 마교의 이야기만 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요.”

운현 역시 아쉬웠다.

그래도 누주인 월향과 그녀의 호위인 연화는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본 월향은 여전히 우아했지만 연화는 아직도 객옹을 어려워했다.

“그럼 각 문파에 공식 서신은 이미 다 보냈습니까?”

운현이 묻자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맹주님의 서찰을 받았을 때 바로 시작했습니다. 허락도 없이 먼저 시작한 셈이 되어 죄송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운현은 주저없이 말했다.

“어차피 제가 총군사께 요청했지 않습니까? 필요한 일이 있다면 제 도착을 기다리지 말고 시작하시라고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다름 아닌 창룡맹의 개파대전에 대한 것이니까요.”

운현의 서찰을 받은 영호준은 즉시 개파대전의 준비에 착수했다.

날짜를 정한 것은 물론 각 문파에 공식 서신도 보냈다.

천하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모이려면 창룡맹 총단의 개파대전이야말로 가장 좋은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감숙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것이로군요.”

감찰어사 조관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감숙성은 혈교와 마교에 대항하는 최전선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관의 통제마저 여의치 않으니 조관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감숙은 당분간 괜찮을 겁니다.”

문득 영호준이 말했다.

“맹주님의 말씀대로라면 공동파가 예전보다 더 강해졌으니, 혈교든 마교든 주춤할 수밖에 없지요.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영호준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감숙에서 꿈틀거리고 있다지만 힘을 얻은 혈교와 마교가 결국 노릴 곳이 어디겠습니까?”

대답은 운현이 했다.

“바로 이곳, 강북과 강남이겠지요.”

조관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혈교와 마교의 목표는 결국 천하를 장악하거나, 혹은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강북과 강남을 노릴 수밖에 없다.

“맹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위험한 곳은 감숙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지요. 특히 우리 맹주님 말입니다.”

조관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개파대전이라는 맹의 중대사를 총군사 영호준 마음대로 진행하도록 한 것은 혈교와 마교의 위협이 생각보다 더욱 심각하기 때문이었다.

따각, 따각.

마차는 항주로 뻗은 관도를 경쾌하게 질주했다.

그러나 마차 안에 탄 사람들의 표정은 결코 밝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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