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화. 한밤의 습격
깊은 밤, 감숙성 난주.
난주 근교의 담가장은 유서 깊은 세가였다.
비록 강호 무림의 거대 세가들과는 비견할 바가 못 되었으나 담가장은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난주에 뿌리내려 온 명문 세가였다.
뛰어난 가전 무공과 각계각층에 걸친 영향력까지, 담가장은 감숙의 세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타닥, 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담가장의 정문을 비롯한 주요 출입구는 창과 도로 무장한 담가장의 제자들이 지키고 있었다.
최근 흉흉해진 분위기 탓에 주기적으로 순찰도 강화했다.
비록 관에서는 부정하고 있지만 감숙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일들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 파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자들의 표정엔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도시 난주에서, 그것도 감숙의 세가인 담가장에 무슨 일이 일어날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깊어 가는 어둠 속에 사방이 고요하던 바로 그때였다.
피피픽.
날카로운 소리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화살이 짓쳐 들었다.
“컥!”
“으악!”
정문을 지키던 몇몇 제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제자들이 즉시 외쳤다.
“스, 습격이다!”
“적이다! 경보를 울려!”
깡깡깡.
날카로운 금속음이 한밤의 정적을 깨트렸다.
이곳저곳에서 등불이 밝혀지고 담가장 전체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쯧.”
붉은빛 무복을 차려입은 잘생긴 젊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혈교의 지옥혈룡이었다.
“역시 하급에게 활은 무리로군.”
“크륵.”
어둠 속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새빨간 눈동자들이 어둠 속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저벅.
지옥혈룡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수십 명의 혈인들이었다.
그들의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얼마 전 능세영의 처소를 습격할 때와는 조금 달랐다.
표정이며 움직임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손에 발톱 모양의 무기인 철조도 들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혈인들의 괴기한 모습은 담가장 제자들을 공포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괴, 괴물…….”
누군가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지옥혈룡은 피식 웃었다.
“괴물이 아니라 저승사자다. 너희에게는 말이지.”
슥.
지옥혈룡은 손을 들었다.
그의 하얀 손은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두드러졌다.
입술을 달싹이며 지옥혈룡이 말했다.
“죽여라, 전부.”
탓.
짧은 명령의 결과는 즉각 나타났다.
혈인들은 몸을 날리며 담가장을 향해 짓쳐 들었다.
콰앙.
커다란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나갔다.
몇몇 혈인들은 쓰러진 제자들을 덮쳤다.
“으아아악!”
“크악!”
“크르르륵.”
정문 앞은 단번에 혼란으로 뒤덮였다.
비명과 신음, 그리고 혈인의 괴기한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콰당탕.
불을 피웠던 지지대가 무너지며 불붙은 나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불빛을 받으며 지옥혈룡은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 이래야 하는 거다. 숨을 죽이고 힘을 기르는 것 따위는 무의미하지. 필요한 것은 오히려 파괴와 혼돈, 그리고 더 많은 피뿐이다.”
저벅, 저벅.
지옥혈룡은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부서진 정문 옆으로 목을 뜯긴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밤 흐를 피는 이것만이 아닐 테니까.
“아아악!”
“뭐, 뭐냐……. 끄아아아!”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옥혈룡은 마치 음악이라도 감상하듯 미소를 머금었다.
바로 그때였다.
퍼억.
묵직한 소리와 함께 혈인 하나가 뒤로 날아갔다.
지옥혈룡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벅, 저벅.
손에 칼을 든 서른여 명의 사내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강렬한 그들의 눈빛은 가진 바 무위가 범상치 않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중앙에 있는 사내, 수염을 기른 중후한 인상의 무인은 바로 이곳 담가장의 장주인 담천걸이었다.
턱.
발을 멈춘 담천걸은 지옥혈룡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너 이노오옴!”
그 목소리는 주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네가 담가장에 어떤 원한이 있어 이런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 당장 멈추지 못할까!”
담천걸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한밤에 이유 모를 습격을 당한 셈이니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옥혈룡은 태연했다.
“원한은 없다.”
“뭐라고?”
담천걸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옥혈룡은 여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너 따위가 내게 무슨 원한을 살 수 있단 말이냐? 이따위 작은……. 아, 여기가 뭐였지? 고가장이던가? 아님 철가장?”
빙긋 웃으며 지옥혈룡이 물었다.
그 모습이 담천걸을 더욱 분노케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슥.
담천걸은 지옥혈룡을 향해 자신의 대도를 겨누었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누구냐?”
“흥.”
지옥혈룡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감히 내 이름을 들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담천걸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담천걸은 오히려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혈교냐?”
지옥혈룡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호오, 네가 본교를 아느냐?”
그 말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담천걸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제자들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너희는 가서 다른 사람들을 구해라.”
그 말에 대제자가 움찔했다.
“장주님! 저희도…….”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담천걸은 제자의 말을 끊었다.
“다른 이들을 구하는 즉시 이곳을 떠나라. 절대로 저들과 맞서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네?”
대제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나 담천걸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들은……, 사람이 아니다.”
대제자는 물론 다른 제자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담천걸은 내심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공동파의 경고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공동파는 이미 담가장에 서찰을 보냈다.
감숙에서 혈교와 마교가 준동하려 하니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담천걸은 코웃음을 쳤다.
갑자기 혈교와 마교라니 당치도 않은 데다, 설령 그렇다 한들 대도시인 난주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담천걸은 공동파를 경계했다.
오래 침묵하던 그들이 갑자기 이런 서찰을 보낸 의도가 혹시 난주에 진출하려는 것이 아닌가 해서다.
‘헌데 그 경고가 사실로 나타날 줄이야.’
조롱과 불쾌감을 담아 공동파에 보낸 답신이 지금은 후회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무엇하느냐! 어서 다른 사람들을 구하지 않고!”
담천걸이 제자들에게 외쳤다.
지금도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대제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대제자는 즉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몸을 날렸다.
휙, 휘릭.
제자들이 떠나자 이제는 담천걸과 지옥혈룡만이 남았다.
담천걸은 서서히 내력을 끌어 올렸다.
우우웅.
그의 대도에서 나지막한 울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옥혈룡은 웃음을 흘렸다.
“훗, 제자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눈물겹군. 하지만 헛수고다. 너도 네 제자들도 그리고 식솔들까지, 이곳에 있는 사람은 오늘 밤 전부 죽을 테니까.”
저벅, 저벅.
지옥혈룡은 거침없이 담천걸을 향해 걸어왔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운이 좋다면 혈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테니. 과연 네가 본교의 힘을 견뎌 낼지…….”
사락.
지옥혈룡은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기대가 되려고 하는군.”
담천걸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기합을 내지르며 지옥혈룡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아아아!”
부우우욱.
그의 도가 바람을 가르며 쏘아져 갔다.
담가장의 가전 무공인 담가 질풍도였다.
내력이 담긴 그의 질풍도는 지옥혈룡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러니 지옥혈룡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무기를 꺼내 들기는커녕 제대로 된 자세조차도 잡지 않고 있었다.
쉬이익.
담천걸의 질풍도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지옥혈룡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지옥혈룡은 그저 조소를 흘릴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질풍도의 칼날이 지옥혈룡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카앙.
“크윽!”
쇳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지옥혈룡이 아니라 담천걸의 것이었다.
지옥혈룡의 목을 가격한 담천걸의 질풍도가 놀랍게도 쇳소리를 내며 튕겨 난 것이다.
내려쳤던 담천걸은 그 충격으로 뒤로 몇 걸음 물러서야 했다.
탁, 탁.
“이, 이럴 수가…….”
담천걸이 경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대 문파들과는 비할 수 없다지만 자신은 담가장의 장주다.
그런데 자신이 전력을 다해 내려친 도가 상처조차 내지 못하다니!
눈으로 보고서도, 상대가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흠. 역시 이 정도인가?”
지옥혈룡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천천히 걸어왔다.
“아쉽군. 네가 검기발현의 경지에 올랐다면 결과는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데 말이지.”
담천걸은 입을 열지 못했다.
검기발현이라면 과거 정사대전 당시 오직 환우오천존만 가능했다는 경지가 아닌가?
강북과 강남의 거대 세가들이 검기발현을 했다는 소문이 이곳 감숙까지 들려오긴 했지만 사실 담천걸은 믿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검기발현의 경지를 지옥혈룡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큭.’
담천걸은 몸을 피할 결심을 했다.
하지만 그 결심은 실행되지 못했다.
“어디 가려고?”
훅.
지옥혈룡의 눈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 순간 담천걸은 온몸이 굳어 버렸다.
‘헉!’
마치 온몸이 꽁꽁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전신의 내력을 끌어 올렸지만 담천걸의 손발은 그저 경련하듯 움찔거릴 뿐이었다.
“도망가려 해도 헛일이다. 나의 이 권능에서는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으니까.”
저벅, 저벅.
지옥혈룡은 담천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하얀 손을 뻗었다.
슥.
얼음처럼 차가운 손이 담천걸의 정수리에 얹혔다.
지옥혈룡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너의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시간이다.”
후우웅.
지옥혈룡의 손이 새빨간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웅.
나지막한 검명이 들리는 순간, 지옥혈룡은 지체 없이 손을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시퍼런 기운이 지옥혈룡과 담천걸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쉬익.
“큭!”
지옥혈룡은 즉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의 팔에는 이미 새빨간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지옥혈룡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너…….”
후우웅.
지옥혈룡과 담천걸 사이, 초록색 검기를 뿜어내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아름다운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그녀는 바로 천일검 금화영이었다.
“흠, 아무래도 내가 늦지는 않았나 보군.”
지옥혈룡을 바라보며 금화영이 말했다.
담천걸은 갑자기 나타난 금화영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옥혈룡은 이를 갈고 있었다.
금화영은 지옥혈룡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아쉽군. 팔을 재생하는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는데 말일세.”
지옥혈룡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화영이 홀로 나타날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휘리릭.
어두운 밤하늘에서 몇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대부분은 도인 차림의 젊은이들이었지만 그중에는 지옥혈룡이 익히 아는 사람도 있었다.
사박.
노부인의 발끝이 부드럽게 땅을 디뎠다.
“또 만나는군.”
담담한 목소리로 노부인 능세영이 말했다.
하지만 지옥혈룡은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그가 습격했을 때와 달리 능세영이 완전히 변했다는 사실을.
그녀의 머리엔 흰머리가 여전했지만 더 이상 병마의 그늘 같은 건 없었다.
“갑자기 자네에게 이런 부탁을 해도 되나 싶지만 내 하나뿐인 제자가 보고 싶어 해서 말이네.”
희미한 미소까지 머금으며 능세영은 말했다.
“그 팔 한 번만 다시 잘라 봐도 되겠나? 아, 목이면 더 좋고.”
으득.
지옥혈룡은 이를 갈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