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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65화 (465/530)

465화. 공정한 거래

깊은 밤, 기련산맥 끝자락의 한 야산.

나무조차 보기 힘든 황량한 이곳에 마적들의 산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산채 중앙에는 커다란 모닥불이 타오르고, 여기저기 횃불도 걸려 있었지만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여 명에 달하던 마적들이 전부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초저녁만 해도 술과 고기로 시끌벅적하던 산채가 지금은 그저 피비린내만 가득할 뿐이었다.

“흐으, 크흐흐, 크하하하하.”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한 사내, 고불숭은 미친 듯이 웃음을 흘렸다.

그가 바로 이 산채의 주인이자 마적단의 두령이었다.

그리고 마적들을 죽인 사람 역시 바로 그였다.

고불숭의 손에 들린 장검이 자신의 수하였던 마적들의 목숨을 앗아 간 것이다.

“흐흐…….”

웃던 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쓰러진 마적들을 돌아보았다.

살아서 도망친 자는 없었다.

술에 탄 미혼약은 충분히 효력을 발휘했고, 고불숭의 무력을 단숨에 절정의 경지까지 높여 준 기이한 힘에 대해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휘릭.

고불숭은 자신의 검을 반 바퀴 돌려 역수로 잡았다.

그리고 발 앞에 있던 시신을 향해 서슴없이 내리꽂았다.

푹.

그의 검이 쓰러진 마적의, 한때 수하였던 자의 심장을 부쉈다.

그 순간 고불숭은 기이한 희열을 느꼈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자극이었다.

“흐으.”

스륵.

고불숭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이미 죽은 마적들의 시신에 일일이 검을 박았다.

잔혹한 짓이었지만 고불숭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불빛에 번들거리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뱀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푹.

마지막 마적까지 처리한 고불숭은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중앙에서 타오르던 커다란 모닥불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후우욱.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이곳에서 모래바람 정도야 흔한 것이었지만 이것은 달랐다.

사방에 밝혔던 횃불까지 순식간에 희미해지며 고불숭 앞에 새카만 연기 같은 것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고불숭은 눈을 빛냈다.

자신에게 이 모든 일을 사주한 괴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저벅.

연기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새카만 옷을 입은 강렬한 눈빛을 지닌 중년 사내였다.

중년 사내는 오만한 표정으로 고불숭을 내려다보았다.

“네 욕망은 증명되었다.”

그 목소리는 거칠고 탁했다.

“약속한 대로 네게 본교의 힘을 허락하지.”

고불숭의 눈빛이 희열로 들끓었다.

슥.

중년 사내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고불숭은 잠시 주저했으나 곧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얼굴과 달리 앙상하고 메마른 손이 고불숭의 머리에 얹혔다.

움찔.

고불숭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곧 기이한 힘이 그의 머리를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후우욱.

“흐으으, 으으으.”

고불숭은 웃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그의 눈이 점차 허옇게 뒤집히더니 결국에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끄으, 으아아, 끄아아아아악!”

고불숭은 미친 듯이 중년 사내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마치 달라붙은 듯 중년 사내의 앙상한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고불숭의 발작이 멈췄다.

중년 사내는 손을 거뒀다.

털썩.

고불숭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쯧.”

그 모습을 보며 중년 사내는 혀를 찼다.

강렬한 그의 눈빛에는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에도 아니군.’

고불숭은 인근 마적들 사이에서 일대 호걸로 칭송받고 있었다.

야망도 커서 결코 마적 따위에 머무를 생각도 없었고, 자신을 따르던 수족 같은 수하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는 잔혹함과 결단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 정도면 그나마 관심을 가질 만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마군(魔君)은 고불숭 정도의 욕망에 만족하지 않았다.

제물 역시 숫자만 많았을 뿐, 고불숭에게 백여 명의 수하들은 애초부터 별다른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깨어나라.”

중년 사내가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고불숭이 번득 눈을 떴다.

언제 발작했냐는 듯 일어선 고불숭은 즉시 중년 사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동자는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존귀한 분을 뵙습니다.”

고불숭의 예는 아까와 달리 지극히 공손했다.

그러나 그 예를 받는 중년 사내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마기로 인해 최대로 증폭되었음에도 그의 잠재력은 상급 마병에 불과했던 것이다.

상급 마병은 그 능력이 다른 마병보다 뛰어나고 수천의 하급 마병을 지휘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중년 사내의 눈에는 부족할 뿐이었다.

중년 사내는 고불숭이었던 상급 마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환마(幻魔)다. 천마신교의 호법이자 천마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이니, 이제부터 너는 내게 복종하라.”

“존명.”

상급 마병은 지체 없이 답했다.

환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슥.

상급 마병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입니다.”

“아니다.”

환마가 말했다.

그는 눈을 들고 조용히 말했다.

“나오너라. 이 정도면 충분히 보았을 터이니.”

사락.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하고 노출이 심한 옷에 매혹적인 미모를 지닌 그녀는 바로 독요였다.

그러나 색정적인 외모와 달리 그녀의 얼굴엔 한 줌의 표정도 없었다.

슥.

독요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독요가 마교의 호법이신 환마님을 뵈어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였지만 환마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녀의 예가 결코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상인이 보냈나?”

“그럴 리가요.”

담담한 목소리로 독요는 말했다.

“상인께서는 당신에게 관심조차 없으세요. 이곳에 온 것은 그저 제 변덕이랍니다.”

“변덕이라.”

환마는 피식 웃었다.

“그저 변덕으로 본교의 중대한 행사를 방해했단 말이냐?”

“중대한 행사요?”

독요는 조소를 머금었다.

“고작 마병 따위가 말인가요?”

환마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독요는 무릎 꿇고 있는 상급 마병을 내려다보았다.

상급 마병의 새카만 눈동자가 살기로 번득이고 있었지만 독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차라리 눈을 파내시지 그래요? 그러면 더 위협적으로 보일 텐데.”

으득.

그 명백한 조롱에 상급 마병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독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강북이나 강남으로 가시지 않는 건가요?”

환마를 지그시 바라보며 독요가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가히 요사스러울 정도였다.

“가진 자의 탐욕은 없는 자의 욕구보다 더욱 크고 강렬하지요. 채워지지 않은 탐욕과 이룰 수 없는 욕망에 휩싸인 그들이라면.”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독요가 말했다.

“비록 자신의 혈족이라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할 텐데 말예요.”

“너는 어떠냐?”

문득 환마가 물었다.

“너는 네 욕망을 위해 무엇을 바칠 수 있지?”

그 눈빛과 목소리는 독요의 마음을 뒤흔들 듯했다.

독요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글쎄요? 아쉽게도 저는 가족도, 혈족도, 아무것도 없어서요. 하지만 그분을 위해서라면…….”

화륵.

순간 독요의 눈동자가 완연한 욕망으로 불붙었다.

녹아내릴 듯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의 새빨간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이 세상 전부라도 기꺼이 바치겠어요.”

앞에 선 환마도, 상급 마병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일대상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독요는 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후후후.”

환마가 웃음을 흘렸다.

그와 함께 독요의 눈빛도 본래대로 돌아왔다.

슥.

독요는 환마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강북과 강남으로 가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이미 움직이는 중이다.”

환마는 대답했다.

그의 태도는 이전과 달리 확연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허나 곤란을 겪고 있지.”

마교는 이제 막 힘을 회복했다.

염원하는 마신은커녕 마군이 될 만한 자도 찾기 힘든 데다 천하의 사정에도 밝지 못했다.

관의 통제가 살아 있는 강북과 강남에 마교가 진출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음성적이든, 공개적으로든 말이다.

“그 말씀을 들으니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사락.

독요는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이 책은 문왕이 남긴 것이에요.”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책을 어루만지며 독요는 말했다.

“조정 대신들은 물론이고 거대 문파와 세가, 주요 상단 들에 대한 것까지 강북과 강남의 온갖 정황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요. 특히 어떤 자들이 탐욕스럽고 불만에 가득 차 있는지에 대해서도요.”

환마의 눈동자가 빛났다.

독요의 말대로라면 저 책은 마교의 강호 공략을 크게 진전시켜 줄 것이 틀림없었다.

“이걸 넘겨 드리겠어요. 하지만 아무 대가 없이 그리할 수는 없지요.”

“무엇을 원하느냐?”

환마는 지체 없이 물었다.

그것은 그저 책을 원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슥.

독요는 상급 마병을 내려다보았다.

“이자를 죽여요.”

환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독요의 요구는 갑작스러운 데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상급 마병은 흔치 않은 존재다. 네게 득이 될 것도 없고. 게다가……”

슥.

환마의 메마른 손이 상급 마병의 머리에 얹혔다.

“컥!”

순간 마병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엄청난 고통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마병은 변변한 저항 한 번 하지 못했다.

“끄으으으.”

무력한 짐승처럼 침을 흘리며 마병은 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그러나 환마는 마병에겐 시선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힘을 회수하는 것이 얼마나 손해인지 아는가?”

독요를 바라보며 환마가 말했다.

그러나 말과 달리 그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털썩.

마병은 비명도 흘리지 못하고 땅에 쓰러졌다.

한때 고불숭이었던 마병은 이미 죽어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메말라 있었다.

“대가는 분명히 받았어요. 그러니 이것은 공정한 거래네요.”

사락.

독요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두 손으로 책을 내밀었다.

환마는 그 책을 받아 품 안에 갈무리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히.

“그럼 소녀는 이만 가 보겠어요.”

“언젠가.”

문득 환마가 말했다.

“힘이 필요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나를 찾아라.”

그건 의외의 말이었다.

독요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저는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거든요.”

사락.

독요는 지체하지 않았다.

그녀가 발을 구르는가 싶더니 즉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파라락.

독요의 모습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환마는 조소를 머금었다.

“과연 그럴까?”

어둠 속을 바라보며 환마는 말을 이었다.

“가진 자의 탐욕은 없는 자의 욕구보다 더 강렬하다고,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독요는 이미 보이지 않았지만 환마의 입가엔 비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파삭.

문득 환마의 발밑에서 무언가가 부서졌다.

죽은 고불숭의 시신이 결국 부서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환마는 신경 쓰지 않았다.

후우우웅.

스산한 바람이 불며 검은 어둠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이 사라졌을 때 환마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타닥, 타닥.

모닥불이 다시 환하게 피어오르며 산채를 밝혔다.

하지만 남은 것은 오직 죽은 시신들과 부서져 흩어지는 잔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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