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화. 남경에서 기다린 사람
감숙을 떠난 운현 일행은 서안에 도착했다.
일행은 서안에서 이틀간 머물기로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할 필요도 있었지만 운현도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틀째 아침, 감찰어사 조관은 운현 앞에 놓인 여러 통의 서찰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서찰들은 무엇입니까?”
“박 공공께 보낼 서찰입니다.”
바스락.
서찰 두 통을 조관 앞으로 살짝 밀며 운현이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항주에 있는 영호준 총군사께 보낼 것입니다. 영호준 총군사라면 가장 효율적인 대책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요. 가능한 자세히 적으려다 보니 이렇게 되었군요.”
총군사 영호준에게 갈 서찰은 유난히 두툼했다.
정확한 상황을 알려야 총군사 영호준도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각 가문의 가주와 문파의 장문인 들께 보내는 서신입니다.”
여러 통의 얄팍한 서찰을 건네며 운현이 말을 이었다.
“공식적인 서한은 총군사와 상의한 후에 보낼 것이지만 적어도 가주와 장문인 들은 현재의 위급 상황을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개인적인 서신이라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그렇군요. 옳은 말씀입니다.”
“아, 그리고 이건 호남성의 금가장으로 보낼 서찰입니다.”
바스락.
그 서찰에 쓰인 서체는 운현의 것과 달랐다.
조관이 의아하게 쳐다보는데 운현이 웃으며 말했다.
“금 여협께서 금가장에도 소식을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금 소저가 계속 기다릴 것이라면서요.”
그제야 조관은 그 서체가 금화영의 것이라는 걸 알았다.
성격인지 혹은 무림인이라 그런지 글자도 크고 필체도 아주 활달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운 대인. 아, 그리고…….”
감찰어사 조관은 품속에서 얄팍한 서찰 한 통을 꺼냈다.
서찰 겉면에 쓰인 필체를 운현은 금방 알아보았다.
“아침에 대인께 도착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서찰을 받았다.
감찰어사 조관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운현이 부탁한 서찰을 들고 방을 나갔다.
달칵.
운현은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차를 음미하며 운현은 앞에 놓인 서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냐?”
옆에 있던 객옹이 물었다.
“북해일문주의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보낸 요청에 대한 답이겠지요.”
“요청?”
“설영대를 움직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능 여협과 금 여협이 가세했다지만 공동파만으로는 감숙의 상황을 전부 파악하기 힘들 테니까요.”
은밀한 행동에 능한 설영대라면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객옹이 물었다.
“그래서 답은?”
“글쎄요?”
아직 열어 보질 않았으니 알 수가 없다.
“아마 승낙이거나 거부겠지요.”
그건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운현은 찻잔을 내려놓고 서찰을 열었다.
바스락.
서찰을 읽던 운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운현은 묵묵히 서찰을 내려놓았다.
“왜?”
“……둘 다 아니었습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전혀 불쾌한 빛이 없었다.
“이렇게 적혀 있군요. 당신은…….”
―당신은 요청하지 않아도 좋아요. 내게 고개를 숙일 필요도, 부탁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어요. 당신은…….
“……푸른 늑대니까요.”
문구를 읽은 운현은 조용히 서찰을 바라보았다.
바스락.
날카로운 느낌마저 들 정도로 명확하게 쓰인 글자들이 서찰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만.”
찻잔을 든 객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에는 동의한다. 네가 이미 뜻을 정했다면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다. 너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말이다.”
객옹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뭉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한참 만에야 운현이 말했다.
후륵.
운현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객옹은 차를 마셨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바스락.
운현이 서찰을 정리하며 말했다.
“당분간 일대상인은 직접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슥.
객옹이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필경 그도 저처럼 생각하고 있겠지요. 결국 모든 일은 저와 일대상인 자신의 대결로 결판이 날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지난번처럼 그가 널 찾아올 가능성도 있지 않겠느냐?”
일대상인은 운현과 대결하는 것을 대단히 기대하고 있었다.
운현이 준비가 되었다면 그는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닙니다.”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운현이 말했다.
“혈교와 마교가 다시 힘을 얻었으니까요.”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운현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는 운현이 하려는 말을 알아차렸다.
“혈교와 마교에 힘을 더하느라 정작 일대상인 자신이 힘을 소진했다는 것이냐?”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와 마교에 힘을 주는 것은 일대상인 외에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영약이나 비급 같은 것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요. 혈교와 마교가 과거에 비해 대단히 강한 힘을 얻었다면, 일대상인은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흠.”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대상인 같은 강력한 적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대단한 이점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천태상이라 하던 그 도인이 가만히 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만…….”
“암천무제라 하던 아이는 괜찮고?”
대답 대신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 모습에 객옹이 헛웃음을 흘렸다.
운현의 웃음이 가진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일검의 말처럼 일대상인의 허점을 찌를 수 있었다면 좋았겠군.”
그가 말하는 천일검은 능세영이었다.
객옹은 운현을 보며 말했다.
“안 되는 일이냐?”
“네.”
운현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저는 그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일대상인도 제 변화를 막연히 느낄 뿐, 제가 어디 있는지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상관없습니다.”
달칵.
찻잔을 들며 운현이 말했다.
“저와 그는 어떻게든 부딪히게 될 테니까요.”
‘운명’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예전에 일은이 말한 것처럼 일대상인은 운현 자신의 운명이 아니다.
이제는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일은이 말했던 ‘자네의 운명은 그보다 더 먼 곳에 있네.’라는 말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후룩.
차를 마시던 운현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새 차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운현은 한숨을 쉬며 따뜻한 찻주전자로 손을 옮겼다.
부드러운 차향이 방에 가득 피어오르고, 운현과 객옹은 기나긴 여정을 앞둔 소중한 휴식을 음미했다.
***
항주로 돌아가는 길은 대단히 먼 여정이었다.
마차로 관도를 달리고 관의 쾌속선으로 여러 날 동안 황하를 따라 내려간 일행은 배를 갈아타고 대운하를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감숙을 떠난 지 많은 날이 지난 후, 일행은 드디어 남경에 도착했다.
사실 항주와 남경도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제껏 온 여정을 생각하면 바로 앞이나 마찬가지였다.
새삼 감숙이 멀고 외진 지역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벅.
일행이 배를 내리는데 문득 부두에 반가운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훤칠하고 잘생긴 그 사람은 바로 창룡맹의 총군사 영호준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에 참으로 수고하셨습니다.”
영호준은 운현과 객옹에게 정중히 예를 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잘생긴 그가 미소를 지으니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헌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운현이 그렇게 물어볼 만도 했다.
늘 피곤에 시달리던 영호준의 얼굴에 윤기마저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있었습니다. 아, 감숙의 일에 대해 말하는 건 아닙니다만…….”
빙긋 웃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드디어 총단 건축이 끝났거든요. 몇몇 부속 건물들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만 큰일은 다 끝났습니다.”
영호준은 사뭇 속 시원한 표정이었다.
“그렇군요.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운현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총단을 짓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일까?
게다가 영호준은 작은 것 하나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람은 가도 건축물은 오래 남는다.’는 것이 영호준의 지론이었던 탓이다.
예전 무림맹과 영웅맹의 총단이 불에 탄 것을 생각하면 별로 설득력은 없었지만 말이다.
운현의 감사에 영호준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다시는 건축은 안 하겠습니다. 몇 년은 늙어 버린 것 같거든요. 하하하.”
영호준은 호탕하게 웃었다.
운현도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보낸 서찰은 받으셨지요?”
“네. 받았습니다.”
영호준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혈교와 마교라니, 이건 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군요. 어쨌든 알려 주신 상황을 토대로 몇 가지 대책을 세워 보았습니다. 자세히 적어 주신 덕에 상당히 구체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지요.”
그 말에 운현의 눈이 빛났다.
“다행입니다. 역시 총군사시군요. 그럼 어디 가서 상세한 이야기를…….”
“자리는 이미 준비해 놓았습니다.”
영호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유명한 ‘천하제일루’에 말입니다.”
“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모르십니까? ‘천하에서 제일이 아니면 바로 현판을 내리겠다’고 공언한 남경 최고의, 아니 천하제일의 기루 아닙니까?”
영호준의 말에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천하제일의 기루라 해도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다루가……. 아! 혹시?”
말하던 운현은 문득 깨달았다.
영호준은 싱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천하제일루는 바로 월향이 세운 기루입니다. 그리고 맹주님의 기루지요.”
예기 월향은 일은을 찾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예인을 돕고자 하는 그녀를 운현은 후원하기로 했고, 객옹은 월향에게 한 가지 일을 맡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천하에서 첫손에 꼽히는 기루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크고 화려한 곳을 말이다.
월향은 기꺼이 그 일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가 지금 영호준이 말하는 ‘천하제일루’인 것이다.
“그렇군요.”
운현은 감탄하며 말했다.
단호한 표정을 짓던 월향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객옹도 흥미를 보였다.
자신이 직접 명한 일이니 관심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가 보자.”
객옹의 말은 결정적이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천하제일루로 가지요.”
“네. 그렇지 않아도 천하제일루에서 마차를 보냈습니다. 귀빈들을 위한 배려지요.”
영호준의 시선을 따라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보통 마차의 서너 배는 될 만한 검은 마차가 부두에 서 있었다.
요란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윤기가 흐르는 겉모습만으로도 사뭇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천하제일루에는 저런 마차가 열 대도 넘게 있습니다. 남경 시내를 달릴 때면 모두가 선망의 시선을 보낸답니다. 하하하.”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영호준은 뿌듯해 했다.
그제야 운현은 깨달을 수 있었다.
총단 건축 탓에 몇 년은 늙은 것 같다던 영호준의 얼굴에 어째서 윤기가 도는지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다분히 천하제일루의 덕일 터였다.
“놀라실 겁니다. 저조차 별천지라는게 이런 곳이구나 싶었거든요.”
영호준은 연신 천하제일루에 대한 칭찬을 이어 갔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그렇군요.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월향이 천하제일루를 세워 인정을 받고 있다는 점도 반가웠다.
그러나 더 기쁜 것은 활짝 웃는 영호준의 모습이었다.
“여러분도 같이 가시지요.”
운현은 감찰어사 조관과 항장익에게 말했다.
그들도 얼굴 가득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즉시 운현의 뒤를 따랐다.
성큼성큼 앞서가는 영호준을 따라, 일행은 천하제일루가 보냈다는 커다란 마차로 걸어갔다.
마차 외부의 검은 장식이 자랑스레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