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화. 감숙에 깔리는 암운
혼원 진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최악의 경우 혈마인이 넷까지 늘어날 수도 있는 데다, 감숙의 관부도 믿을 수 없다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지적은 옳았다.
노부인 능세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 혈마인이 단 하나라는 법이 없으니 혈교는 당연히 또 다른 혈마인을 깨우고자 하겠지.”
혈교는 이미 과거 천일검 능세영에게 지옥혈룡을 잃은 적이 있다.
그때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또 다른 혈마인을 깨우려 할 것이 분명했다.
능세영은 부서지는 시신들을 보며 불호를 외웠다.
그리고 혼원 진인에게 물었다.
“헌데 관부를 믿을 수 없다는 건 어째서인가? 물론 관이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음은 이미 알고 있으나…….”
쓴웃음을 지으며 능세영은 말을 이었다.
“전염병 탓이라 여기거나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일이라 여겨 그런 것 아니겠나? 이대로라면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을 테니 말일세.”
“능 여협의 말씀이 옳소.”
혼원 진인은 말을 이었다.
“허나 문제는 아직도 관부에서 이 마을에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는 점이오. 이미 며칠 전에 이 마을의 변고를 알렸음에도 말이오. 아무리 이곳 감숙이 변방이며 관인들의 기강이 느슨하다 해도 이것이 어찌 자연스러운 일이겠소?”
감숙은 북방 경계와 달리 관부와 군부의 기강이 해이해지기 쉬웠다.
북방 경계 너머에는 강력한 이민족들이 있지만 이곳의 관문 너머에는 오직 끝없는 사막과 황야, 그리고 거대한 산맥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운현이 가진 특별 감찰어사의 권한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혈교나 마교와 결탁한 자를 찾고자 해도 광범위한 부패와 기강 해이, 그리고 기존의 불법 행위들과 뒤섞여 구분조차 힘들 테니까.
“허나 우리 공동이 힘을 되찾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소.”
혼원 진인이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듭 감사드리오, 맹주.”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허면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이 마을의 참극은 시작일 뿐이다.
혼원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좋지 않으나 공동이 힘을 되찾았고 복마령을 발동했으니 조만간 이들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오.”
단호한 눈빛으로 혼원 진인은 말했다.
“우선은 혈교가 또 다른 마을을 습격하려 할 때를 노려 역습을 가할 작정이오. 그러면 혈교 역시 몸을 사릴 수밖에 없을 것이오. 허나 혈마인들을 처치하지 않으면 이런 일을 근절할 수는 없소.”
혈교가 몸을 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국은 혈마인들을 처치해야 했다.
“마교는 어떠합니까? 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맹주의 말씀이 옳소.”
혼원 진인은 생각에 잠기며 말을 이었다.
“본래 혈교와 마교는 함께하지 않소. 허나 그들의 배후에 일대상인이라는 자가 있다면 마교 역시 이곳 감숙에서 무언가 흉계를 꾸밀 것이오. 그들은 이곳이 이미 무인지경이 되었다 여길 테니까.”
‘무인지경(無人之境)’이라는 표현은 정확했다.
공동파가 무력화되고 관부도 믿을 수 없다면 말이다.
혼원 진인은 문득 주위를 돌아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우선 이곳을 떠납시다. 이 마을에서 더 이상 알아낼 것은 없을 테니 말이오.”
그의 말대로였다.
잔해를 살피던 객옹 역시 일찌감치 일어서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운현과 객옹, 능세영, 혼원 진인은 몸을 돌렸다.
마을 밖에서 도사들은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도호를 외웠다.
희생자들을 진혼하기 위함이었다.
노부인 능세영도 불호를 외웠다.
이제는 정적만이 내려앉은 마을을 뒤로하고 일행은 그곳을 떠났다.
일행은 관도를 달려 감숙의 성도, 난주로 돌아왔다.
감찰어사 조관과 항장익은 감숙의 관부와 군(軍)의 상황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안찰사사로 향했고, 혼원 진인은 자세한 정황을 적은 서찰을 공동파로 보냈다.
제자들 역시 공동파로 돌아가 장문인 대행의 명을 받도록 했다.
혼원 진인이 남은 것은 운현과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운현과 객옹, 능세영, 금화영은 난주의 한 다루에서 혼원 진인과 마주 앉았다.
“사실 혈교와 마교의 목적은 상당 부분 겹치는 바가 있소. 세상의 혼란을 바란다는 점도, 보다 많은 피를 흘리려 한다는 점도 말이오.”
혼원 진인은 찻잔을 쥔 채 말을 이었다.
“허나 그들은 결코 협력하지 않소. 오히려 그들의 방법은 상당히 다르오. 혈교가 무차별적인 살상을 목적으로 한다면, 마교는 마교의 세상을 이루려 하지.”
그건 운현도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민란 말입니까?”
“그렇소.”
혼원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라면 감숙은 그들의 앞마당처럼 되었을 것이오. 혈교는 마을을 습격하고 마교는 세력을 확장하며 민란을 주동했겠지. 허나 공동파가 건재함을 알게 되면 그들도 달리 움직일 것이오.”
슥.
혼원 진인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도 맹주를 노리게 될 가능성이 크오.”
“운 공자를?”
금화영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그놈들이 운 공자를 왜…….”
“그렇군.”
노부인 능세영이 탄식을 흘렸다.
“간교한 지옥혈룡이라면 조만간 운 공자의 존재를 알아내겠지. 공동이 힘을 회복한 이유도 운 공자 덕분임을 알아챌 테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운현을 바라보며 능세영은 말했다.
“현재 혈교와 마교에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는 창룡맹의 맹주이자 조정의 특별 감찰어사인 자네일 테니까.”
마교와 혈교가 운현을 노린다는 건 섬뜩한 말이었다.
그러나 운현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건 이미 각오한 일입니다.”
운현은 혼원 진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인께서는 이곳 감숙에서 혈교와 마교의 발흥을 최대한 막아 주십시오. 저는 항주로 돌아가 이 일에 대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도록 하지요.”
“고맙소. 맹주의 말씀이 참으로 큰 힘이 되오.”
혼원 진인은 감격한 표정이었다.
창룡맹의 맹주가 직접 나서겠다니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간 혈교와 마교가 잠잠했었다고는 하지만 이제껏 그 누구도 공동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 그리고 일전에 말씀하셨던 ‘공동이 쌓아 온 경험’에 대한 것 말입니다만.”
그 말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혼원 진인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일전에 자신이 운현에게 ‘창룡맹의 힘과 공동이 쌓아 온 경험이 함께한다면 능히 복마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한 이야기였다.
부드럽게 웃으며 운현은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따가닥, 따가닥.
운현 일행이 탄 마차가 관도를 질주했다.
감숙의 성도 난주를 떠난 운현 일행은 곧장 항주로 향했다.
하지만 마차에 탄 일행은 객옹과 감찰어사 조관, 그리고 항장익뿐이었다.
노부인 능세영과 금화영은 당분간 공동파를 돕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두 사람이 가세한다면 공동파는 감숙에서 준동하는 혈교와 능히 맞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매한 마을 사람들의 피해까지 막을 수는 없으리라.
마차 밖을 바라보는 운현의 표정은 사뭇 굳어 있었다.
“네 책임이 아니다.”
문득 객옹의 목소리가 들렸다.
객옹이 무덤덤한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무엇이 말씀입니까?”
“뭐든.”
객옹은 툭 던지듯 말했다.
“네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건 네 책임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도 네게 잘못을 물을 수 없다.”
허연 눈썹을 찌푸리며 객옹은 말을 이었다.
“만일 누구든 네게 따지려는 자가 있다면, 나와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운현은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흠.”
객옹은 별 대꾸도 없었다.
그는 눈을 들어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따각, 따각.
마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운 대인.”
감찰어사 조관이 물었다.
“감숙의 상황에 대해 따로 장계를 올리시겠습니까?”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지금은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선은 간단한 상황을 박 공공께 알리려 합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조관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혈교나 마교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허무맹랑하다 하여 배척당하거나,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킨다며 오히려 징계를 받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문사이자 관인이었으니 조정의 성향을 모를 수가 없었다.
“조정의 혼란은 혈교와 마교의 원하는 바이기도 하니 극히 조심해야겠지요. 박 공공께 알려 최대한 조용히 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운현의 말에 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 공공이라면 운현에 대한 신임이 남다르니 제대로 준비를 할 것이다.
“일대상인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겠느냐?”
문득 객옹이 물었다.
“내가 본 그는 패도적이긴 해도 사악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혈교와 마교의 손을 잡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눈살을 찌푸리며 객옹은 말했다.
“게다가 어떻게 혈교나 마교에 갑자기 힘을 줄 수 있는지도 말이다.”
혈교나 마교는 무공 비급도, 영약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의 힘은 피라든가 마기 같은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기반한다.
그러니 객옹의 의문은 당연했다.
아무리 상대가 일대상인이라 해도 말이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본 것이 그가 다다른 경지라면요.”
객옹의 표정이 굳었다.
운현의 말대로라면 일대상인은 더 이상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너는?”
객옹이 물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닙니다. 혈교와 마교에 힘을 주는 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듣고 있던 조관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일대상인이 설마 신선의 경지에라도 이르렀다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그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였다.
봉래산에 산다는 신선들은 온갖 신수와 마물 들까지 다스린다고 하니 말이다.
운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다면 어찌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신선은 속세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가끔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신선을 내세워 자신을 정당화한다 해도 말이다.
“일은에게는 알릴 것이냐?”
객옹이 다시 물었다.
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알리기는 하겠으나 딱히 반응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분이 나설 것이었다면 지난번에 이야기를 하셨겠지요.”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해도 일은이 나설 것 같지는 않았다.
“대체 일은은 누구냐?”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던 혈교와 마교의 준동을 천일검 능세영과 함께 막았다.
화산지약을 통해 신승이 정사대전을 끝내는 것에도 크게 관여했을 뿐더러 운현은 물론 일대상인에 대해서도 분명히 무언가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일은은 황궁에 숨어 지내며 알 듯 모를 듯 한 말만 할 뿐이다.
그가 운현에게 보여 준 호의가 아니었다면 사실 일은이야말로 진정한 흑막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분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헛웃음을 흘리며 운현은 말했다.
“곧 알게 될 것도 같습니다.”
객옹의 눈이 빛났다.
“무언가 짐작 가는 바라도 있느냐?”
“아닙니다. 그저, 알아야 할 것이라면 언제고 알게 될 것이다 싶어서요.”
그 말에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운현마저 일은처럼 막연하고 모호하게 말하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조 대인.”
운현은 고개를 돌려 조관에게 물었다.
“제 서찰은 북해일문에 전하셨습니까?”
조관이 즉시 답했다.
“네. 관의 연락망을 통했으니 곧 답이 올 것입니다.”
“수고하셨군요. 감사합니다.”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조관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따각, 따각.
운현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숙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바깥은 푸르름이 확연했다.
마치 딴 세상 같을 정도였다.
그러나 혈교와 마교의 위협은 결코 다른 세상의 일이 아니다.
굳은 표정의 운현을 태운 채, 마차는 서안으로 향하는 관도를 내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