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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62화 (462/530)

462화. 복마령패

복마행 중인 제자들이 전한 소식은 공동파 장로들을 단숨에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혈교가 마을을 습격한 것은, 이제껏 은밀히 움직이던 그들의 행태와 확연히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디냐? 제자들은 무사한가?”

“혈교의 규모는? 혈인이나 혈마인이 있었다더냐?”

장로들이 즉시 질문을 쏟아 냈다.

그러나 소식을 들고 온 도사는 고개를 저었다.

“위치는 적혀 있으나 다른 것들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긴급한 상황에서 다급히 보낸 듯합니다.”

“알았다.”

장문인 대행 천운자가 말했다.

도사는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탁.

문이 닫히고 천운자는 장로들에게 말했다.

“급히 제자들을 보내야겠소. 소식을 전한 제자들의 안전을 확인하고 상황을 보다 소상히 파악해야 하니 말이오.”

이의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천운자는 혼원 진인을 바라보았다.

“이 일은 혼원 진인께서 맡아 주시게.”

“알겠네.”

혼원 진인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장문인 대행의 뜻을 받아들였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후기칠성을 동행토록 하게. 어쩌면 혈교와 부딪힐 수도 있으니.”

그건 만의 하나를 대비한 말이었다.

아무리 긴급히 전했다 해도 이미 며칠이나 지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희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건 운현의 목소리였다.

천운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맹주께서 말이오?”

“네.”

생각은 길지 않았다.

“알겠소. 원하신다면 그리하시오.”

그렇게 말한 천운자는 혼원 진인을 돌아보았다.

“맹주께서 함께하신다면 후기칠성까지 동행할 필요는 없을 것이네. 다른 제자들을 동행토록 하게.”

혼원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운자는 눈을 들어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혈교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소. 능 여협이 혈마인의 습격을 받았고 무고한 마을에까지 그들의 손이 뻗쳤소. 마교 또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은 명백한 터.”

단호한 목소리로 천운자가 말했다.

“나는 장문인 대행으로서 복마령을 발동하겠소.”

장로들의 표정이 일시에 굳었다.

장문인 고유의 권한인 복마령은 공동파의 총동원령인 동시에 전시체제의 선언이다.

혈교의 준동이 명확해진 이때 복마령을 발동하지 않으면 언제 한단 말인가?

장로들은 천운자의 선언을 당연히 여겼다.

사대장로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미 천운자와 교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운자는 옆에 놓여 있던 작은 목함을 열었다.

달칵.

목함 안에는 고색창연한 옥패가 놓여 있었다.

비록 정교한 문양 같은 건 없었지만 옥패 중앙에 새겨진 날아갈 듯한 글은 분명 ‘복마(伏魔)’였다.

천운자는 그 목함을 들었다.

“이 복마령패는 공동파 최고의 권위이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의 영(令)이오.”

슥.

천운자는 운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정중하게 목함을 내밀었다.

“이것을 당분간 맹주께 맡기겠소.”

운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천운자의 말대로라면 이건 운현에게 공동파를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맹주께서는 복마의 사명을 위해 스스로 굽히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소. 게다가 복룡복마검을 깨워 자신을 증명하였으며 복마진결을 공동에 되돌리셨으니 지금 이 상황에 맹주 외에 그 누가 이 복마령패에 합당하단 말이오?”

천운자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는 나를 포함한 장로회의 전원의 뜻이니 부디 받아 주시기 바라오. 맹주.”

슥.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천운자와 장로들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저를 향한 여러분의 신의가 참으로 두터우니 감히 감당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운현은 말했다.

“부족하나 여러분의 뜻을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장로들의 표정에도 미소가 번졌다.

천운자 역시 부드러운 표정으로 운현에게 목함을 건네려 했다.

그러나 운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허나 이는 공동의 신물이라, 혹여 잃어버릴까 두려우니 이곳에 놓아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천하의 창룡검주가 어떻게 이런 중요한 신물을 잃어버린단 말인가?

하지만 이어진 운현의 말은 장로들에게서 웃음기를 사라지게 했다.

“가끔 저는 검 한 자루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요.”

그 말은 엄청난 설득력이 있었다.

지고한 검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어찌 사사로운 것에 연연하겠는가?

게다가 생각해 보면 운현은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검에 미쳤다고 불리는 그 검성 말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괴승이라 불렸던 신승의 사제이기도 하지.’

사대장로이자 경전에 밝은 옥로 진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신승이 한때 괴승이라고 불린 것은 상식을 뛰어넘는 기이한 행동들 때문이다.

예컨대 신승이 이 복마령패를 받았다면 아무 데나 던져 놨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크흠. 맹주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옥로 진인이 헛기침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다른 장로들도 일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장문인 대행인 천운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영패는 언제든 즉시 꺼내 들고 명할 수 있어야 하오. 그것이 본래의 의도이거늘…….”

그 어떤 이견도, 반대도 단번에 묵살할 수 있는 지고의 권위가 바로 복마령패다.

그런 권한을 언제든지 행사할 수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운현의 권위는 존중받게 될 것이다.

“제게 그런 권한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계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운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영패에 관한 문제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고 어서 움직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급한 상황일 수도 있으니까요.”

“허나…….”

무언가 말하려던 천운자는 멈칫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야말로 아까부터 계속 이견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알겠소. 맹주의 뜻에 따르겠소이다.”

천운자는 도호를 외우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으로 복마령패에 대한 논의는 일단락되었다.

그때 현기자가 문득 입을 열었다.

“상황이 급박하나 맹주께 이것 한 가지는 꼭 묻고 싶소.”

사대장로이자 천문에 밝은 현기자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복마검을 깨우셨소?”

장로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빛났다.

그 질문이야말로 모두가 궁금해 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던 복마검을, 비록 다시 잠들었다고는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깨운 것일까?

“저를 비웠습니다.”

운현은 순순히 답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저는 ‘공허의 주인’이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요.”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장로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자신을 비웠다’는 말을 그 누가 저렇듯 가볍게 말할 수 있을까?

수 십 년의 수련으로도 자신을 비웠다 말할 수 있는 이가 드물 텐데 말이다.

게다가 운현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현기자는 그 말 뒤에 숨은 의미를 명확히 알아차렸다.

‘그건 곧 선택이 주어졌었다는 뜻.’

운현이 원했다면 주인이 될 수도 있었다는 의미다.

현기자는 다시 물었다.

“……맹주께서 ‘공허’라 하신 것은 복마검을 이르신 것이오?”

생소한 표현이었지만 복마검을 겪었던 장로들은 그 표현이 너무나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바닥 없는 무저갱 같던 복룡복마검을 공허라 하지 않고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장로들은 운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운현은 대답대신 빙긋 웃었다.

현기자도, 다른 장로들도 운현이 더 이상 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허어.”

긴 탄식을 흘리며 현기자는 눈을 감고 도호를 외웠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현기자는 미소 짓는 운현의 주위로 은은한 빛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헉!’

현기자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잘못 봤나?’

현기자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복룡복마검이 깨어났을 때 비쳤던 상서로운 빛.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광경이 어쩌면 한순간 운현에게 겹쳐 보였던 것일까?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현기자는 멍한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의 부드러운 미소는 여전하기만 했다.

***

운현 일행은 혼원 진인, 그리고 몇 명의 도사들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산 아랫마을에 놓아두었던 마차를 타고 일행은 우선 감숙의 성도인 난주로 향했다.

어차피 가는 길목인 데다, 난주에서 기다리는 감찰어사 조관과 항장익이 합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따각, 따각.

“혈교가 왜 습격을 한 것일까요?”

마차 안에서 운현이 혼원 진인에게 물었다.

혼원 진인은 마차에 동승했지만 다른 도사들은 말을 타고 이동 중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소.”

고개를 저으며 혼원 진인이 말했다.

“혹시 혈인들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닐까 추정할 뿐이오. 어쩌면 복마행 중인 제자들을 노린 것일 수도 있고……. 그저 피해가 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오.”

“혈인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마을은 어떻게 됩니까?”

운현이 묻자 혼원 진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옥이 되네.”

혼원 진인을 대신하여 노부인 능세영이 말했다.

“혈마인은 사람을 혈인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네. 허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거나 짐승만도 못한 괴물이 되어 버리지. 그들이 떠나고 나면 마을에 남는 것은 자멸해 가는 괴물과 한때 사람이었던 것들의 잔해뿐이라네.”

‘지옥이 된다’는 능세영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그 말에 활달한 금화영마저 안색이 변했다.

따각 따각.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혈교가 본격적으로 준동한다면 그 ‘지옥’이 무수히 펼쳐질 것이다.

그 생각이 모두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만 들려오는 가운데 일행이 탄 마차는 난주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일행은 난주에서 감찰어사 조관, 항장익과 합류했다.

그사이 혼원 진인은 복마행 중인 제자들로부터 새로운 전갈을 받았다.

다행히 공동파의 제자들은 무사한 듯했다.

그리고 며칠 후, 일행은 혈교의 습격을 받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법 큰 도시가 가까이 있고 관도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이백 호 정도의 마을이었다.

이백 호라면 대략 천 명 이상의 주민이 있었다는 뜻이지만 지금 이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은 운현 일행과 공동파의 도인들 뿐이었다.

끼익.

운현이 마을 한복판에 있는 큰 집의 문을 열었다.

안쪽 마당에서 무언가가 부서졌다.

파삭.

땅에 널려 있는 그것들은 한때 사람의 형체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바스러질 정도로 메마르고 약해져 있었다.

옆에 서 있던 객옹이 다가가 그것들을 유심히 살폈다.

“이상하군.”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노부인 능세영의 것이었다.

능세영은 바스러지는 시신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혈교가 혈인을 만든 흔적이 아닌데?”

“혈교가 한 짓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운현의 물음에 능세영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네. 하지만 혈교가 혈인을 만들었다면 이렇지 않네. 혈인이 되지 못한 괴물들이 떠돌고, 녹아내린 덩어리가 질척하게 사방을 메울 뿐이지.”

운현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며칠 전만 해도 사람들이 붐비던 곳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메마른 죽음만이 감돌뿐이었다.

“그럼 이 모습은…….”

“혈옥이오.”

혼원 진인이 말했다.

저벅, 저벅.

그는 운현과 능세영에게 다가왔다.

“혈교에는 혈옥이라는 것이 있소. 사람들의 피를 끝없이 빨아들이는 사악한 물건이지. 혈마인을 깨우는데 바로 이 혈옥이 사용되오.”

바스러져 흩어지는 시신들을 바라보며 혼원 진인은 한숨을 쉬었다.

“상황을 보건대 그들이 혈옥을 사용한 것이 틀림없소. 혈옥 외에는 이런 참상을 만들 수 없을 테니까.”

능세영은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그렇다면 혈교가 지옥혈룡 외에 또 다른 혈마인을 깨우려 한단 말인가?”

혼원 진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능세영은 탄식을 흘렸다.

“허어, 혈교가 대체 어떤 힘을 얻었기에 혈마인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둘이 아닐 수도 있소.”

혼원 진인이 말했다.

“기록에 의하면 혈마인은 본래 넷이오.”

능세영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지옥혈룡을 베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그런 혈마인이 셋이나 더 있다니?

“그리고 이제는 감숙의 관부도 믿을 수 없소.”

바스라져 가는 시신들을 보며 혼원 진인은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혈교가 이토록 대담한 짓을 한다는 건, 적어도 이곳 감숙에서는 남의 눈을 신경 쓸 염려가 없어졌다는 뜻이니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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