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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60화 (460/530)

460화. 공허의 주인(主人)

우웅.

대좌 위의 거대한 복마검이 울음을 흘렸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그 검명(劍鳴)에 공동파의 장로들은 충격에 빠졌다.

‘맙소사.’

장로인 혼원 진인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저 크고 둔중한 복룡복마검이 검명이라니?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복룡복마검은 검이라기보다는 커다란 상징물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소리를 검명이라 하지 않으면 무어라 하랴?

우우웅.

복마검이 흘려 내는 검명은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이곳 복룡복마전 전체가 그 검명에 은은히 떨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불안이 혼원 진인을 침식했다.

‘설마 이러다가…….’

혼원 진인은 흠칫했다.

이 염려는 그저 기우에 불과할 것이다.

혼원 진인은 애써 도호를 외며 평정심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복마검의 검명은 이제 혼원 진인의 마음마저 뒤흔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장문인 대행 천운자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한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단순히 장로들을 넘어 공동파, 아니 천하의 안위에 천추의 한으로 남을 만한 끔찍한 무엇인가가 말이다.

으득.

천운자는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그것은 천운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여력이 남아 있던 모든 장로들은 천운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건드리면.”

후웅.

검명과 한기가 가득하던 이곳에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객옹의 손 위에서였다.

‘헉!’

천운자도, 혼원 진인도, 그리고 노부인 능세영과 금화영도 눈을 부릅떴다.

객옹의 손 위에 영롱하게 빛나는 한 마리 나비가 떠 있었던 것이다.

그 작은 나비에서 느껴지는 가공할 기세는 절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꼿꼿하게 선 객옹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죽는다고 말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운현에게 못 박혀 있었다.

그 목소리는 검명과 섞여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천운자나 혼원 진인의 충동을 억누르기엔 충분했다.

저 작은 나비가 날아오르는 것만으로도 이곳 복룡복마전은 흔적도 없이 매몰되고 말 테니까.

천운자는 자신도 모르게 도호를 외웠다.

객옹은 한 손에 영롱하게 빛나는 나비를, 그리고 다른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굳건히 서 있었다.

그가 있는 한 무언가를 시도할 여지는 없었다.

천운자도, 혼원 진인도, 그리고 다른 장로들도 무언가를 할 생각을 버렸다.

그리고 천운자는 문득 깨달았다.

살갗을 에일 듯하던 한기가 한결 나아진 것이다.

‘……이건!’

천운자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객옹의 저 나비가 결과적으로 자신들을 돕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앞에 나는 새의 날갯짓이 다른 새들을 돕듯이 말이다.

객옹의 뒷모습을 보며 천운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객옹은 요동하던 장로들의 마음을 단번에 가라앉혔다.

그가 어째서 ‘죽음과 삶의 주관자’라고 불리는지 천운자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우우우우웅.

검명은 더욱 강해지고 한기도 시시각각 그 매서움을 더해 갔다.

사락.

객옹의 손 위에 일렁이는 나비의 날개 끝이 미세하게 바스러졌다.

그러나 객옹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

빛에 휘감겼던 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찬란하던 빛은 이미 사라졌다.

그러나 운현의 눈동자는 여전히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슥.

운현은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보았다.

빛줄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운현은 알 수 있었다.

‘그건…….’

어찌 그것을 모를 수 있을까?

단 한 순간이라도 잊을 수가 있을까?

운현은 눈을 감았다.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그것은 슬픔이 아니었다.

잠시 그렇게 있던 운현은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훅.

그 순간, 운현을 향하던 무수한 ‘적의’가 일시에 사라졌다.

온 사방에 가득한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거기 있었지만, 더 이상의 적의도 섬뜩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운현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슥.

붉은 눈동자가 감기며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은 마치 짐승이 고개를 숙이고 떠나는 것 같았다.

사락, 사라락.

사방에 가득하던 눈은 봄날 햇살에 사라지는 잔설처럼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공허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한 회색의 공허.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공포스럽지도, 무의미하지도 않았다.

‘아아.’

운현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이 공허의 의미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슥.

운현은 눈을 들었다.

자신이 원한다면 이 거대한 공허는 빛의 흐름으로 가득 찰 것이다.

아니, 운현이 뜻한다면 무엇으로든 이곳을 채울 수 있다.

삼천세계의 마(魔)들로도, 혹은 하늘의 용(龍)들로도 말이다.

웅.

문득 나지막한 검명이 운현의 주의를 끌었다.

아무것도 없던 운현의 손에 한 자루 검이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운현의 의지 자체이자 오직 운현만의 검, 바로 창룡검이었다.

우웅.

창룡검의 작은 울음은 마치 투덜거리는 것 같았다.

왜 자신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운현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아득한 공허를 바라보았다.

“저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운현은 말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은 운현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웅.

창룡검이 화답하듯 울었다.

‘후후.’

운현은 조용히 웃었다.

끝없이 펼쳐진 회색의 공허 가운데, 운현의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

우우우우웅.

복마검의 검명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저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이곳 복룡복마전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르르릉.

사방이 진동하며 돌가루가 떨어지고 짐승의 울음 같은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객옹의 작은 나비는 여전히 그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 날개에서 빛의 가루들이 새어 나가고 있는 것은 모두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비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객옹의 내력이 오히려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끝이 머지않았음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천운자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결단의 때가 온 것이다.

“모두…….”

천운자가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

훅.

순간 검명이 사라졌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장로들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복마검은 이미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화아악.

복마검의 거대한 검신이 빛으로 물들었다.

“저, 저것!”

누군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당혹해하던 장로들은 눈을 들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복룡복마검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력을 앗아 가던 한기도, 마음마저 뒤흔들던 검명도 더 이상 없었다.

만마를 굴복시키고 올바름을 드러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상서로운 빛.

그 빛이 지금 복마검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후우우웅.

서광(瑞光)이 이곳 복룡복마전을 가득 채웠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장로들은 일제히 두 손을 모으고 도호를 외웠다.

지금 이 순간, 전설 속에 잠들어 있던 복룡복마검이 깨어난 것이다.

경건하게 고개 숙인 장로들은 끊임없이 도호를 외웠다.

“저걸 보게!”

노부인 능세영의 목소리에 장로들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이, 이것은…….”

천운자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복룡복마검의 거대한 검신에 글자들이 떠올라 있었다.

글자라기보다는 차라리 문양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 글을 모르는 장로는 없었다.

그 글자는 이곳 복룡복마전의 벽에 새겨진 것들과 똑같은 서체였기 때문이다.

“허어.”

천운자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혼원 진인도, 옥로 진인도, 현기자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검신에 떠오른 글은 공동파의 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복마심결’이었다.

하지만 그 심결 뒤에 누구도 모르던 구결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혼원 진인이 넋 나간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복마심결의 완전한 모습이 장로들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그 빛은 오래가지 않았다.

후욱.

“엇!”

장로들이 화들짝 놀랐다.

빛이 사라지고 복룡복마전이 어둠에 휩싸였다.

본래 이곳을 밝히던 등불은 여전했지만 갑자기 빛이 사라지자 어둡게 느껴진 것이다.

“……허어.”

누군가 나지막이 탄식했다.

그 탄식에 서린 안타까움을 모든 장로들은 절실히 공감하고 있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였다.

“괜찮냐?”

문득 객옹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로들은 눈을 들었다.

영롱하던 나비는 이미 사라졌고 객옹은 두 손으로 뒷짐을 진 채였다.

“네. 괜찮습니다.”

운현이 답했다.

그는 복마검에서 손을 거두고 돌아섰다.

슥.

아무것도 아닌 그 모습이 장로들에겐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어찌 그렇지 않을까?

전설 속에 잠들어 있던 복룡복마검을 깨운 사람이니 말이다.

“제 탓에 어르신께서 괜한 고생을 하셨군요.”

“고생한 것 없다.”

뒷짐을 진 채 객옹이 답했다.

그 목소리는 무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끝났으면 가자.”

“네.”

객옹은 서슴없이 몸을 돌렸다.

장로들은 즉시 좌우로 물러서며 객옹을 위해 길을 만들었다.

저벅, 저벅.

객옹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걸었다.

그러나 장로들은 두 손을 모으고 도호를 외우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객옹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객옹처럼 장로들을 지나치지는 못했다.

“대, 대협!”

천운자가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그, 그럼 이제 복룡복마검이 깨어난 것이오?”

순간 모든 장로들의 시선이 운현을 향했다.

간절한 희망과 기대가 담긴 눈빛이었지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일시적으로 깨어났던 것뿐입니다. 지금은 다시 잠들었지요.”

슥.

운현은 대좌에 놓여 있는 복마검을 보았다.

여전히 크고 육중하며 둔탁해 보이는 고대의 검이었지만 운현의 눈에는 사뭇 다르게 보였다.

“애초에 저 검은.”

천운자를 돌아보며 운현이 말했다.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 말에 천운자는 잠시 당황했다.

운현의 말은 당연했다.

저런 검을 실제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지요.”

운현의 말에 천운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빙긋 웃어 보인 운현은 다시 발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슥.

거대한 복룡복마전의 천장.

도가의 진언들이 새겨지지 않은, 유일하게 텅 비어 있는 원형의 공간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후후.”

운현은 미소를 흘렸다.

가슴이 부드러운 온기로 차올랐다.

저벅.

고개를 내린 운현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객옹의 뒷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보이지도 않았다.

“가, 같이 가세!”

금화영이 얼른 뒤따르고 노부인 능세영도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네 사람이 사라지자 공동파의 장로들만이 남았다.

“허어.”

천운자는 긴 탄식을 흘렸다.

대좌의 복마검을 바라보았지만 서광도, 구결도 더 이상 없었다.

마치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처럼 말이다.

천운자는 다시금 도호를 되뇌었다.

다른 장로들 역시 탄식을 흘리며 도호를 읊조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먼 곳에서 일대상인이 눈을 떴다.

슥.

용좌에 앉아 있던 일대상인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드디어.”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대상인의 입가에는 스산한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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