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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59화 (459/530)

459화. 소리[聲]

운현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거대한 복마검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공동파 장로회의는 운현과 뜻을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손을 떼고 물러서도 충분했다.

공동파의 신비함에 감탄하고, 복마검을 깨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후 혈교와 마교에 대해 논의하면 되는 것이다.

전설의 검은 전설 속에 묻어 두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나 운현은 복마검에서 손을 거두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던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

“오냐.”

객옹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뒤를 부탁합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객옹은 주저하지 않았다.

“알았다.”

그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하지만 운현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락.

운현은 다시 고개를 돌려 복마검을 내려다보았다.

크고 둔중한 옛 고대의 검이 자신의 손끝 아래 조용히 누워 있었다.

은은한 온기를 희미한 숨소리처럼 피워 올리며.

“후우.”

운현은 숨을 가다듬었다.

‘이 검과 공명하기 위해서는…….’

북해의 만년빙정과 공명할 수 있었던 것은 운현 안에 낙일검의 기운이 있어서였다.

그렇다면 이 복룡복마검과 공명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도가의 경전에 대한 지식이나 도력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이제껏 공동파의 도사들이 깨우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

하늘의 도를 깨달은 도인이 남긴 검이 그런 것으로 깨어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운현이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나를 비워야 한다.’

그것이 운현이 내린 결론이었다.

슥.

운현은 눈을 감았다.

복룡복마전에 침묵이 흘렀다.

객옹도, 능세영과 금화영도, 그리고 장로들도 숨소리를 죽인 채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어느 순간 운현의 기척이 촛불 꺼지듯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이다.

‘응?’

노부인 능세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켜보던 공동파 장로들의 안색 역시 심각하게 변했다.

눈앞에서 운현의 기세가, 아니 그의 존재감 자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내력을 쏟아 내는 것도, 은밀하게 흩뿌리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물결에 휩쓸려 가듯 운현의 기세가 삽시간에 잦아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웃.”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천운자가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내력이 새어 나가고 있는 것을 느낀 것이다.

마치 스산한 겨울바람에 체온을 빼앗기듯 말이다.

“이건…….”

“물러나라.”

객옹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천운자는 즉시 다른 장로들에게 말했다.

“물러서시오. 어서!”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있던 장로들이 즉시 뒤로 물러섰다.

능세영과 금화영도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객옹 어르신은?”

금화영이 물었다.

객옹은 여전히 운현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저벅.

한 걸음, 객옹이 뒤로 물러섰다.

그것이 전부였다.

객옹은 뒷짐을 지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깊은 눈동자로 운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사이 복마검과 운현 주위로 일어나는 변화는 더욱 뚜렷해지고 있었다.

후우웅.

스산한 기운이 복마전을 뒤덮었다.

공동파 장로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윽!”

“이런!”

그들의 반응은 심상치 않았다.

노부인 능세영이 즉시 물었다.

“왜 그러는가? 이 변화는 무슨 의미지?”

천운자는 굳은 표정으로 운현과 복마검을 바라보았다.

대답은 혼원 진인이 했다.

“천운자의 경고가 기억나시오? 복마검에는 그 어떠한 내력도 소용이 없다는 말을.”

“그래서?”

능세영이 다급하게 되물었다.

“제아무리 고강한 내력을 퍼부어도 복마검은 바닥없는 무저갱처럼 한 줌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소. 그러나 사람은 아니오.”

굳은 표정으로 혼원 진인은 말을 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이도 있소. 그러나 어떤 이는 엄청난 반탄력으로 튕겨 나갔소. 벽에 부딪혀 피를 흩뿌릴 정도로 말이오. 또 어떤 이는 복마검에서 손을 뗄 수 없었소. 엄청난 흡입력으로 내공은 물론 일부 진원지기까지 잃었지.”

진원지기를 잃었다는 것은 생명력 자체를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혼원 진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마검을 쥐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오.”

‘아!’

능세영은 아까 천운자가 한 경고를 떠올렸다.

분명 천운자는 ‘내력으로 깨우려던 이들이 큰 낭패를 당했다’고 말했다.

‘극히 조심하라’고 경고도 했다.

복룡복마검을 ‘마검’에 비유하면서까지 말이다.

“그래서 복룡복마검을 깨울 때는 반드시 참관인이 함께하도록 규정되어 있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말이오.”

혼원 진인의 말에 능세영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장로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은 그저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가장 큰 이유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운현 일행의 동행을 허락한 이유도 납득할 수 있었다.

어차피 참관인도 필요하지만, 만약 객옹이 없는 사이에 운현이 무슨 해라도 입는다면 분노한 객옹이 무슨 짓을 벌일지 두려웠을 테니까.

“그러면 지금은?”

점차 강해지는 한기를 느끼며 능세영이 말했다.

높고 넓은 반구형의 복룡복마전 전체가 급속도로 기온이 낮아지고 있었다.

아니, 낮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체감상으로는 당장 서리가 맺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모르겠소.”

혼원 진인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는 운현과 복마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오.”

후우우우웅.

복룡복마전을 휩쓰는 서늘한 기운은 살을 에일 듯한 한기로 변해 가고 있었다.

시시각각 내력이 새어 나가고 있는 것이 피부를 통해 느껴질 정도였다.

“큭.”

옥로 진인이 신음을 흘렸다.

경전 연구에 평생을 매진한 그녀는 내력이 깊지 않았다.

천운자가 즉시 그녀에게 다가가 등에 손을 얹었다.

부드러운 온기가 옥로 진인을 향해 번져 갔다.

“고, 고맙네.”

옥로 진인이 말했다.

천운자는 옆에 있던 현기자에게도 손을 얹으며 다른 장로들에게 말했다.

“서로를 도우시게! 버틸 수 없을 것 같으면 즉시 이곳을 떠나고!”

장로들은 셋, 혹은 넷의 진을 이루어 약한 이들을 도왔다.

혼원 진인도 천운자에게 가세했다.

자리를 떠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은 분명했다.

“어찌해야겠나?”

능세영이 혼원 진인에게 물었다.

그나마 복마검에 대해 아는 이들은 장로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혼원 진인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천운자가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중단시키는 것이…….”

“누구든 지금 이놈을 건드리면.”

서늘한 그 목소리는 객옹의 것이었다.

슥.

객옹은 천운자와 장로들을 돌아보았다.

“내 손에 먼저 죽는다.”

순간 장로들은 물론 능세영까지 소름이 돋았다.

공동파 장로들을 향해 죽는다는 말을 서슴없이 뱉는 객옹의 눈빛은 바로 죽음의 대명사, 독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객옹은 다시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후우우우.

복룡복마전은 한기가 가득했다.

단순히 한기만이 아니었다.

이곳 전체가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듯한 섬뜩한 그 느낌에 객옹조차 탈력감을 느낄 정도였다.

밀려나듯 조금씩 물러서던 장로들도 이젠 돌벽에 등이 닿아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러나 객옹은 요동하지 않았다.

그의 깊은 눈빛은 오직 운현만을 향해 못 박혀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웅.

거대한 복마검이 나지막한 울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검명(劍鳴)이었다.

***

눈을 감은 운현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언제나처럼 수많은 빛의 흐름이 단번에 운현을 감싸 안았다.

후욱.

수없이 명멸하는 크고 작은 빛들의 흐름.

그 속에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슥.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저 높은 곳에 거대한 공허가 있었다.

운현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존재감을 도도히 드러내고 있는 그 공허는 바로 복룡복마검이었다.

후우우우.

거대한 공허 주위로 흐름이 천천히 지나갔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지만 그 공허는 세계를 삼킬 것처럼 크고 거대하며 까마득히 멀리 존재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역시.’

운현은 그 거대한 공허를 바라보았다.

흐름은 공허 속에서도 분명히 존재했다.

다만 무수한 빛과 가능성을 잃은 채 그저 지나칠 뿐이었다.

슥.

운현은 손을 들었다.

당연히 손이 닿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운현이 원한 것도 그것이 아니었다.

사사사사.

모래가 흩어지듯 손끝을 통해 운현의 내력이 흩어져 갔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흐름에 내력을 싣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쉬이이이.

운현의 손끝에서 새하얀 서리 같은 것들이 흐름에 휘말려 사라져 갔다.

빛과 어우러진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운현은 마냥 그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비워야 하는 것은 내력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락사락.

손끝을 스치는 흐름 속에 운현은 자신을 흘려보냈다.

수많은 생각과 감정 들 그리고 추억과 기억 들까지, 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기 시작했다.

두려움도, 주저함도 없었다.

그렇게 운현은 천천히 비어 가고 있었다.

사락.

운현의 손끝에서 빛무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슥.

거대한 공허가 운현을 주시했다.

***

어느 순간, 운현은 자신이 텅 빈 공간에 있음을 깨달았다.

주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물은 물론이고 빛과 어둠조차 분명하지 않아서, 오직 무채색의 회색 공간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저 공허만이 가득한 세계.

그곳에서 운현 또한 공허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기억나는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시선’이었다.

사락.

새빨간 눈 하나가 운현을 바라보았다.

피가 번지듯 허공에 떠오른 그 붉은 눈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눈은 하나가 아니었다.

차라라락.

붉은 눈동자는 순식간에 사방을 가득 채웠다.

공허를 가득 메운 무수한 눈동자가 저마다 깜빡이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여럿이자 하나였고, 하나이면서도 무수했다.

마치 운현의 존재를 부숴 버릴 듯 쏟아지는 무수한 시선들.

그 시선에 담긴 것은 바로 ‘적의’였다.

파사삭.

운현의 존재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고통도, 두려움도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 바스러지고 있었지만 운현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마치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운현은 부서져 갔다.

그때 소리가 있었다.

칭.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말소리 같았지만 어쩌면 작은 음률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소리는 운현으로 하여금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게 했다.

차랑.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작은 새의 속삭임 같은, 혹은 누군가를 깨우는 종소리 같은 그 울림이 귓가에 닿았을 때 운현은 보았다.

‘아!’

한 줄기 빛이 머리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너무나 가늘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연약한 그 빛은, 그러나 별빛처럼 영롱하게 운현을 비추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흘렀다.

가슴이 뛰고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몸 전체로 번져 갔다.

그리고 빛이 운현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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