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경책(警責)
공동파 대연무장.
공동의 모든 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현은 다섯 명의 젊은 도인들과 마주 섰다.
조금 전 노(老)삼극이 노도사들이었음을 생각하면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하지만 후기칠성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노삼극이 예외적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실제로 운현 앞에 선 이 젊고 야심 차 보이는 도사들은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이전에 보았던 후기칠성의 젊은 도인들처럼 말이다.
스릉.
“무허입니다.”
무허가 검을 빼어 들고는 말했다.
“저의 오행검진이 대협을 시험하지요.”
그 말은 아까 장문인 대행 천운자가 한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느낌은 사뭇 달랐다.
“그렇군요.”
운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든지 시작하시지요.”
무허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운현의 대답이 이상하게도 자신을 무시하는 듯 들렸기 때문이다.
무허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
“개진(開陣).”
사사삭.
무허의 말과 동시에 두 명의 도사와 두 명의 여관이 각기 방위를 점했다.
운현은 그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미명이 햇살 아래 반짝였다.
슥.
다섯 자루의 검이 운현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칼날을 번득였다.
우우웅.
그들의 검이 흘리는 기세는 조금 전 노도사들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렬하고 청명한 검명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운현의 미명은 여전히 땅을 향한 채였다.
‘훗, 역시.’
무허는 조소를 흘렸다.
이전 노삼극을 대했듯 오행검진을 상대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소위 정파의 대협다운 여유를 보이며 말이다.
“하아!”
탓.
무허는 기합을 내지르며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와 동시에 운현을 둘러싼 오행검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앙, 쿠웅.
쇳소리와 함께 묵직한 충격음이 연무장을 울렸다.
젊은 도인들의 내력은 확실히 삼극의 노도사들보다 위였다.
비록 검로와 진의 운용에 있어서는 완숙함이 부족했지만, 오행검진의 공세적인 특성과 맞물려 다섯 명의 젊은 도인들은 숨 쉴 틈 없이 강렬한 검격을 쏟아 내고 있었다.
운현의 검도 자연히 바빠졌다.
그러나 그저 그뿐이었다.
쿵. 카강.
현란하게 이어지는 운현의 검로를 바라보던 옥로 진인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멀군.”
옆에 앉은 혼원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과거 천일검의 무위에 크게 자극받아 후진 양성에 전력을 쏟았지만, 이것이 공동의 현실이겠지.”
과거 천일검 능세영이 홀로 혈인들을 죽이고 혈마인을 척살한 것은 충격이었다.
공동이 도움을 주었다고는 하나 결국 천일검 능세영 홀로 혈마인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공동의 장로들은 그때부터 후진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후기칠성 중 다섯, 오행 중 한 명이 검기를 발현하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공동파의 규모와 형편에 비하면 대단한 성과라 아니할 수 없었다.
“궁금하군. 공동의 후기칠성이 창룡검주를 상대로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말이네.”
옥로 진인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지만 혼원 진인은 그다지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다.
오행검진을 상대하는 운현의 검은 아직도 검명조차 흘리지 않고 있었으니까.
탁.
무허가 자신의 차례를 끝내고 물러섰다.
상생상극의 묘리를 따라 움직이는 오행검진은 서로를 보호하는 동시에 날카로운 공세를 이어 갔다.
하지만 젊은 무허는 만족하지 못했다.
‘역시 이 정도로는…….’
운현의 검은 여전히 허공에 빛을 뿌리며 오행검진의 공세를 받아 내고 있었다.
무허는 승부를 걸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오행검진!”
내력을 담은 무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속진(速陣)!”
후욱.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행검진의 기세가 변했다.
오행검진을 이루는 다섯 도인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진 것이다.
카가강, 캉, 쿠웅.
여섯 자루의 검이 급박하게 얽혔다.
미명에 맞서는 다섯 자루의 검들은 마치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리며 공방을 이어 갔다.
게다가 그 움직임은 더욱더 빨라지고 있었다.
운현의 눈동자가 빛났다.
“오오!”
지켜보던 장로들과 도인들도 탄성을 터트렸다.
공동의 검진이 가진 또 하나의 형태, ‘속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오직 정해진 대로 움직이고, 베고, 물러난다.
상대의 검은 물론 움직임조차 신경 쓰지 않고 말이다.
무의식중에라도 진법을 운용할 수 있는 공동의 도인들만이 가능한 형태였다.
카가강, 카강.
쉴 틈 없이 터져 나오는 쇳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장문인 대행 천운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쯧.’
속진은 분명 상대의 당황을 유도하고 허점을 찌르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이런 형태는 진의 지속성을 빠르게 소모한다.
즉, 오래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처럼 운현의 검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상대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허점을 드러낼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하지만 진을 이끄는 무허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속진을 거두기는커녕 더욱 빠르게 몰아가고 있었다.
‘……무모한 짓을.’
천운자는 탐탁잖은 표정으로 더욱 가속해 가는 무허의 오행검진을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운현보다 먼저 오행검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앗!’
오행의 한 방위를 맡고 있던 지명은 아차 싶었다.
자신의 검격이 생각보다 더 깊이 운현을 향해 나아간 것이다.
깊다고 해 봤자 두세 치에 불과했지만 그 미세한 차이는 운현에게 반격의 기회를 허용하기에 충분했다.
쉭.
운현의 검이 지명을 향해 가차 없이 쏘아져 왔다.
그러나 지명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생상극인 오행검진의 원리에 따라 다음 방위에 있는 사람이 자신과 함께 운현의 검격을 막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음 방위는 오행 중에서 가장 강한 무허였다.
탓.
지명은 검진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정해진 진법에 따라 운현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운현의 미명이 바로 앞까지 짓쳐 들었음에도 자신과 함께 운현을 막아 줄 무허의 검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지명은 ‘속진’ 중에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
시선을 들어 무허를 찾은 것이다.
슥.
무허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무허는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았다.
검기를 두른 무허의 검은 지명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운현의 뒤를 향해 짓쳐 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 순간 지명은 깨달았다.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무허가 속진을 지금껏 강행한 이유도, 그리고 ‘저자는 내가 상대한다’던 말의 의미도.
무허는 지명 자신을, 아니 오행검진의 다른 도인들 전부를 위험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오직 하나, 창룡검주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 말이다.
‘맙소사.’
속셈도 너무나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제아무리 불의의 일격이라도 창룡검주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무허의 행동으로 오행검진이 무너졌으니 창룡검주는 간단히 다섯 도인들을 제압할 수 있다.
그러나 창룡검주가 무허에게 일격을 허용한 사실만은 남는다.
무허는 처음부터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다.
‘창룡검주에게 일격을 가한 젊은 후기지수’라는 명성을 말이다.
쉬익.
그러나 지명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눈앞으로 운현의 검이 날카롭게 짓쳐 들고 있었다.
절망에 빠진 지명의 눈동자에는 득의한 무허의 일그러진 미소가 또렷이 새겨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락.
문득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명의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이 멈춰 섰다.
아니, 모든 것은 아니었다.
운현의 검만은 여전히 허공을 가르며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아아!’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지명은 믿을 수가 없었다.
미명의 칼날이 무허의 검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것만이 아니었다.
스륵.
검기가 일렁이는 무허의 검을 운현의 미명이 가르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을 자르듯 너무나 간단히.
그리고 다음 순간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훅, 콰아아앙.
“큭!”
지명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오행검진이 멈췄지만 상관없었다.
무허가 제멋대로 튀어나온 그때, 오행검진은 이미 무너지고 말았으니까.
후우욱.
난폭한 기세가 대연무장을 휩쓸었다.
지명은 검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짓입니까?”
딱딱하게 굳은 그 목소리는 운현의 것이었다.
무허는 검을 늘어뜨린 채 운현을 노려보았다.
부러진 검과 입가에 흐르는 한 줄기 피는 무허가 내상을 입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무슨 짓이냐고 물었습니다.”
“……무, 무엇이 말이오?”
무허가 뒤로 주춤 물러나며 말했다.
낭패한 모습이 분명했으나 이를 악문 무허의 눈빛은 살기마저 번뜩였다.
후우우우웅.
미명이 울음을 흘렸다.
“당신은 조금 전 사형제의 위험을 방관했습니다. 아니 사실상 내 검 앞에 밀어 넣었지요.”
츠즈즈즈.
운현의 발밑으로 서리가 번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현의 검 미명에 새파란 검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놀라는 공동파 도인들의 귓가에 운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의 그 유치한 일격을 위해서 말입니다.”
후우우웅.
미명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검신에 일렁이던 새파란 검기는 이미 검 끝을 넘어 그 섬뜩한 기운을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지켜보던 도인들은 물론이고 무허의 안색도 파랗게 질렸다.
“그것이 그리도 중요했습니까?”
무허를 내려다보는 운현의 시선은 더없이 차가웠다.
지켜보던 지명은 입술을 깨물었다.
운현의 말이야말로 지명이 묻고 싶던 것이었다.
“그, 그런 게 아니오!”
무허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운현이 아니라 대연무장의 다른 도인들을 향해서.
“나는 견제를 하려고 한 것이오! 결코 지명을 버린 것이……!”
“자존심이 강한 것은 상관없습니다.”
우우우우웅.
귀를 찢는 듯 한 검명 사이로 운현이 말했다.
“때로는 명성을 좇는 것도 괜찮지요. 누구나 그런 어리석은 때가 있으니까.”
무허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운현이 물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사형제보다 더 중요하다면.”
후우우웅.
한기가 사방에 휘몰아쳤다.
“당신은 여기 서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대연무장을 메운 도인들도, 장로들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조금 전 무허가 한 짓은 그들 모두가 똑똑히 보았다.
그러니 무슨 염치로 입을 열 수 있을까?
우우우웅.
운현의 기세가 대연무장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미명의 칼날은 어마어마한 검기에 가려 이미 보이지조차 않았다.
그 가공할 검기가 당장이라도 무허를 베어 버릴 것만 같았다.
‘으음.’
장문인 대행인 천운자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훅.
대연무장을 짓누르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방금까지 섬뜩하게 일렁이던 그 가공할 검기는 물론이고 검명조차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오직 때아닌 하얀 서리만이 운현의 주변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경책의 의미입니다.”
운현의 서늘한 목소리가 대연무장에 나지막이 울렸다.
무허는 갑자기 사라진 위압감에 당황한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짜악.
“커헉!”
운현의 손이 무허의 뺨을 내리쳤다.
내력은 실리지 않았으나 무허는 갑작스러운 타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반으로 잘린 무허의 검이 연무장에 나뒹굴었다.
챙그랑.
조용한 대연무장에 쇳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말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허가 한 짓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래 운현이 무허에게 쏟으려던 분노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도 말이다.
슥.
운현이 고개를 돌려 오행검진의 한 명인 지명을 보았다.
지명은 흠칫했다.
“괜찮습니까?”
“아……, 네.”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장문인 대행 천운자를 돌아보았다.
“계속하시지요.”
무엇을 계속하라는 것인지는 분명했다.
그러나 천운자는 대답 대신 긴 탄식을 흘렸다.
“허어…….”
운현의 자격을 시험해야 할 이유는 더 이상 없었다.
게다가 공동의 부끄러움이 드러난 마당에 누가 누구의 자격을 시험한단 말인가?
“공동파 장문인 대행으로서.”
슥.
운현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하며 천운자가 말했다.
“복룡복마검에 대한 대협의 요청을 승인하겠소.”
천운자는 두 손을 내리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무허의 어리석음을 사과드리오. 그리고…… 고맙소.”
고맙다는 천운자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운현은 천운자를 향해 마주 예를 표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자리로 향했다.
놀라는 금화영과 능세영 뒤로 객옹이 당연하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렇게 공동파의 시험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