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화. 공동파의 시험
복룡복마검을 깨우는 데 도전하겠다는 운현의 뜻은 혼원 진인을 통해 즉시 장로회의에 전해졌다.
장로회의는 발칵 뒤집어졌다.
장문인 대행인 천운자는 절대 반대를 주장했다.
그러나 경전에 능한 옥로 진인이 ‘복마검은 본래 시조께서 천하 만민을 위해 남기신 것이다’라는 원칙을 재확인하고, 공동의 시험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운현의 뜻이 전해지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일대 정파맹의 맹주인 창룡검주가 공동의 시험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엄청난 양보였던 탓이다.
상식적으로만 따져 보면 오히려 공동이 창룡맹주의 허락을 받아야 할 판이었으니 말이다.
천운자도 더 이상 무조건 반대를 할 수는 없게 되었다.
결국 장로회의는 시험을 전제로 운현의 도전을 허용했다.
시험 내용이 ‘도가의 경전’이나 ‘공동파의 역사’가 아니라 ‘무공’으로 정해진 것은 혼원 진인의 치열한 노력 덕분이었다.
공동파 대연무장.
많은 도인들이 대연무장에 모여 있었다.
말 그대로 공동의 모든 도사와 여관 들이, 복마행을 나간 이들을 제외한 전부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공으로 한정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네.”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혼원 진인은 말했다.
“이제껏 복마검을 깨우지 못한 것은 지식이 부족해서였나? 아니면 공동에 대한 헌신과 충성이 부족해서였나? 우리 모두가 알듯 복마검을 깨울 수 있는 건 결코 지식도, 연륜도, 지위도 아닐세.”
“그야 그렇지.”
옥로 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원 진인의 말에 동의했다.
“허나 무공이라 단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네. 공동 역사상 최고의 고수라 전해지는 사조들께서도 복마검을 깨우지는 못하셨으니까. 창룡검주가 제아무리 단신으로 태평맹을 물러서게 했을 정도라지만…….”
과연 그가 복룡복마검을 깨울 수 있을까?
옥로 진인이 옆에 있는 현기자를 돌아보았다.
“현기자,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고색창연한 불진을 든 현기자는 미소를 머금었다.
“글쎄? 내가 보기에 창룡검주는 이미 성공한 것 같네만.”
옥로 진인과 혼원 진인의 눈이 빛났다.
현기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동의 마음을 훔치는 데는 말일세.”
“으음.”
옥로 진인은 실망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하긴 제아무리 천문에 능한 현기자라 해도 창룡검주가 복마검을 깨울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하리라.
“하긴 그렇지.”
눈앞에 가득한 공동파 도인들을 보며 옥로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사든 여관이든, 수련이 오래된 자와 갓 입문한 자들을 막론하고 모든 도인들이 이 자리에 모여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신승의 사제이자 창룡맹의 맹주, 영웅맹을 무너뜨린 소문의 그 창룡검주가 공동파의 시험을 받는 놀라운 순간이니 말이다.
소외받던 공동파 도인들의 자존심은 드높아졌고, 겸허히 고개를 숙인 창룡검주에 대한 호감은 이미 대세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장문인 대행인 천운자도 뜻을 굽힐 수밖에 없다.
결국 현기자의 말처럼 운현은 공동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이미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도인들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흥.”
공동파의 오행이자 젊은 도사인 무허는 코웃음을 흘렸다.
“한낱 허명에 속아 저리도 열광하는 꼴이라니, 공동의 자존심은 어디로 갔단 말이냐?”
“허나 상대가 창룡검주잖아? 아미산에서 홀로 태평맹을 물러서게 했으니…….”
같은 오행이자 여관인 지명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강호의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야! 그의 허명은 신승의 후광과 조정의 권세를 등에 업은 것에 불과하다!”
날카로운 무허의 대꾸에 지명은 움찔했다.
옆에 있던 두 명의 도사와 한 명의 여관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무허는 자존심이 강하고 독단적이어서 자신의 뜻에 거스르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어찌 보면 오히려 잘된 일이지. 저자의 허명이 높은 만큼 우리 오행의 명성도 높아지게 될 테니까.”
저 멀리 보이는 운현의 모습을 노려보며 무허가 말했다.
단정하고 수수한 문사의 복식을 한 그 모습조차 무허에겐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우리가 저분을 이길 수 있을까?”
“저분?”
어이없다는 듯 말한 무허는 날카로운 어조로 쏟아 냈다.
“네가 감히 사문의 오행검진을 의심하는 거냐? 복마행을 했을 때를 생각해라! 화산과 무당의 대제자도, 남궁세가의 중직도 우리의 오행검진을 당해 내지 못했어!”
그들이 과연 화산과 무당의 대제자였는지, 혹은 허세나 사칭이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도 오행진을 당해 내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오만한 무허가 툭하면 시비를 일으켰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너희는 내 발목이나 잡지 마라.”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듯 무허가 말했다.
“저자는 내가 상대한다. 알았어?”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 앞에 지명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기는커녕 여전히 이해조차 되지 않는 오만한 말이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무허는 이들 다섯 중 유일하게 검기를 발현할 수 있었으니까.
“흥.”
지명을 노려보던 무허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 모든 이들 앞에서 증명해 주지. 내가 최고라는 것을.”
검기발현의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무허는 후기칠성에 들지 못했다.
후기칠성 중 그보다 못한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도 말이다.
전임 사대장로는 개인보다 연합의 힘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후기칠성이 서로 상생을 이루는 반면 무허의 오행진은 지나치게 한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무허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자신이 후기칠성에 들지 못한 이유는 오직 하나, 오행의 다른 넷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으득.
무허는 이를 갈았다.
운현을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저벅, 저벅.
대연무장 한가운에 천운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강렬한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도인들의 시선을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후우.’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도호를 외웠다.
본래 이 일은 이렇게 공개적으로 진행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대 정파맹의 맹주인 창룡검주가 공동파에 자격을 시험받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일까?
결국 이 일은 천운자조차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삽시간에 커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몸을 돌려 운현을 향해 눈짓을 했다.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저벅.
천운자를 향해 운현이 걸어갔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도인들의 시선이 운현을 따라 움직였다.
의아해 하는 이도, 초탈한 그 모습에 감탄하는 이도, 실망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운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슥.
운현이 예를 표하자 천운자가 도호를 외며 답례했다.
“공동의 삼극, 오행, 칠성이 대협을 시험할 것이오. 공동은 생사결을 인정하지 않으니 목숨을 거두지는 마시오.”
여느 문파의 비무와 비슷했지만 마지막 말은 사뭇 섬뜩했다.
목숨만 남아 있으면 상관없다는 뜻이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운현이 대답하자 천운자는 반대편을 향해 돌아보았다.
덜컹.
수염이 허연 세 명의 노도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파의 노(老)삼극이시오.”
천운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물러갔다.
운현을 향해 걸어오던 세 명의 노도사가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슥.
운현은 먼저 예를 표했다.
노도사들 역시 도호를 외며 정중하게 답례했다.
“창룡검주를 상대하게 되어 영광이오.”
“저 역시 영광입니다.”
운현의 답에 노도사들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사라졌다.
스릉.
세 자루의 검이 모습을 나타냈다.
유려한 자태를 지닌 데다 파사의 기운이 있다 하여 도사들이 많이 사용하는 송문고검(松紋古劍)이었다.
운현 역시 검을 꺼내 들었다.
스릉.
미명의 칼날이 햇살 아래 빛났다.
세 명의 노도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운현을 향해 검을 겨눴다.
우우웅.
검명이 흐르고 도사들의 송문고검에 내력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운현의 미명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타하!”
파바박.
노도사 한 명이 기합을 내지르는 것과 함께 세 자루의 검이 운현을 향해 동시에 짓쳐 들었다.
카강, 캉.
공동파의 대연무장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도사들의 첫 일격은 상대에 대한 압박이자 이어지는 연격의 시작이기도 했다.
세 곳의 방위를 점한 노도사들은 물 흐르듯 끊임없는 검격을 쏟아 냈다.
서로를 절묘하게 보완하면서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삼극진의 연격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노도사들의 내력 역시 무시할 수 없어서, 매 검격이 대단히 무겁고 위력적이었다.
단순히 셋을 합친 정도가 아니라 그 몇 배의 위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운현의 검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유려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운현의 검로는 세 노도사의 삼극진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답기까지 했다.
캉, 쉬리릭, 카앙.
어우러지는 네 자루의 검을 보며 공동의 도인들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얼마나 그렇게 공방을 이어 갔을까?
턱.
세 노도사가 뒤로 물러섰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던 연격이 끊긴 것이다.
운현은 검을 가슴 앞에 세우고 다른 손을 허리 뒤로 돌렸다.
“참으로 대단하시오.”
한 노도사가 말했다.
“그대의 검로는 처음과 지금이 여전하며, 검 끝에 한 치의 잡념도 없으니 그대가 행한 수련의 깊이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소.”
“과찬의 말씀입니다.”
운현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세 분의 검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니 마치 하나와 같군요. 삼극을 깨려면 세 분을 동시에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다른 노도사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어떻게 말이오?”
“이렇게 말입니다.”
우웅.
운현의 검 미명이 처음으로 검명을 흘렸다.
그리고 허공에 검로를 그렸다.
휘릭.
그저 사선으로 내리긋는 것이 전부인 지극히 단순한 검로.
세 노도사는 의아한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음 순간, 세 노도사는 동시에 오한을 느꼈다.
‘헉.’
삼극진의 무수한 형태 변화 중 단 한 순간이 노도사들의 눈앞에 똑똑히 떠올랐다.
그리고 조금 전 보았던 운현의 검로가 자신들의 삼극을 파훼하는 모습도.
‘……이, 이럴 수가.’
그저 검로일 뿐이다.
허공을 지나갈 뿐인 한 자루 검의 궤적.
그러나 그 궤적은 노도사들의 삼극진을 모래성처럼 허물어 버리고 있었다.
“허어.”
노도사들이 탄식을 흘렸다.
평생을 오직 삼극진에 정진해 왔다.
그래서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들로서는 운현의 검로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지켜보던 일부 장로들 역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검에 능한 그들은 운현의 검로가 가지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슥.
노도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검을 내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검을 맞잡고 말했다.
“공동의 삼극이 대협께 예를 표하오.”
허허로운 표정으로 노도사들이 말했다.
“우리가 졌소이다.”
“아닙니다. 저도 크게 배웠습니다.”
운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진법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노도사들의 삼극진은 가히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스릉.
노도사들의 송문고검이 모습을 감췄다.
숨죽이고 지켜보던 도인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운현이 보인 검로의 의미를 모르는 이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운현은 담담하게 세 노도사의 예에 답했다.
그들이 물러가고 운현은 장문인 대행인 천운자를 바라보았다.
천운자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은 공동의 오행이오.”
저벅.
문득 들려온 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다섯 명의 젊은 도사와 여관 들이 연무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장 앞서 걸어 나오는 젊은 무허의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역시 정파의 대협을 자칭하는 자답게…….’
운현을 바라보며 무허는 생각했다.
삼극을 깨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바로 압도적인 위력을 가진 검기로 짓눌러 버리는 것이다.
검기 앞에서는 설령 삼극진이라 해도 그 의미를 잃는다.
그런데 운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르군.’
아마도 그것은 공동의 마음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운현의 허점이다.
그 허점을 무허는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저벅, 저벅.
무허는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러나 뒤따르는 지명은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창룡검주를 상대하겠다는 거야?’
창룡검주는 거대 문파의 대제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수다.
아무리 공동의 오행검진이라지만 지명은 무허의 자신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뭘 믿고 ‘저자는 내가 상대한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일까?
운현을 향해 걸어가는 무허의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야심이 번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