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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55화 (455/530)
  • 455화. 복룡복마검

    깊은 밤, 공동파 장로회의.

    장로들은 여전히 격론을 이어 가고 있었다.

    혼원 진인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맹주가 직접 공동을 찾아왔네. 이처럼 우리를 존중하고 복마의 뜻을 보인 자가 누가 있는가? 신승인들 이리할 것 같은가?”

    그러나 신임 사대장로이자 장문인 대행인 천운자는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 신승조차 거대 문파들 때문에 와룡헌에 은거했지. 강호 무림에서 닳고 닳은 자들의 심계는 우리 같은 수도자들이 감당할 수 없다네.”

    “허어, 이 사람. 창룡검주가 바로 그 신승의 사제이지 않은가?”

    “그렇지. 그리고 거대 문파와 세가 들을 한 손에 휘어잡은 자이고 말이네.”

    천운자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가 다른 마음을 먹는 순간, 우리 공동은 오래 지켜 온 전통을 잃고 강호 무림에 휩쓸려 버리고 말 걸세.”

    완고한 천운자의 말에 혼원 진인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의 염려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선의로만 받아들이기엔 운현의 존재가 너무나 크니까 말이다.

    ‘창룡맹의 세에 비하면 우리 공동은……’

    그건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였다.

    창룡맹의 맹주가 가진 권세와 무력 그리고 강호 무림의 명성을 생각하면 가히 두려울 정도니 어찌 천운자가 염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

    “허나 천일검이 혈마인에게 습격을 받았네. 그것도 수십의 혈인들을 끌고 온 지옥혈룡에게 말일세.”

    다른 신임 사대장로 중 한 명인 옥로 진인이 말했다.

    흰머리가 성성한 그녀는 오랫동안 경전을 연구해 온 여관이었다.

    도가 문파에 여관이 있는 건 흔한 경우지만 장로의 자리에 오르는 건 파격이었다.

    그러나 공동파는 복마의 사명 앞에 남녀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가르쳤다.

    어찌 보면 그만큼 인재의 부족이 심각하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천운자, 현 상황은 두말할 나위 없는 위기일세. 이런 때에 창룡맹의 맹주가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나?”

    “자네야말로 다른 문파들이 우리를 업신여기고 조롱한 것을 잊었나? 상황이 급하다 하여 그들의 손을 덥석 잡았다가 또다시 이용당하고 버려지게 되면 그때는 어찌할 셈인가?”

    옥로 진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천운자의 말은 결코 기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여 명의 장로들은 대부분 창룡맹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승의 사제인 창룡맹의 맹주가, 그것도 옛 천일검과 함께 찾아왔다는 건 전례 없는 선의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중도적인 혼원 진인이 돌아선 것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장문인 대행인 천운자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작정하고 반대하면 장로회의에서 의결을 하더라도 사실상 집행이 불가능하다.

    장로회의가 장문인 대행을 무시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큰 문제고 말이다.

    혼원 진인은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그래서 천운자 자네는 어찌하자는 것인가?”

    “이제까지 해 온 대로 복마의 사명을 감당해야지.”

    “공동 홀로 말인가?”

    “아닐세. 마땅히 전통을 따라 절차를 밟아야지. 먼저 천하에 알려 혈교와 마교를 경계케 하고, 뜻을 같이하는 자들과 함께 혈교와 마교를 대적할 것일세.”

    “그게 창룡맹과 손을 잡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다르네. 창룡맹 맹주가 공동파 위에 군림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일도 없고.”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맹주가 직접 약조한다면?”

    천운자는 고개를 저었다.

    “혼원, 자네는 너무 순진하군. 그 약조가 지켜질 것 같은가? 결국 수많은 핑계를 들어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외면할 걸세. 이제껏 다른 문파들이 한 것처럼 말이네.”

    혼원 진인은 말이 막혔다.

    천운자는 아예 믿을 생각조차 없었다.

    허나 평생을 함께 수도해 온 천운자의 진정성 또한 모르지 않는지라 혼원 진인은 그저 도호만 읊조릴 뿐이었다.

    “……그리도 창룡맹의 맹주를 믿지 못하겠는가?”

    신임 사대장로 중 한 명인 현기자가 말했다.

    그는 경전과 천문의 연구에 평생을 바쳐 온 도사였다.

    천운자의 대답은 단호했다.

    “믿을 수 없네. 아니, 믿어서는 안 되네. 공동의 미래를 위해서 말일세.”

    장로회의에 침묵이 흘렀다.

    장문인 대행인 천운자가 이리도 완고하니 더 이상의 논의는 의미가 없었다.

    옥로 진인이 도호를 외우며 고개를 저었다.

    “……복마검이라도 깨우지 않는 한 자네의 신뢰를 얻을 방법은 없겠군그래.”

    그건 천운자가 지나치게 고집스럽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이제껏 복마검이 깨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천운자는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결국 장로회의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정회를 해야 했다.

    ***

    새벽, 공동파 객사.

    도사와 여관 들은 매우 이른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했다.

    사실 새벽이라기보다는 아직 밤이라 해야 할 시각이었지만, 공동파의 도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일어나 하루를 열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 해가 뜨자 사대장로 중 한 명인 혼원 진인이 객사로 운현 일행을 찾아왔다.

    그가 전한 소식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연유로 공동이 결정을 내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소.”

    혼원 진인은 운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곳까지 찾아 주셨는데 참으로 죄송하오, 맹주.”

    “아닙니다. 이것이 어찌 진인의 잘못이겠습니까?”

    운현은 급히 그를 말렸다.

    혼원 진인은 한숨을 쉬고는 도호를 외웠다.

    그를 향해 노부인 능세영이 물었다.

    “혈교와 마교에 대해서는 어찌하기로 했나?”

    “그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해서는 이미 경계하고 있었소. 설마 혈마인까지 일으켰을 줄은 몰랐으나…….”

    혼원 진인은 말을 끊고 운현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혈교와 마교에 대해 파악한 것들은 반드시 맹주께 알려 드리겠소. 이 혼원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오.”

    장문인과 전임 사대장로가 쓰러진 충격과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당분간 공동이 할 수 있는 것은 혈교와 마교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전부일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은 혼원 진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였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예를 표했다.

    “저희도 맹으로 돌아가서 대책을 마련해야겠군요. 공동과 함께하지 못해 참으로 아쉽습니다.”

    “나도 그러하오. 창룡맹의 힘과 공동이 쌓아 온 경험이 함께한다면 능히 복마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터인데 말이오.”

    혼원 진인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도움을 거절한 건 자신들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허어. 그러면…….”

    노부인 능세영이 무어라 하려고 할 때였다.

    혼원 진인은 안타까운 마음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복마검이라도 깨우지 않는 한, 인가…….”

    “복마검이라고 하셨습니까?”

    운현이 불쑥 물었다.

    혼원 진인은 눈을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운현의 시선에 혼원 진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신경 쓰지 마시오. 이건 그저…….”

    “진인.”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혈교나 마교와 맞서야 하는 건 공동파만이 아닙니다.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 주십시오. 기꺼이 경청하겠습니다.”

    “허나 이건…….”

    말을 흐리려던 혼원 진인은 흠칫했다.

    운현뿐 아니라 능세영과 금화영 그리고 객옹까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혼원 진인은 나지막한 한숨을 흘렸다.

    “……공동에는 시조께서 남기셨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검이 있소.”

    “시조라고?”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혼원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헌원이 찾아와 도를 구했다 하는 광성자십니다. 그 분이 선계에 오르시기 전, 후대를 위해 남기신 검이지요.”

    진중한 목소리로 혼원 진인은 말을 이었다.

    “한 번 휘두르면 삼천세계의 마가 굴복하며, 두 번 휘두르면 하늘의 용들조차 고개를 조아리는 검. 그래서 복룡복마검이라 합니다.”

    “공동에 그런 검이 있단 말이냐?”

    객옹이 물었다.

    혼원 진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허나 저희가 우매하여 그 검을 깨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만마를 굴복시킬 파사의 기운은커녕, 평범한 철검만도 못한 무딘 검에 불과하니까요.”

    노부인 능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깨워야 한다고 한 것이로군.”

    능세영은 운현은 돌아보았다.

    “어떤가? 맹주께서 해 보시는 것이?”

    잠시 생각하던 운현이 혼원 진인에게 물었다.

    “제가 외부인인데도 시도해 볼 수 있습니까?”

    “시조께서 천하 만민을 위해 남기신 것이니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소. 허나…….”

    혼원 진인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먼저 자격을 시험하자고 할 수도 있소. 복룡복마검은 공동이 오랫동안 지켜 온 것인지라 아무래도…….”

    그 완고한 천운자가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다.

    아니, 반드시 무언가 제한을 들고 나올 것이다.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이해합니다.”

    “……정말이오?”

    운현의 말에 혼원 진인이 오히려 놀랐다.

    창룡맹의 맹주에게 공동이 시험을 요구한다는 건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존심으로 죽고 사는 무림인들이라면 당장에 화를 내며 떠나도, 모욕이라며 분개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지금 운현은 당연하다며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 공동의 시험을 받아들이시겠소?”

    “네. 어떤 종류의 시험입니까?”

    “허어.”

    혼원 진인은 탄식을 흘렸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연신 도호를 외웠다.

    “참으로 부끄럽소. 맹주께서는 복마의 사명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는데, 정작 우리는 전통을 운운하며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오.”

    눈을 뜬 혼원 진인은 운현에게 말했다.

    “정해진 시험은 없소. 이제껏 외부인이 시도한 전례가 없었으니 말이오. 허나 내 반드시 공정한 시험을 약속하리다.”

    혼원 진인의 말은 진심이었다.

    창룡맹의 맹주가 공동에 찾아온 것만 해도 대단한데 스스로 권위를 내려놓고 공동의 시험을 받겠다니 말이다.

    “맹주의 말처럼 진심은 사람을 움직이오. 비록 맹주께서 복마검을 깨우지 못한다 해도 공동은 맹주의 뜻에 크게 감복할 것이오.”

    덜컥.

    혼원 진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즉시 장로회의를 속회해야겠소.”

    “아, 네.”

    운현이 일어날 사이도 없이 혼원 진인은 간단히 예를 표하고는 객사를 나갔다.

    그의 눈빛과 힘찬 발걸음은 결의로 가득했다.

    탁.

    객사의 문이 닫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잘됐군, 운 공자.”

    노부인 능세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혼원 진인이 말을 꺼냈으니 말일세.”

    복마검에 대한 것은 어젯밤 후기칠성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복마검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것이 뻔했으니까.

    선의로 알려 준 후기칠성의 젊은이들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결국 능세영이 선대 장문인의 이름을 팔기로 했다.

    예전에 언뜻 들었다는 식으로 말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혼원 진인이 먼저 말을 꺼내 주었다.

    “운 공자도 제법 연기를 잘하더군. 그렇게 능청스럽게 모르는 척을 하다니.”

    금화영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나쁜 뜻은 없었으니까요. 사실 법의 해석에도 의도를 중시하는 학파와 문구 자체를 중시하는 학파가 있어서…….”

    “깨울 수 있겠느냐?”

    객옹이 운현의 말을 끊었다.

    중요한 것은 운현이 복룡복마검을 깨울 수 있는 지였다.

    “글쎄요.”

    문득 낙일검이 운현의 뇌리를 스쳤다.

    그때는 북해빙정의 인연으로 낙일검의 비밀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가능할까?

    잠시 생각하던 운현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결심은 이미 되어 있었으니까.

    “한번 해 보죠.”

    “그래.”

    객옹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 봐라.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덤덤한 그 목소리가 섬뜩하게 들린 건 그가 바로 객옹이어서다.

    운현은 물론 노부인 능세영과 금화영까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운현은 객옹의 말에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 뒷일은 부탁드립니다.”

    웃으며 운현이 말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심각한 표정에 덮여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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