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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53화 (453/530)
  • 453화. 공동파의 혼란

    공동파의 장문인과 사대장로에게 큰 내상을 입힌 사람이 암천무제라는 말에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암천무제가 이곳에 왔었단 말입니까?”

    운현의 물음에 공동파의 장로인 혼원 진인은 나지막이 답했다.

    “그렇소. 암천무제에 대해 아시오?”

    “네. 그와 검을 겨룬 적이 있습니다.”

    혼원 진인의 눈동자가 빛났다.

    운현을 지그시 바라보던 혼원 진인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내 무례를 무릅쓰고라도 여러분을 피하려 하였으나 일중도영(日中逃影)이라, 한낮에 그림자를 피하듯 헛된 일이었나 보오.”

    혼원 진인은 일행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리로 앉으시오.”

    도관의 좌우에는 낡고 오래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일행이 자리에 앉는 동안 혼원 진인이 사람을 불러 차를 가져오라 일렀다.

    의자는 작고 오래되어서 편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차는 향이 매우 부드럽고 독특한 느낌이 있었다.

    혼원 진인은 능세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능 여협께서 오래된 인연을 잊지 않고 찾아 주셔서 감사하오. 혈교와 마교의 일이 중요치 않은 것은 결코 아니나, 본파의 상황이 좋지 않음을 양해해 주시오.”

    능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과 사대장로는 공동파의 최고 권위다.

    그들이 내상을 입어 폐관에 들 정도라면 상황이 좋지 않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혹시 이 젊은 여협께서 새로운 천일검이시오?”

    금화영을 보며 혼원 진인이 말했다.

    “그렇다네. 여러모로 부족한 제자지만 무공이라면 믿을 수 있지.”

    능세영의 말에는 제자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혼원 진인은 웃음을 지었다.

    “능 여협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라면 참으로 대단하시겠구려.”

    그는 손을 모으고 금화영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공동을 찾아 주셔서 고맙소. 빈도는 혼원이오.”

    “나는 천일검 금화영일세. 반갑네.”

    조금 주저하면서도 금화영은 자기를 소개했다.

    혼원 진인은 가볍게 웃었다.

    “허허, 금 여협의 패기가 예전 능 여협 못지않소이다.”

    그건 아마도 금화영의 말투 때문이리라.

    능세영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한창 반항할 때 말투를 못 고치는 바람에 이리되었다네. 나이 들면 알아서 고치겠지 했더니, 그게 안 되더군.”

    “이해하오. 나도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그래서.”

    객옹의 목소리가 혼원 진인의 말을 끊었다.

    “공동파는 혈교와 마교의 움직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냐?”

    혼원 진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는 무례라 할 수 없었다.

    상대는 바로 천하의 독선이니까.

    “독선께서 왜 이 일에 관심을 두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객옹이다.”

    혼원 진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독선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객옹은 설명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혼원 진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혈교와 마교가 심상치 않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비록 상황이 좋지 않다 하여도 공동은 ‘복마의 사명’을 지켜 나갈 것입니다. 허나 혈교가 이미 혈마인을 일으켰다면…….”

    그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지금의 공동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감당할 수 있다.”

    객옹은 서슴없이 말했다.

    “현이가 도울 테니까.”

    그건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운현이 돕는다는 건 일대 정파맹인 창룡맹의 조력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혼원 진인은 나지막한 탄식을 흘렸다.

    “……그래서 피하려 한 것입니다.”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운현이 얼른 물었다.

    “어째서요? 복마가 공동의 사명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함께 대처하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대협의 말씀대로요. 공동 내부에서도 다른 문파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니 말이오.”

    “그렇다면…….”

    “허나 사람은 연약하오.”

    탄식을 흘리며 혼원 진인은 말했다.

    “다른 문파들과 교류가 시작되면 그들의 풍요와 화려함 역시 들어오게 될 터. 그리되면 기약조차 없이 혈교와 마교를 경계하는 사명에 충실하려는 자가 얼마나 있겠소?”

    그는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지금 당장의 어려움은 넘길 수 있겠으나 결국 공동은 다른 무림 문파들과 똑같이 되고 복마의 사명은 잊히게 될 것이오.”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운현의 생각은 달랐다.

    “말씀대로 사람은 연약합니다. 그러나 또한 사람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강합니다.”

    혼원 진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운현은 말했다.

    “진인께서는 모든 무인이 장래의 이익 때문에만 땀을 흘린다고 생각하십니까? 밤늦도록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오로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십니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풍요와 화려함이 사람의 눈을 빼앗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세속을 버리고 스스로 고행의 길에 들어서는 이들은 얼마나 많으며, 고귀한 사명을 위해 삶을 헌신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의형 일충현은 끝까지 무인의 절개를 지켰다.

    신승 불영은 강호 무림을 손에 쥐었으나 스스로 물러나 와룡헌에 은거했다.

    그리고 의제 독고랑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 운현을 구했다.

    아무런 이득이 없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니 운현이 어찌 혼원 진인의 말에 동의할 수가 있을까?

    “공동의 사명이 옳고 고귀하다면 스스로 그에 헌신하여 본을 보이십시오. 그러면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진심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니까요.”

    “허어.”

    혼원 진인은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대협께서 빈도를 부끄럽게 하시는구려.”

    스스로 누구보다 공동을 위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운현의 말에 의하면 공동을 믿지 못하고 있는 건 바로 자신이 아닌가?

    “허나 대협의 말은 너무나도 이상적이오.”

    “저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문파의 어른 된 이들의 노력도 필요하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치 또한 뒤따라야겠지요.”

    “현실적인 조치라…….”

    혼원 진인은 말을 흐렸다.

    문득 객옹이 물었다.

    “그것이 네가 말한 ‘분란’의 원인이냐?”

    혼원 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와 마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이때, 외부인인 암천무제에 의해 공동파 최고수들이 쓰러졌으니 그 충격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장문인과 사대장로가 쓰러지자 남은 장로들은 즉시 장로회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장문인 대행을 선출하고 후임 사대장로를 임명하여 공동파의 혼란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공동파 최고수들이 암천무제의 검 앞에 쓰러졌다는 충격마저 없애지는 못했다.

    “이 상태로는 혈교나 마교의 준동을 감당할 수 없으니 다른 문파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이들과, 외부인은 결국 공동에 파멸을 초래할 뿐이라며 끝까지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이들로 나뉘었습니다.”

    강력한 상명하복의 조직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말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젊은 도사들은 이 문제로 서로 말다툼하는 일이 잦았다.

    장로들까지 의견이 갈렸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갑자기 나타난 능세영과 운현 일행에 경계의 눈빛을 보낸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전통을 고수하자는 건 결국 어찌하자는 뜻입니까?”

    운현이 물었다.

    혼원 진인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둘 중 하나요. 혈교나 마도의 준동을 막아 내거나, 혹은 공동파가 사라지거나.”

    서슴없는 그 대답은 공동파에 복마의 사명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알려 주었다.

    혼원 진인은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 대협께 협력의 뜻이 있다고 보아도 되오? 그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강호 무림의 정세와 무관하게 말이오.”

    “물론입니다.”

    운현의 대답 역시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다행이오.”

    혼원 진인은 허허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신승의 뜻을 이었다는 소문이 헛된 것이 아니어서 말이오.”

    “……부족할 뿐입니다.”

    운현은 조용히 답했다.

    폐쇄적인 공동파조차 신승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정사대전을 끝내고 무고한 피 흘림을 막아 낸 그의 뜻을 말이다.

    “능 여협의 일과 운 대협의 뜻은 내가 장로회에 전하도록 하겠소. 여러분은 공동의 손님으로서 얼마든지 이곳에 계셔도 좋소.”

    “그래도 괜찮겠는가?”

    능세영이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심한데, 창룡맹의 맹주와 독선이라면 만만치 않은 저항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혼원 진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소. 공동의 사대장로로서 그 정도의 권한은 있으니 말이오.”

    “사대장로라니? 자네가?”

    놀라는 능세영에게 혼원 진인은 말했다.

    “과분한 직분이나 어쩔 수 없었소. 쓰러지신 분이 바로 내 사형이셨으니 말이오.”

    사대장로는 장문인과 함께 공동파 최고의 권위다.

    그러나 혼원 진인의 표정에 기쁨이나 자부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어려움에 처한 공동을 향한 걱정만이 가득했다.

    “말씀드릴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암천무제는 일대상인이라 하는 자의 명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혈교와 마교의 움직임 역시, 일대상인이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혼원 진인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두 가지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과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의도된 것은 완전히 의미가 다르다.

    “일대상인이라 하셨소?”

    “그렇습니다.”

    운현은 말을 이었다.

    “문왕과 철혈사왕을 앞세워 무림맹을 무너뜨린 자 역시, 일대상인입니다.”

    혼원 진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림맹이 무너진 것에 이런 비화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일대상인이 혈교와 마교까지 준동케 하다니?

    운현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고, 능세영과 금화영은 물론 객옹마저 침묵으로 동의를 표시하고 있었다.

    “……허어.”

    혼원 진인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그가 되뇌는 도호만이 오래된 도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

    그날 저녁, 공동파 장로회의가 소집되었다.

    혼원 진인을 통해 전해진 능세영과 운현의 이야기는 장로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야기의 진위에 대해 의문이 쏟아졌지만 과거 혈마인을 참했던 천일검 능세영과 창룡맹의 맹주인 운현이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머나먼 공동파까지 직접 찾아왔다 하니 말이다.

    문제는 공동파의 대응에 대한 논의였다.

    혼원 진인의 염려처럼, 창룡맹의 맹주 운현의 존재는 그렇지 않아도 심각하던 분란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밤늦도록 회의가 이어졌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장로들의 격론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깊은 밤, 공동파의 객사.

    혼원 진인은 운현 일행을 위해 객사 한 채를 내어 주었다.

    다른 도관들처럼 이 객사도 낡고 비좁았지만 깨끗하고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덕분에 불편함보다는 오히려 예스러운 정취가 느껴질 정도였다.

    간소하고 소박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일행은 객사의 탁자에 둘러앉았다.

    “운 공자. 괜찮겠나?”

    문득 금화영이 운현에게 물었다.

    운현이 쳐다보자 금화영이 말을 이었다.

    “아니, 그게. 생각보다 공동파가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아서……. 아까 그 도사가 사대장로면 나머지는 안 봐도 뻔하지 않겠나?”

    “공동파 사대장로의 무위는 결코 낮지 않다.”

    그녀의 말에 답한 사람은 능세영이었다.

    능세영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암천무제가 장문인과 사대장로를 쓰러뜨린 것은 그들이 위협이 될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갑작스러운 변고로 전대의 깨달음을 전수받지 못한 후대들이 부족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음. 하지만…….”

    “네 기준으로 보면.”

    찻잔을 든 객옹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천하에 몇 사람 안 남는다.”

    후룩.

    객옹이 차를 마셨다.

    운현과 능세영은 그 말에 동의했지만 금화영의 불만족스러운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응?”

    무언가 말하려던 금화영이 말을 멈췄다.

    “괜찮다.”

    능세영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곳의 도사들이야.”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밖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만, 혹시 맹주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객사의 문을 열었다.

    달칵.

    작은 등 주위로 도사와 여관의 복식을 한 일곱 명의 젊은이들이 보였다.

    그들의 눈동자는 기대와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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