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공동산의 방문자들
운현과 객옹은 한낮의 햇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찻잔에서는 차향이 오르고 있었고, 눈앞에 펼쳐진 기련산의 풍광은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비록 그들이 앉아 있는 주변은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었지만 말이다.
끼익.
닫혀 있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운현이 고개를 돌리자 노부인 능세영이 방에서 걸어 나왔다.
사박, 사박.
그녀의 걸음은 우아하고 부드러웠다.
산속에서 평생을 지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셨군요. 어르신.”
“미안하군. 손님들끼리만 있게 해서.”
말하던 능세영은 객옹을 바라보았다.
객옹은 찻잔을 든 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지만 능세영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네.”
“고마울 것 없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객옹이 말했다.
“내가 하고 싶어 한 것이니까.”
능세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운현에게도 말했다.
“고맙네. 자네들에게는 내 어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군.”
운현은 미소로 능세영에게 답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세상에 마땅한 것이 어디 있겠나? 그저 고마울 뿐이네.”
그렇게 말한 능세영은 다시 객옹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객옹은 여전히 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할망! 어디 갔나! 할마앙!”
방 안에서 금화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능세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왈칵.
문이 열리며 금화영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능세영을 보고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할망!”
팍.
금화영은 서슴없이 능세영의 품에 안겼다.
능세영은 와락 인상을 썼다.
“너, 손님들 앞에서…….”
하지만 금화영은 아랑곳 않았다.
키가 큰 그녀는 능세영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볍게 혀를 찬 능세영은 손을 들어 금화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락.
“난 괜찮다. 그러니 울 것 없다.”
금화영은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을 능세영이 손으로 닦아 주었다.
금화영은 운현과 객옹을 돌아보았다.
“고맙네, 운 공자. 고맙소, 객옹 어르신.”
“이제 감사는 그만하셔도 됩니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능세영의 치료가 끝난 후 금화영은 몇 번이나 감사를 표했는지 모른다.
“그, 그래. 나는 잠시…….”
금화영은 후다닥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능세영은 한숨을 쉬었다.
“쯧쯧, 저리도 마음이 여려서야 어찌 세상을 살지…….”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금화영은 적이라 판단된 자들을 베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금가장에서도 두 마두를 죽이고 싶어 했고, 혈인의 목도 서슴없이 베었으며 심지어는 사체를 발로 차 버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일반적인 무인들조차 쉽지 않은 일이니, 여리다는 말에 쓴웃음이 나온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기분은 어떠냐?”
문득 객옹이 물었다.
능세영은 빈 의자에 앉았다.
“좋네. 한 십 년쯤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이군.”
“그렇다고 무리하지는 마라.”
객옹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능세영에게 말했다.
“이제야 간신히 기능이 회복된 셈이다. 예전 같은 감각으로 움직이려면 시간이 필요할 게야.”
“후후. 예전 같은 감각이라니 꿈만 같은 이야기일세.”
능세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루하루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던 것에 비하면 정말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고맙네.”
“감사는 이미 받았다. 그리고 나 혼자 한 것도 아니고.”
객옹은 턱짓으로 운현을 가리켰다.
운현은 얼른 말했다.
“감사는 저도 이미 받았습니다.”
능세영은 웃었다.
그녀의 나이 든 얼굴에 번져 가는 미소는 정말로 온화해 보였다.
능세영은 객옹에게 물었다.
“그럼 언제쯤 내려가면 되겠나? 가능하면 빨리 공동파에 가 보고 싶은데.”
“오늘이라도 상관없다. 다만 절대 무리는 하지 마라. 너는 어디까지나…….”
“고맙네. 누군가 날 걱정해 준다는 건 의외로 기분이 좋군.”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걱정한 적 없다.”
“그래, 그런 걸로 해 두겠네.”
능세영의 대답에 객옹은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운현에겐 그 모습이 더 의외였다.
객옹이 꼬박꼬박 대답을 해 주는 건 검성과 일은을 대할 때 외에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능세영은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또르륵.
피어오르는 향을 맡으며 능세영은 기련산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난 수십 년간 질리도록 보아 온 모습이었건만, 오늘은 어쩐지 유난히 새로워 보였다.
기련산의 한낮이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운현과 객옹은 능세영, 금화영과 기련산을 내려왔다.
늦은 출발이라 마을에 도착한 건 깊은 밤이었지만, 제일 험한 길은 환할 때에 지났기에 상관없었다.
조관, 항장익과 합류한 일행은 객잔에서 하루를 지내고 다음 날 아침, 공동산을 향해 출발했다.
따각, 따각.
커다란 마차가 관도를 질주했다.
능세영은 새삼 감회에 젖은 듯 지나는 기련산맥의 풍광을 바라보았다.
“이 풍경도 오랜만이군. 평생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운현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럼 계속 기련산에서만 계셨습니까?”
“그렇네. 예전에 혈마인을 추적할 때는 이곳저곳 많이 다녔지만 그래 봤자 대부분 감숙이나 사천, 청해 아니면 가욕관 서쪽의 옥문관 정도였으니까.”
옥문관은 가욕관보다 더 서쪽에 있는 관문이다.
능세영은 평생 풍요로운 강남이나 번화한 강북과는 인연이 없었다는 뜻이다.
“풍경은 예나 지금이 같은데 이토록 느낌이 다르다니, 결국 변하는 건 사람뿐인지도 모르겠네.”
능세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에 각 사람은 조용히 상념에 잠겼다.
따각, 따각.
마차는 쭉 뻗은 관도를 내달렸다.
황량한 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바깥으로 지나는 기련산맥의 모습도 점차 짙푸른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일행은 감숙의 성도인 난주로 달려가고 있었다.
***
난주에 도착한 일행은 객잔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조관을 통해 혈교나 마교에 대해 관에서 파악된 것이 있는지 알아보는 한편, 능세영을 위한 약재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관에 파악된 내용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운현은 혈교와 마교에 대한 주의를 안찰사사에 전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조관과 항장익을 난주에 남긴 채, 일행은 공동산으로 향했다.
천하의 상서로운 기운이 모인 도교의 명산이자, 용과 호랑이가 웅크린 것 같다고 일컬어지는 공동산.
옛 황제조차 도(道)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다던 바로 그 산에, 복마검으로 잘 알려진 공동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와아.”
금화영이 놀란 표정으로 감탄을 흘렸다.
운현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건…… 아주 대단하군요.”
폐쇄적이라는 공동파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공동산 깊은 곳에 자리한 여러 도관과 건물 들도 그러했지만, 멀리서도 보이는 암벽에 위치한 도관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실제로는 도관 건물의 전면부만 암벽에 건설한 것인데, 언뜻 보아서는 도관이 암벽에 묻힌 듯해서 대단히 신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공동산에는 석굴이 많아 예전부터 도사들이 석굴 안에서 수도를 했다더군.”
능세영이 말했다.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 그녀는 일행 중에 가장 공동파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저런 식의 도관도 만들어진 것이겠지.”
“참배객들도 제법 있는 것 같군요.”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며 운현이 말했다.
소림이나 무당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많은 참배객들이 향을 피우고 있었다.
깊고 험한 공동산의 산세를 생각하면 꽤나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공동파는 대단히 폐쇄적이지만 도관으로서는 또 그렇지도 않아서 말일세. 따로 전답을 소유한 것도 아니라서 어쩔 수 없겠지.”
말하자면 참배객들이 공동파의 재정을 떠받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곳 공동산은 수십의 도관과 사찰이 산재한 곳이기도 하니 말이다.
“자, 가 보세.”
능세영의 말에 운현과 객옹, 금화영은 발을 옮겼다.
커다란 문만 따로 세워 놓은 듯한 높다란 패방(牌坊) 앞을 공동파의 도사 몇이 지키고 있었다.
능세영은 그들 중 한 명에게 가볍게 예를 표하고 물었다.
“혹시 현명자께서 아직 공동의 장문인이신가?”
젊은 도사는 크게 놀랐다.
그는 능세영에게 급히 예를 표했다.
“아닙니다. 지금은 소양 진인께서 장문인의 직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헌데…….”
“아, 나는 능세영이라 하네. 예전에는 천일검이라는 명호를 썼었지. 괜찮으면 소양 진인에게 내가 왔음을 전해 주지 않겠나?”
젊은 도사는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곧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젊은 도사는 다른 도사들에게 무언가 말하더니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젊은 도사가 다른 나이 든 도사와 함께 걸어왔다.
나이 든 도사는 능세영을 향해 예를 표했다.
“천일검이십니까?”
“그렇소. 현명자께서 장문인이셨던 때에 잠시 인연이 있었소.”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일행은 나이 든 도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본 것처럼 공동파는 생각보다 크고 참배객도 많았다.
하지만 조금 안으로 들어서자 곧 인적이 드물어지고 고색창연한 도관이 일행의 눈앞에 펼쳐졌다.
“쯧.”
걷던 객옹이 문득 혀를 찼다.
그의 표정은 과히 좋지 않았다.
지나며 마주치는 공동파의 도사들이 하나같이 불쾌한 표정으로 일행을 노려보았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 봅니다.”
운현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이 든 도사는 일행을 한 건물로 안내했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제법 풍취가 있는 곳이었다.
도사는 문 앞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인. 천일검이라 하는 분을 모셔 왔습니다.”
“안으로 모시게나.”
안에서 들린 묵직한 목소리에 나이 든 도사는 문을 열었다.
끼익.
“안으로 드시지요.”
능세영은 안내해 준 나이 든 도사에게 감사를 표하고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금화영과 운현, 객옹도 발을 옮겼다.
탁.
뒤에서 문이 닫혔다.
건물 내부는 오래된 낡은 도관이었다.
그 도관 한가운데 허연 수염을 기른 도사 한 사람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슥.
도사가 눈을 떴다.
그는 도호를 외며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빈도는 공동파의 장로인 혼원 진인이라 하오. 시주께서 천일검이라 하셨소?”
능세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 제자에게 명호를 물려주었네. 내가 찾아온 이유는 바로 혈교와 마교 때문일세.”
혼원 진인의 눈썹이 움찔했다.
능세영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지옥혈룡과 그의 혈인들이 내 거처를 습격했네. 혈교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마교 또한 가만히 있지 않을 터. 공동은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알고 있는가?”
혼원 진인은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천일검께서 공동을 찾아오신 뜻은 알겠으나…….”
“그리고 언제부터.”
능세영이 혼원 진인의 말을 끊었다.
혼원 진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능세영이 말을 이었다.
“공동이 이런 식으로 오래된 친우를 맞이하였던가?”
그녀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불쾌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혼원 진인은 아직도 일행에게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이것은 곧 일행의 방문을 환영하지 않으며 언제라도 내칠 수 있다는 뜻이니, 능세영이 불쾌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후우.”
혼원 진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어찌 천일검을 모르겠소이까? 과거 공동을 찾아오셨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오.”
그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허나 지금은 때가 좋지 않소.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극도로 심해진 데다가…….”
혼원 진인은 눈을 들어 운현과 객옹을 향했다.
“이 두 분께서는 가는 곳마다 죽음을 뿌렸던 독선과, 강호 무림의 일대 정파맹이라 하는 창룡맹의 맹주시니 말이오.”
쓴웃음을 지으며 그는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독선이, 그리고 강호 무림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창룡맹의 맹주가 찾아왔다면 당장 공동파가 뒤집어질 것이 뻔했다.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로 말이다.
“우리는 이미 큰 상처를 입었소. 장문인과 사대장로께서 심각한 내상을 입고 폐관에 드셨으니 더 이상 분란을 일으키지 말아 주시기를 바라오.”
“심각한 내상이라고?”
능세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누가 공동파의 장문인과 사대장로에게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설마 혈교나 마교가…….”
혼원 진인은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암천무제라 하는 자였소.”
순간 운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