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기련산의 아침
넓고 큰 대전은 어스름에 휩싸여 있었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작은 등 하나뿐, 대전을 짓누르는 무거운 기운은 흐르는 시간조차 멈추는 듯했다.
그 기운은 바로 용의 형상을 조각한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사박.
조용한 소리에 용좌(龍座)에 앉아 있던 일대상인은 눈을 떴다.
어스름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한 여인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사박, 사박.
여인은 일대상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가슴을 드러낼 정도로 깊이 파인 붉은 비단옷과 하늘하늘한 겉옷을 걸친 그녀의 복식은 옛 당나라 때의 것이었다.
지금은 기루에서나 볼 법한 옷차림이었지만, 그녀의 화려한 미모는 그런 차림조차 전혀 어색하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사락.
여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차가운 대전 바닥조차 개의치 않고 그녀는 일대상인에게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주군.”
그녀의 머리 장식이 파르르 떨리며 희미한 빛을 반짝였다.
의자에 앉은 일대상인은 한 손에 턱을 기댄 채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슥.
여인은 고개를 들었다.
일대상인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여인은 말했다.
“옥문관의 수비군은 이제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요사스럽다고 할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가히 목소리만으로도 뭇 남자들의 마음을 진탕시킬 수 있을 정도였지만 정작 그녀의 매혹적이고 색정적인 얼굴은 한 점의 감정조차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수고했다. 독요.”
일대상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저 그것뿐이었지만 독요라 불린 여인의 눈빛은 파르르 떨렸다.
사락.
독요가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과분한 말씀이에요.”
격동을 이기지 못하는 듯 목소리조차 흔들렸다.
그때였다.
“쯧.”
옆에 서 있던 인태상이 혀를 찼다.
“이렇듯 시간이 지체된 이유가 뭐냐? 무제는 이미 감숙의 일이 끝났음을 고했거늘.”
인태상은 허연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고작 옥문관의 수비군 따위를 매수하는 일이 이렇게 오래 걸릴 리 없으니 틀림없이 네년이 흡정을 하느라 지체된 것이렷다!”
작고 뚱뚱한 인태상은 무서운 눈빛으로 독요를 노려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살벌한 기세가 쏟아졌지만 독요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살든 죽든 어차피 주군께는 무의미한 것들이었어요. 가련한 제가 조금 손을 대었다 한들 이토록 화를 내시다니요?”
여전히 고혹적인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이는 주군의 대업을 염려하심이 아니라 인태상께서 소녀를 미워하여 책잡고자 하심이 아닌지요?”
“흥, 그럼 내가 널 예뻐할 줄 알았단 말이냐?”
인태상은 그녀를 향한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빈정거리듯 독요에게 말했다.
“그리고 뭐? 소녀? 네 입가에 피나 닦고 말해라. 요사한 년.”
“이미 닦았어요.”
인태상의 조롱에도 독요는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다.
“살이 찢겨 피가 흐를 정도로 말예요.”
독요는 인태상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무제가 일찍 돌아온 것은 장문인과 사대장로만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지요. 그럴 거라면 차라리…….”
슥.
일대상인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독요는 즉시 입을 다물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윤기 흐르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고운 목덜미가 어스름 가운데서 유독 하얗게 두드러졌다.
“……물러가도 좋다.”
일대상인이 조용히 말했다.
독요는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일대상인의 침묵은 허락의 뜻이었다.
독요는 고개를 들었다.
“혈교의 지옥혈룡이 옛 원한을 갚는 데 실패했어요.”
옆에서 듣던 인태상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그러나 일대상인은 여전한 눈빛으로 독요를 내려다보았다.
“서른여섯의 혈인을 잃고 그 자신마저 한 팔을 잃어 재생했더군요. 이로써 혈교의 전력은 당분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요. 지금은 다른 세 명의 혈마인을 깨우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하니까요.”
으득.
인태상이 이를 갈았다.
“그 바보 같은 놈. 혈마인이니 뭐니 오만방자하게 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인태상이 물었다.
“그놈을 낭패하게 만든 자가 누구냐?”
“그것까진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마도 천일검 능세영이라는 자와 연관이 있지 않겠어요? 지옥혈룡은 그녀에게 원한을 갚기 위해 갔었으니까요.”
인태상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옥혈룡이 혈인들을 잃고 낭패를 당해 돌아올 정도면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다.
“주군. 이 일은…….”
일태상이 일대상인에게 말했다.
그러나 일대상인의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혈교의 일은 혈교에 맡긴다.”
담담한 음성으로 일대상인은 말을 이었다.
“그리하라 허락하였으니까.”
일대상인의 결정에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태상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독요 역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네, 주군.”
“네, 주군.”
전혀 다른 두 목소리가 동시에 답했다.
인태상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것뿐이었다.
독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락.
일어선 독요는 사뭇 애절한 눈빛으로 일대상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일대상인은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생각에 빠진 것인지 혹은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인태상조차도 말이다.
슥.
독요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일대상인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녀의 진심이었으니까.
“쯧.”
인태상은 독요를 보며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그는 독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처럼 시키지도 않은 혈교의 동향을 알아 와 자신의 필요성을 부각하는 얄팍한 속셈은 애교에 불과했다.
일대상인에 대한 독요의 광적인 집착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도를 넘을 정도의 질투도 인태상은 탐탁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녀가 일대상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문왕이 죽고 천하패령이 거두어진 지금, 매수와 협박은 물론 온갖 속임수와 유혹에 능한 독요는 진혼령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였다.
그것을 인태상도, 독요도 잘 알고 있었다.
인태상은 아직도 서 있는 독요에게 말했다.
“뭐 하고 있느냐? 어서 물러가라.”
눈을 감은 일대상인을 바라보던 독요는 인태상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인태상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독요는 곧 고개를 돌렸다.
사락.
몸을 돌린 독요는 천천히 대전을 나갔다.
인태상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사박. 사박.
인태상이 아무리 독요를 탐탁잖아 해도 일대상인은 그녀의 행동을 방관할 것이다.
일대상인은 저 높은 곳에서 만물을 내려다보는, 삼라만상의 흐름을 관조하는 자이니까.
그러니 독요가 ‘살든 죽든 주군께는 무의미하다’고 말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옳았다.
독요 자신조차 일대상인에겐 그러하니 말이다.
달칵.
독요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대전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커다란 용좌에 앉은 일대상인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자박, 자박.
독요는 길게 이어진 화려한 낭하를 따라 걸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조차 떠오르지 않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빛은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응?’
독요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시야에 다른 여인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박, 사박.
하얀 무복을 입은 가냘픈 몸매의 여인이 검고 긴 머리를 부드럽게 일렁이며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독요는 눈살을 찌푸렸다.
‘비련.’
맞은편의 여인은 바로 비련이었다.
‘무제, 문왕과 함께 주군께서 직접 거둔 셋 중 하나라지?’
문왕이 일대상인의 핏줄을 이었다면 암천무제는 일대상인의 무도(武道)를 이었다.
그러나 비련은 일대상인이 직접 그녀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암천무제의 그림자처럼 행동했다.
존재감은 물론, 자신의 의지조차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락, 사락.
가까워지는 비련을 독요는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하지만 비련은 독요를 향해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슥.
비련이 독요를 지나쳤다.
독요가 나지막이 말했다.
“무제는.”
사박.
아니나 다를까? 비련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함께 독요가 비련을 향해 돌아섰다.
“주군의 진혼령을 거행할 마음이 있는 거야?”
하얀 무복의 비련은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눈빛으로 독요를 바라보았다.
독요의 얼굴 역시 한 줌의 표정조차 없었지만, 비련을 향한 시선만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주군께서는 공동파를 멸하라고 하셨어. 그런데 고작 장문인과 사대장로만을, 그조차 죽이지도 무공을 폐하지도 않다니…….”
슥.
고개를 들어 비련을 내려다보며 독요는 말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지?”
비련은 물끄러미 독요를 바라보았다.
핏기 없는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건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야. 네가 판단할 문제는 더더욱 아니고.”
메마른 비련의 목소리가 낭하에 울렸다.
독요를 바라보는 비련의 눈빛은 지극히 무심했다.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슥.
비련은 고개를 돌렸다.
“주군께 필요한 사람은.”
독요의 고혹적인 목소리가 비련의 귀에 파고들었다.
끈적한 목소리로 독요가 말했다.
“바로 나야. 너희가 아니라. 주군께 너희는 그저 과거의 미련에 불과하니까.”
눈을 빛내며 독요는 말을 이었다.
“문왕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독요의 눈빛은 도발적이었다.
그러나 비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독요를 돌아보는 일도 없었다.
사박.
비련은 발을 옮겨 그대로 멀어져 갔다. 멈추지도, 돌아보지도 않고서.
“흥.”
홀로 남은 독요는 멀어지는 비련의 뒷모습을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독요가 말했다.
“다 죽어 버렸으면.”
비련의 모습은 이미 낭하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독요의 날카로운 시선은 오히려 더욱 스산한 빛을 내뿜었다.
“너도, 무제도, 삼태상도, 그리고 이 세상도, 전부 다 말이야.”
그녀의 얼굴에 비로소 표정이 번져 갔다.
그것은 마치 인형처럼 메마르고 섬뜩한, 뒤틀리고 일그러진 미소였다.
하지만 그 미소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락.
몸을 돌린 독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길고 화려한 낭하에 들리는 것은 오직 그녀 자신의 걸음 소리뿐이었다.
***
능세영은 눈을 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익숙한 침상의 천장이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능세영은 문득 무언가 무거운 것이 자신을 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능세영의 시야에 잠든 금화영이 보였다.
침상 옆에 앉아 있던 그녀가 능세영의 가슴을 베개 삼아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능세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능세영의 짜증은 바로 사라졌다.
잠든 금화영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 큰 주제에.’
능세영은 한숨을 쉬었다.
‘어릴 때처럼 악몽이라도 꾸는 거니?’
문득 금화영이 어렸을 때가 떠올랐다.
갓 네 살이던 금화영은 능세영이 데려온 후에도 계속 악몽에 시달렸다.
마을이 불타고 부모가 죽었으니 악몽을 꾸는 것도 당연했다.
결국 능세영은 어린 금화영을 보듬어 안고 함께 자야만 했다.
그 작고 따뜻하던 금화영의 온기는, 혈인을 베고 혈마인을 참하며 내상을 입은 능세영에게도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제야 금화영도, 그리고 능세영도 악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슥.
능세영은 다른 팔을 들어 금화영의 눈물을 살며시 닦아 주었다.
‘……넌 행복해야 한다.’
금화영을 보며 능세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날 행복하게 해 주었으니까.’
어리고 동글동글하던 금화영의 모습이 새삼 능세영의 눈앞에 선명했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던 모습도, 꽃처럼 활짝 피어나던 그 환한 웃음도.
능세영은 금화영을 바라보았다.
미소 짓던 능세영은 다시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음…….’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저 사랑하는 제자의 온기를 느끼며 더 쉬고 싶을 뿐이었다.
나지막한 숨소리와 함께 능세영은 어느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짹짹.
덧문을 닫은 창밖에는 기련산의 아침이 환하게 밝아 오고 있었지만 곤히 잠든 두 여인을 깨우지는 못했다.
봄날의 햇살처럼 부드러운 온기가 두 사람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그것은 객옹과 운현이 능세영의 내상을 치료한 다음 날 아침의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