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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50화 (450/530)
  • 450화. 복마(伏魔)의 의미

    지옥혈룡이 물러갔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주위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땅은 보기 흉하게 뒤집어져 있었고 나무는 부러지고 쓰러진 채였다.

    무엇보다 혈인들의 시커먼 파편들이 여기저기 흉측하게 널려 있었다.

    “후우.”

    노부인 능세영은 한숨을 흘렸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집이 이 꼴이 되었으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금화영도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치워야 할 사람은 자신일 테니 말이다.

    “어쩔 수 없구나.”

    능세영이 금화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닫자.”

    금화영은 무슨 소리인가 싶은 표정으로 능세영을 보았다.

    하지만 곧 그녀의 말뜻을 깨닫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탁, 탁탁.

    달칵.

    창문과 문이 차례로 닫혔다.

    금화영은 방 안에 있는 작은 화로에 불을 피우고 물을 올렸다.

    밖에는 기련산맥의 차갑고 혹독한 밤기운이 내려앉고 있었지만, 방 안에는 훈훈한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일행은 탁자에 둘러앉았다.

    금화영이 찻주전자를 가져오자 능세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찻주전자를 들었다.

    평소 자존심 높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 금화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박.

    그녀가 제일 먼저 다가간 사람은 객옹이었다.

    또르르륵.

    “고맙네.”

    객옹의 찻잔에 차를 채우며 능세영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자네 덕에 살았군. 술이라도 한 잔 내고 싶으나 지금은 이것으로 참아 주게.”

    “술은 마시지 않는다.”

    객옹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딱히 내 덕도 아니고.”

    능세영은 빙긋 웃었다.

    “그런가? 아, 그리고 조금 전에 자네가 보겠다고 한 것 말이네만…….”

    고개를 든 능세영이 눈짓을 했다.

    금화영이 얼른 달려가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작은 밥그릇을 위아래로 덮은 것 두 개가 객옹 앞에 놓였다.

    “그자의 팔은 벌써 핏물이 되어 땅으로 스며들고 있더군.”

    능세영의 말과 함께 금화영이 조심스레 밥그릇 하나를 열었다.

    달칵.

    안에 있는 것은 피로 물든 흙이었다.

    지옥혈룡이 남기고 간 팔이 한 줌 핏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금화영이 말했다.

    “어르신 말대로 절대 건드리지 않았네. 그리고 이건 혈인들의 파편인데…….”

    금화영이 또 다른 밥그릇을 열었다.

    그곳에는 새카만 가루가 들어 있었다.

    “벌써 부스러지고 있더군.”

    괴이한 것들이 밥그릇에 담겨 있으니 보기에 매우 거북했지만 객옹은 상관하지 않았다.

    사락.

    객옹은 품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꺼냈다.

    두루마리가 펼쳐지고 빼곡하게 꽂혀 있는 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객옹은 그중 하나를 빼서 조심스럽게 혈마인의 피와 혈인들의 파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금화영은 신기한 듯 눈을 반짝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사이, 능세영은 운현에게 다가와 차를 따랐다.

    또르르륵.

    부드러운 차향과 함께 능세영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도 수고했네.”

    “아닙니다. 어르신들께서 다 하신 걸요.”

    객옹은 운현이 어떻게든 해 줄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 운현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운현이 어떻게 하기로 한 지옥혈룡이 도주해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능세영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겸양할 필요 없네. 객옹이 얼마나 자네를 신뢰하는지 이미 보았으니까. 게다가 자네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나? 자네에 대해서는 앞으로 기대가 아주 크다네.”

    그녀의 태도는 이전보다 확연히 친근했다.

    능세영은 자신과 금화영의 찻잔에도 차를 채우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차를 음미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능세영이 물었다.

    “그래, 살펴보니 좀 어떻던가?”

    그건 객옹을 향한 물음이었다.

    객옹은 침을 거두며 말했다.

    “부패한 시독의 일종이군. 대단히 지독하지만 그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능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혈마인의 능력이 없으면 그저 평범한 사체일 뿐이니까.”

    말하던 능세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상하군. 벌써 혈교가 힘을 회복했을 것 같진 않은데……. 혹시 그사이 세상에 수많은 피가 흐른 일이 있었던가?”

    “없었다.”

    객옹이 답했다.

    “무림맹이 무너지긴 했으나 정사대전과 비할 정도는 아니지.”

    “흐음. 그럼 대체 어떻게 저들이…….”

    “대강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운현이 조용히 말했다.

    “확증은 없으나 아마도 일대상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대상인?”

    “무림맹을 무너뜨린 배후지요.”

    능세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운현은 무림맹이 무너진 것과 일대상인에 얽힌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했다.

    능세영은 내내 굳은 얼굴이었고 금화영은 때로는 놀라고 때로는 탄식하며 운현의 말에 집중했다.

    보글보글.

    화로 위에서 물이 끓었다.

    금화영은 운현의 찻잔에 새로운 차를 따랐다.

    또르르륵.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살짝 목이 메인 목소리로 금화영이 말했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신승과 독고랑이 운현을 구하기 위해 죽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능세영 역시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그랬었군.”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찻잔을 감싸 쥐었다.

    “그 정도면 확실히 일대상인이라는 자를 의심할 만하군. 게다가 상황이 그렇다면 마교도 움직일 것 같은데…….”

    혈교가 움직였다면 마교 역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능세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마교는 어떤 자들입니까?”

    운현이 능세영에게 물었다.

    “듣기에는 혈교와 비슷한 것 같은데, 서로 다른 집단입니까?”

    “음, 나도 깊이 아는 것은 아니네만.”

    능세영은 찻잔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혈마나 천마라는 신화적인 존재를 숭상하고 그들의 재래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네. 다만 혈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피를 흘리는 것을 추구하는 반면, 마교는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지.”

    “자신들만의 세상요?”

    “그래. 처음에는 세속과 무관한 종파인 척하지만, 일단 자리를 잡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장악하려 든다네. 민란이든, 폭동이든 상관없이 말일세.”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민란과 폭동이라니, 이건 대놓고 나라를 뒤집겠다는 말이 아닌가?

    “그들에게 이 세상은 오직 천마의 재래를 위한 제물일 뿐이네. 다른 종교들처럼 선을 행하거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건 전혀 없다네.”

    운현은 탄식을 흘렸다.

    사실 어찌 보면 모든 종파는 각기 그들만의 세상을 꿈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자아 성찰과 선행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조차 없다면 그건 이미 종파라 할 수 없었다.

    “혈교도 마찬가지일세. 듣기로는 혈교가 마교의 극렬 분파라는 이야기도 있더군. 혈마의 재래를 위해 더욱더 많은 피를 무차별적으로 흘려야 한다는 자들 말이네.”

    “세상에.”

    금화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어찌 그런 악한 자들이 있단 말인가? 그런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은 단칼에…….”

    “사람 같지 않은 것들은 어디나 있다.”

    그것은 객옹의 목소리였다.

    찻잔을 들어 올리며 객옹은 말을 이었다.

    “강호 무림을 왜 복마전이라 하겠느냐? 때로는 마교나 혈교보다 더 잔혹한 짓을 스스럼없이 저지르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능세영도, 운현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과연 마교나 혈교만이 악일까?

    어찌 보면 그보다 더 악한 일들이 세상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객옹은 금화영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너는 운이 좋았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금화영은 알 수 있었다.

    객옹의 말처럼 강호 무림은 복마전이다.

    설령 금화영 같은 고수라도 아무것도 모르면 눈 뜨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말 그대로 마(魔)가 웅크리고 있는 곳.

    그러니 금화영은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강호 무림에 처음 발을 디디며 만난 사람이 금가장의 노부부와 금혜린이었고, 그 후에는 운현과 객옹까지 만났으니까.

    “그렇군. 객옹 어르신의 말이 참으로 옳네.”

    금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훈훈한 눈빛으로 능세영을 바라보았다.

    사실 가장 운이 좋은 일은 능세영이 자신을 길러 준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능세영의 반응은 냉담했다.

    “안 하던 짓 하지 마라. 징그러우니까.”

    “할마앙!”

    금화영이 억울한 듯 항의했지만 능세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쨌든 혈교가 움직인 건 사실이니 공동파에 가서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네.”

    “공동파요?”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능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파는 대대로 이곳에서 혈교와 마교를 경계해 왔네. 이곳 감숙은 신강, 청해와 맞닿아 있으며 곤륜이나 천산과도 가까워서 혈교와 마교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일세.”

    운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곳 감숙의 검파라고만 들었던 공동파에 그런 숨겨진 사연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건 객옹도 마찬가지였다.

    “공동파가 말이냐?”

    “그래. 워낙 폐쇄적인 데다 검법도 지극히 잔혹한 탓에 정파도 사파도 아니라며 외면을 받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혈교와 마교라면 치를 떤다네. 자네도 그들의 복마검법 정도는 들어 보았을 것 아닌가?”

    운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복마(伏魔)는 마가 숨어 있다는 뜻도 있지만 마를 엎드러지게 한다는 의미도 있다.

    공동파의 복마검법은 혈교와 마교를 향한 그들의 결의이자 대대로 이어 온 신념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도 일은이 알려 주었지. 혈교를 추적하는 데 공동파의 도움도 적지 않게 받았고. 그들이라면 혈교나 마교의 움직임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을 걸세.”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헌데 혈교와 마교의 근거지가 신강과 청해에 있습니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네.”

    능세영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들이 발호한 지역은 대개 신강이나 청해 부근이었네. 워낙 험한 땅이라 조정의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지역인 데다, 천산산맥과 곤륜산맥이 버티고 있어서 숨기도 딱 좋거든.”

    천산산맥과 곤륜산맥은 그저 험하다는 말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은 산들로 이루어진, 마치 세상의 끝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장엄하게 펼쳐진 대자연의 벽.

    그것이 바로 천산산맥이었다.

    그곳까지의 거리도 대단히 멀어서, 변방이라는 이곳 감숙성조차 천산산맥에 비하면 그저 앞마당을 조금 나선 것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서장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 곤륜산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일부 관문 경비대를 제외하고는 조정의 영향력이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상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함께 가 보도록 하지요.”

    “오, 그래 주겠나? 고맙네.”

    능세영이 반색을 하며 운현에게 말할 때였다.

    “그 전에.”

    객옹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치료가 먼저다.”

    능세영이 멈칫하고 금화영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래! 할망부터 나아야지. 여기서 할 수 있겠나? 혹시 약재가 필요하면 내가 오늘 밤이라도 내려가서…….”

    “조용.”

    능세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급하게 말을 잇던 금화영이 즉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능세영을 바라보는 금화영의 눈빛은 사뭇 애절하기까지 했다.

    능세영은 한숨을 쉬었다.

    “알았네. 그리하지.”

    금화영의 표정이 환해졌다.

    능세영은 객옹에게 물었다.

    “허나 나 때문에 지체되어선 안 되네. 혈교가 움직였다는 건 아주 심각한 문제니까.”

    “걱정 마라. 뒷일은 현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능세영은 웃음을 흘렸다.

    운현에 대한 객옹의 신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객옹이 그렇게 말하니 능세영조차 운현이 어떻게든 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잘 부탁하네. 혈교도, 그리고 내 목숨도 말이네.”

    “물론이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객옹이 말했다.

    “혈교 따위는 마음껏 때려잡을 수 있게 해 주마.”

    능세영은 놀란 눈으로 객옹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능세영을 바라보는 객옹의 시선은 무덤덤할 정도였다.

    “훗.”

    능세영은 웃음을 흘렸다.

    처음엔 어이가 없어서 나온 헛웃음이었지만, 능세영의 입가에는 어느새 훈훈한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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